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강여원입니다.”
처음 보는 학생들 앞에서 여원은 덤덤하게 자신의 소개를 이어갔다.
“그리고 저기, 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분은... 저의 서방님 이십니다.”
“뭐?” 하지만 곧 여원의 입에서 나온 폭탄 발언에 교실은 한 순간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은 지혁으로 향했다. 그 중에는 유라도 있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난 모르는 일 이라고!”
“아저씨, 부정해도 소용없어.”
“넌 언제 온 거야? 그 밧줄은 또 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여은이 밧줄을 든 채로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이거 놔!”
“100년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내빼려고? 그럴 수 없지. 아저씨도 100년 동안 당해 보라고!”
“으아아악-”
교실에 지혁의 애달픈 비명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4. 서방이라고 안 했는데요? 여보라고 했어요.
마치 어젯밤 3차까지 달리다가 아침 이슬을 맞고 온 것 같은 지혁의 표정을 보며 여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서방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요.”
“아니야.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그 순간, 여은과 눈이 마주치자, 지혁은 겁에 잔뜩 질려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아저씨. 굉장히 수상해 보여.”
“그건 그렇고 여은아. 당분간은 집에서 혼자 있어야 하는 거 알지?”
여원의 말에 여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여은은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하지만 진짜 며칠이면 돼. 며칠 후면 널 돌봐주실 분 들이 오실 거니까.”
“알았어. 혼자 있으면 되잖아.”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혼자 있다가 마력이라도 써서 집을 폭파 시키면 어떻게?”
이미 많은 것들을 경험한 지혁이 걱정스러움이 한가득 묻어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마세요. 어제 마계 홈쇼핑에서 산, 과학적으로 그 안정성이 입증된 어린 아이 전용 마력 억제 알약이 있으니까요.”
“마계 홈쇼핑?”
“네, 후후.”
“마계라는 게 정말로 있었어?”
“그럼요. 하여튼 이것만 먹이면 오케이랍니다.”
여원이 여은에게 알약과 물이 담긴 잔을 건넸다. 여은은 의외로 순순히 알약을 삼켰다.
“다녀올게, 여은아.”
“빨리 와야 해.”
그렇게 말하는 여은의 표정은 평소와는 다르게 애달파 보였다.
‘하긴, 아직 어린앤데. 엄마 없이 혼자 집에만 있으려면 좀 심심하겠지...’
갑자기 알 수 없는 미안함이 솟구쳐 오른 지혁은, 곧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갖고 와 여은에 손에 건넸다.
“이게 뭐에요?”
“그, 그러니까... 아무래도 혼자 있으면 심심할 테니까, 그거나 보라고.”
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이 받은 책의 제목을 조용히 읊어보았다.
“내 남자 친구는 일진 짱...?”
“내 동생이 유학가기 전에 자기는 이제 필요 없다고 나한테 주고 간 거야. 너랑 나이가 비슷하니까,
아마 네가 읽어도 나쁘진 않을 거야. 한글은 읽을 수 있지?”
“아저씨 지금 나 무시해? 하여튼... 재미는 없어 보이지만 성의를 봐서 읽어는 주지.”
여은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지혁과 여원은 등굣길에 올랐다.
‘분명 평소랑 같은 길인데...’
“날씨가 너무 좋아요. 오늘 같은 날은 어디 놀러가기 딱 좋은데!”
‘이제 앞으로는 ’평소‘ 같은 학교생활은 할 수 없겠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지혁과 달리 여원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기 바빴다.
“그럼 이따 봬요-”
여원이 교무실에 들어가고, 지혁은 자신의 반인 3반으로 향했다.
“김지혁-”
“깜짝야. 문 앞에서 뭐 하냐?”
문 앞에서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재원을 보며 지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다 봤어, 다 봤어. 오늘 아침에 같이 등교하는 그 여자 애 누구냐? 처음 보는 얼굴이니 전학생인거 같은데... 아는 사이지, 그치?”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아니긴. 하여튼 다행이다. 이제 신유라 그늘에서 벗어난 거 같으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런데 넌 왜 매일 유라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유라가 너한테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어?”
유라와 재원은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아이들의 주목은 늘 그들에게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원도 유라 못지않은 외모와 두뇌, 성격을 지닌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2학년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몰래 비밀연애를 하는 중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 소문에 귀를 뺏겨버린 지혁은 반포기 상태로 재원에게 넌지시 유라와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신유라? 미쳤어? 난 걔 끔찍하게 싫어.’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재원은 유라를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싫어한다는 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항상 남들 모르게 유라에게 시비를 걸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것이 ‘애정 표현’ 이었지만 말이다.
“사람 싫어하는데 이유 없어. 그냥 싫으면 싫은 거지.”
“미친놈. 네가 제일 싫어.”
“하여튼 둘이 진짜 무슨 사...”
“사촌사이랬어.”
재원의 말을 끊고 어디선가 가녀린 목소리 하나가 둘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지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뒤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지혁아?”
잠시나마 지혁은 천사를 보는 것 같았다. 하얀 순백에, 영원히 맑고 깨끗할 것 같은 천사를.
“응, 응! 사촌사이야. 맞아.”
“뭐야 사촌? 재미없게 시리.”
재원은 어쩐지 굳어진 표정으로 유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돌려 유라를 지나쳐 갔다.
“재원이는 내가 마음에 안 드나봐.”
“내가 대신 사과할게. 쟤가 원래 싸가지가 없거든.”
“너도 참~ 그런데 그 아이 우리 학교로 전학 오는 거야?”
“응.”
“그렇구나... 친해지면 좋겠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조례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자리로 돌아간 지혁은 아직까지도 두근거리고 있는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이거 그린라이트 인가?’
