대한민국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있는 시간은, 아침 8시 30분에서 밤 10시까지, 족히 12시간이 넘는 긴 시간이었다.
“학교라는 곳 은 처음 다녀봐서 너무 떨려요.”
“아, 안 돼.”
“네? 어째서요?”
그런데 여원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 은, 그리고 만에 하나같은 반이 된다면,
24시간을 붙어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 그러니까. 학교는 말이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즐거운 곳 이 아니야. 매일 시험에, 경쟁에, 입시 준비에... 얼마나 무서운 곳 인데.
거기다 맞아. 너 야자라고 아니? 밤 10시까지 학생들을 학교에 가둬 놓는데, 얼마나 끔찍하고 짜증나는데.”
“어머, 밤 10시까지 학생들을 학교에 가둬 놓는다고요? 낭만적이어라...”
표정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여원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어. 저 애,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을 열심히 굴리던 지혁의 눈에 여은이 들어왔다. 지혁은 좋은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
씩 웃으며 여은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럼 저 꼬맹이는? 꼬맹이 혼자 하루 종일 집에 둘 수는 없을 거 아냐!”
“아저씨! 나 꼬맹이 아니거든?!”
“그건 걱정 말아요. 제가 생각이 다 있으니까요.”
“그... 그렇지만...”
‘여기, 샤프.’
그 한마디로 시작된, 지혁의 소중한 짝사랑에
“서방님, 그건 그렇고 같이 교복을 사러 갔다 오면 안 될까요? 교복을 아직 못 사서요.”
엄청난 위기가 찾아왔다.
3. 꽃피는 고교로맨스가 예고되었다. 예고만 되었다.
일요일 오후의 길거리는 마지막 휴일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눈 봤어?”
“봤어. 완전 파란색이더라.”
“젊어 보이는데, 3이 가족인가?”
그리고 그 중심에는, 왠지 모르게 사람들의 시선을 강탈하는 지혁과 여원, 여은이 있었다.
“있지 너... 그 눈, 원래 그런 색깔이야?”
“네. 마녀들은 원래 눈 색깔이 다양한데 저희 가문은 대대로 이런 푸른색 계통이에요.”
“우리 눈이 푸른색이라 불만 있어?”
“아니, 뭐 딱히...”
뾰로통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여은이 무언가를 보고 멈춰 섰다. 덩달아 지혁과 여원도 멈춰 섰다. 여은의 시선이 닿는 곳 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노점상이 있었다.
“저거 먹고 싶어?”
“딱, 딱히... 그런 거 아니거든?”
“아저씨, 아이스크림 하나 주세요.”
“제가 살게요, 서방님.”
“오늘 아침 얻어먹은 것 대신이라 생각해.”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은 여은은 처음으로 어린아이다운 환한 미소를 짓다가
“딱히 먹고 싶지는 않지만 아저씨 성의를 봐서 먹어줄게.”
라며 또 다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으며 입가에 묻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애였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3월이라 그런지 교복점에는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서방님-”
멍하니 교복점 밖을 바라보고 있던 지혁을 향한 목소리에 교복점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야, 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좀 마!”
“저 어때요?”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여원의 모습은 마치 원래 이 학교 학생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어떻기는 뭘 어때, 그냥 그렇지. 빨리 사고 가자.”
“그런데 여은이는요?”
“응?”
그제야 지혁은 3분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옆에 있었던 여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아까까지 여기 있었는데? 혼자 나갔나?”
“그렇다면 빨리 찾아야 해요. 혼자 두면 큰일 날 수도 있다고요.”
여원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지혁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맞아. 어제 우리 집에서 있었던 그 일들이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일어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
“빨리 찾으러 가요!”
“알았어.”
‘이 꼬맹이 녀석, 어딜 간 거야?’