어쩌면 아직, 꽃 같은 고교로맨스가 끝나버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이 부풀었다. 입꼬리가 계속 올라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다들 조용, 우리 반에 전학생이 있다. 외국에서 와서 아직 한국 학교는 어색할 테니까 너희들이 잘 챙겨주도록.”
하지만 그 입꼬리는 곧 수직하락을 하고 말았다.
‘왜 하필... 수 많은 반들 중에...’
“안녕하세요. 앞으로 여러 분과 함께 공부하게 될 강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 반 인 거 야!’
주먹이 울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여원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서방이라는 말은 안 하기로 했으니까...’
“그럼 자리는...”
“저기 저 분 옆자리에 앉고 싶습니다!”
“맞아, 지혁이랑 사촌이랬지?”
“네, 그리고... 저의 ‘지아비’ 시니까요.”
지아비, 웃어른 앞에서 자기 남편을 낮추어 말하는 말. 혹은 남편을 예스럽게 말하는 말.
“뭐???”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반 안에서, 지혁은 사고회로가 멈춰 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여원을 바라보았다.
“여-보.”
‘지아비’ 에 이어 이번에는 ‘여보’ 라는 말과 함께 여원이 지혁의 옆자리에 다가갔다. 그 모습에 지혁은 물론 선생님,
반 아이들까지 경악을 금치 못 하였다.
“얘...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네 사촌이잖아!”
“그렇죠. 하지만 ‘금단’ 이라 할지라도 저희의 ‘운명’은 막을 수 없...으읍!”
“선생님. 얘가 오늘 아침에 뭘 잘못 먹은 것 같습니다. 제가 양호실 좀 데려 갈게요.”
더 이상 있다간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몰랐다. 지혁은 여원의 입을 틀어막고 질질 끌다 싶이 해 반을 빠져나와 사람이 없는 옥상으로 향했다.
“너 진짜 미쳤어?”
“박력 있는 서방님, 너무 멋있었어요.”
“하아... 서방이라고 안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네. 그래서 서방이라고 안 했는데요? 여보라고 했어요.”
어이없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래, 그냥 다 네 마음대로 해. 하지 말래도 어차피 할 거잖아? 대신 앞으로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들은 모두 장난이야.
애들한테는 그렇게 말할 테니까 너도 말 맞춰.”
지혁에 말에 여원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정말...”
“뭐야, 거기 누구 있어?”
지혁의 말을 끊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주?’
옥상에 올라오는 것 은 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지혁은 여원의 팔목을 잡고 옥상 한 편에 있는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창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옥상 문이 열렸다.
“어떤 쥐새끼 같은 놈이야, 안 나와?”
창고 안은 비좁았기에 조그마한 숨소리도 너무나 크게 들렸다. 지혁은 여원을 향해 두 번째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조그맣게 외쳤다. 타박타박 거리는 발소리가 연신 이어지다가, 곧 귓가에서 멀어지고, 옥상 문이 닫혔다.
“후, 깜짝 놀랐네.”
“서방님, 저 지금 심장이 터질 거 같아요.”
“왜?”
“이 곳은 어둡고, 또 우리 둘 뿐이잖아요.”
“히이익-”
여원의 말에 지혁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문 쪽으로 달려갔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나가...어?”
문고리를 돌려보았지만 그것 뿐 이었다.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깨닫고 지혁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 해 파래졌다.
“왜 그러세요?”
“문이 고장 났나 봐. 안 열려!”
“네? 그럴 리가?"
여원도 다가가 문을 열어보았지만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 휴대폰 있어?”
“아뇨. 그런 거 없어요.”
“나도 지금 반에 있는데...”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지혁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원도 눈치를 보면서 그의 옆에 앉았다.
“떨어져!”
“네!”
떨어져 봤자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다. 둘 사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게 다 쟤 때문이야. 쟤가 애초에 이상한 소리만 안 했어도...’
이미 1교시는 시작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옥상은 학생 출입금지라 오는 사람들도 드물었다.
지혁은 분한 마음에 여원을 노려보았다. 그때 여원의 시선이 창고 위 어딘가로 향했다.
“저기 창문이 있어요.”
한 사람은 충분히 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다만 좀 높다는 것 이 흠이었다.
“저기로 나가면 되겠다!”
“그런데 너무 높아 보여요.”
“사다리 같은 거 없나?”
창고 안을 이곳저곳 뒤져 보았지만 나오는 건 체육시간에 쓸 법한 공이나 배드민턴 라켓, 축제 때 쓰다 남은 현수막들이 대부분이었다.
“할 수 없지...”
“무슨 좋은 수라도?”
“네가 내 어깨를 밟고 일어서서 나가. 그리고 문을 열어 줘.”
“서방님의 어깨를 밟으라고요? 싫어요. 차라리 독수공방을 하겠어요.”
“그 놈의 독수공방, 독수공방... 그럼 뭐 어쩌라는 건데?”
“서방님이 제 어깨를 밟고 일어나세요.”
“뭐?”
“제 어깨는 더러워져도 상관없어요. 서방님을 위해서라면...”
지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여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싫어.”
“왜요?”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돼서 여자애 어깨 밟고 일어서는 건 좀 존심 상하잖아.”
“하지만...”
“너도 그런 소리 하지 마. 어찌됐건 너도 누군가한테는 소중한 딸이고 엄마잖아.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네 자신을 좀 더 소중히 대하란 말이야.”
조심스럽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차갑지만 다정한 말이었다.
여원의 두 눈에 담긴 지혁의 모습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빛이 나서
“네!”
어렴풋한 모든 것 들이 또렷해 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