지혁의 마음도 덩달아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귀엽게 두 갈래로 묶고, 우유같이 하얀 피부에 똘망똘망하고 큰 푸른색 빛 눈, 조그맣게 앙 다물어진 입술을 한, 아무리 봐도 저학년 초등학생으로 밖에 안 보이는 꼬마 아이가 혼자 길거리를 활보하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 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이었다.
“꼬마야, 길을 잃어버렸니?”
그런 여은에게 한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여은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여학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런대로 괜찮게 생겼네. 하지만 우리 엄마가 더 예뻐.’
생각을 마친 여은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저는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멍청한 아이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제 이름은 꼬마가 아니라 여은이에요.”
“그, 그렇구나. 미안해, 여은아.”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까진 없어요. 마음에 안 드는 아저씨가 아빠라고 하는 건 짜증나지만, 엄마가 원하는 거니까,
할 수 없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자리를 피해 주는 것뿐이니까요.”
“응?”
너무나도 당당한 여은의 말에 당황한 건 여학생이었다. 5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엔 꽤나 비범하였다.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
“당연... 어?”
저 멀리 여원과 지혁의 모습이 보이자, 여은은 말을 멈추고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뭐지? 이상한 애네...”
여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길을 향했다.
‘나 참. 일부로 분위기 좋게 해주려고 피해준건데.’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해 여은은 발걸음을 빠르게 하였다.
“꼬마 어린이들, 풍선 받아 가세요!”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저 멀리, 토끼 인형 탈을 쓴 사람이 아이들에게 풍선을 주고 있었다.
“나도.”
“응?”
“나도 줘.”
귀엽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소름끼칠 정도로 냉정한 여은의 목소리에 아르바이트생은 당황하였지만 애써 티내지 않으며
풍선 하나를 그녀에게 주었다.
“여기 있단다.”
“뭐야, 핑크색으로 줘!”
“하지만 핑크색은 이미 다 아이들이 가져갔어.”
“씨, 그럼 나 안 가져!”
풍선을 그대로 집어 던지고도 여은은 분이 덜 풀렸는지 연신 씩씩댔다. 여은과 반대로 핑크색 풍선을 얻은
여자 아이는 엄마와 함께 풍선을 갖고 놀기 바빴다.
‘나는 없는데... 나는...’
입술을 꽉 깨문 여은은 이글이글 타 오르는 눈빛으로 핑크색 풍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풍선은 압정에 찔린 것처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고 말았다.
“으앙- 내 풍선!! 으어엉-”
여자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며 울자 여은은 그제야 씩 하며 사악한 웃음을 보였다.
“강여은!”
“악-”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 했다. 여원의 등짝 싸대기에 여은은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때려!”
“왜 이런데 있는 거야?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일부로 아저씨랑 같이 있게 해 준 거잖아, 바보 엄마야!”
“누가 그러랬어?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랬는데. 앞으로 이런 짓 절대 하지 마.”
“알았어.”
‘다행히 풍선 터트리는 건 못 봤나 보다.’
만약 그것까지 들켰다면 여은의 등짝은 오늘 남아나지 않았을 것 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저기...”
여원이 조심스럽게 한 곳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지혁 뿐만이 아니었다. 지혁은 누군가와 다정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저 언니, 아까 그 언니네?’
여은에게 길을 찾아주려고 했던 그 여학생이었다.
“어? 지혁이다.”
불과 5분 전, 지혁은 유라와 맞닥뜨렸다. 그것도 여원을 옆에 두고 말이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여자 친구야?”
“아니, 절대 그런 거 아니야!”
강하게 부정하며 지혁은 여원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절대 서방이니 뭐니 그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유라가 갸웃거리며 여원을 바라보았다. 여원은 평소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촌이에요.”
의외로 자연스러운 여원의 말에 더 당황한 건 지혁 쪽 이었다.
“아, 둘이 사촌이구나?”
“응? 응...”
“그럼 둘이 얘기하고 있어요. 제가 더 찾아볼게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먼저 가버리는, 여원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혁을 향해 유라가 넌지시 물었다.
“저 아이, 진짜 예쁘다.”
“그런가?”
“응. 혼혈인이지? 눈이 파란색인데 꼭 보석 같더라. 그나저나 우리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고, 신기하네.”
“나도.”
지혁은 여원과 여은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은채 유라와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 혹시 저 언니가...”
“그래.”
아까 전 아무렇지 않았던 것 들은 모두 사라지고,
“서방님의 현생의 인연이야.”
더 없이 깊은 쓸쓸함만이 남아 있었다.
“오늘 저녁은 김치찌개 입니다!”
부엌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가 지혁의 눈을 사로잡았다. 저절로 군침이 돌 정도로 강력한 모양새였다.
“잘 먹겠습니다!”
야무지게 김치찌개를 퍼먹는 여은과 달리 지혁은 여원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왜 그러세요 서방님?”
“아, 저기 있잖아...”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어물쩡한 표정을 짓다가,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본 그 아이 말이지.”
“서방님이 좋아하시는 분이라고요?”
“그래, 내가 좋아하는... 어떻게 알았어?”
족집게 같은 여원의 말에 지혁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 했다.
“그야 아까 그 분을 보시는 서방님의 눈빛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거든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진짜? 내가 그렇게 본다고?”
“네.”
‘쟤가 눈치 챌 정도면 유라는...’
자신의 마음을 유라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자 부끄러움이 머리 끝 까지 차고 넘쳐, 지혁은 당장 쥐구멍으로 숨고만 싶었다.
“하여튼, 그러니까 앞으로 학교에서 ‘서방’ 이란 단어는 절대 금지야. 알았지?”
“네.”
‘싫다.’, ‘차라리 독수공방을 하겠다.’ 라는 등의 반응이 나올 것 이라고 생각했던 과는 달리 너무나 쉽게
‘네’ 라는 답변이 나왔다.
“저, 정말?”
“네. 학교에서는 사촌인 걸로 해요, 우리. 아까 그 분한테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뭐야, 이렇게 나오니까 더 이상한데?’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상관없어요, 서방님이 그 분을 좋아하셔도.”
그런 지혁의 마음을 아는지, 여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제 마음이니까요. 제가 서방님을 좋아하니까요. 그거 하나로 100년 동안 기다려왔으니까요.”
너무나도 강했지만
“저는 제 운명을 믿어요. 서방님과 함께 할, 제 운명을. 비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 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저는 이 운명을 믿을 거예요.”
또 너무나도 여린 그 목소리로.
침대에 누운 순간 피곤함이 지혁의 온몸을 눌러버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쉽게 잠이 오지 않는지, 한참을 뒤척이는 그였다.
“아저씨.”
“깜짝야!”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혁은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 밑에서 여은이 지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그 언니랑 우리 엄마 중에 누가 더 예뻐?”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빨리 대답해. 누가 더 예쁘냐고.”
협박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물론 내 눈엔 유라가 더 예쁘지만, 이 꼬맹이 하는 걸 보아 잘못 말했다간 어제 같은 사단이 일어날 수도 있어.’
냉정하게 판단을 마친 지혁이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하고 답했다.
“걔.”
“걔가 누구야?”
“그러니까 걔... 이름이...”
“우리 엄마?”
“응. 그래, 걔.”
지혁이 말을 끝내자마자 배게 하나가 날아와 그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악! 왜 때리는 거야?!”
“우리 엄마 이름 강여원이야, 걔가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서, 여은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저씨. 거짓말을 할 거면 예의상 표정이나 목소리 좀 바꾸고 해. 거짓말인 거 다 아는 거짓말이 세상에서 제일 기분 더러워.”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고, 지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대체 나 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저 망할 꼬맹이. 나중에 저런 딸 나을까봐 걱정되네.
그나저나 앞으로는 또 어떡하지? 진짜 돌아버리겠다.’
꽃피는 고교로맨스가 예고되었다. 예고만 되었다. 앞으로의 나날들의 예고 따윈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 상상일 것 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