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는 증기의 고동 소리를 내며 철도 위를 달렸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중, 객차 한구석 자리에 앉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창가에 가까이 앉은 그녀는 차분히 신문을 보고 있었다.
글을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는 평온했다.
긴 갈색 머리카락은 가만히 창문의 햇살을 머금었다.
검은 재킷과 긴바지는 그녀의 호리호리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검은색과 대조되어 자연스레 뽀얀 피부가 돋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다음 장을 넘기며 시간을 보냈다.
그것도 잠시, 어디서 피어났는지 모를 새근새근 잠드는 숨소리가 그녀의 침묵을 살그머니 지워냈다.
신문을 사뿐히 내려놓으며, 그녀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맞은편 좌석에는 나란히 앉은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기대며 곤히 잠들고 있었다.
소년은 얼핏 청년처럼 보였지만 아직 풋풋하고 앳된 느낌이 어슴푸레 남았다. 밝은 갈색 긴바지와 셔츠에 올리브색 조끼를 입고 있어서 제법 훈훈한 매력이 흘렀다.
소녀는 작은 아가씨였다. 아리잠직했고 깜찍했다. 리본 블라우스와 빨간 치마는 그 아이를 귀여운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그 아이들은 갸름한 턱선과 오뚝한 코가 서로 쏙 빼닮았고, 은 색깔로 뒤덮인 머리칼이 삐뚤거리는 것도 비슷했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편안하게 꿈나라로 여행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누구라도 미소를 짓게 하는 화목한 장면이었다.
그들을 지켜본 그녀는 창문을 내다보았다.
선선한 봄 하늘에 깨끗한 구름이 떠다니고 있다. 그 아래에 광활한 푸른 바다는 봄빛을 받으며 느긋하게 반짝거렸다.
부드랍게 굽어진 해안선을 따라, 저 멀리 옹기종기 모여있는 건물들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
라임 레볼티드는 리트로베리의 기차역이다.
사람이 많이 왕래하고 도시로서 상징성이 큰 기차역인 만큼, 그 규모가 성처럼 거대했고 아름다웠다.
홍색 중앙 돔은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역사의 외벽은 노르스름한 벽돌로 이루어졌다.
반원의 형태로 감싸진 입구 위쪽은 석재와 유리로 우아하게 꾸며졌다. 그 양옆의 작은 탑은 입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입구를 지나서 역내로 들어가면 드넓은 중앙홀이 보였다.
사람들은 열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인파를 따라서 중앙홀 뒤편에 있는 서측 복도를 지나면 승강장이 보였다.
고객의 편의를 위해서 지붕이 덮힌 승강장은 그늘이 졌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주위의 풍경은 햇볕에 스며들었다.
저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철로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잔뜩 실은 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차역에 도착한 열차가 휴식을 취하자, 연기는 구름이 되어 날아갔다. 이윽고 객차의 문이 열렸다.
그녀가 열차에서 내려오자,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왔다.
가볍게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진 그녀는 우두커니 그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도착했네.”
잠시 후, 소년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녀 옆에 선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와중에도 소녀와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혹여나 아이가 인파에 떠밀려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한 것 같았다.
문득 미심쩍은 눈빛을 머금은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안 가려고 했는데 누나니까 선심 쓰는 거야. 알겠지?”
퉁명부린 소년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툭툭거렸지만, 어렵게 결정한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달라는 귀여운 투정으로 보였다.
“알겠어, 알겠어.”
그녀는 온화한 웃음으로 보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 아이들은 병아리처럼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역사에서 벗어나면 생동적인 도시의 모습이 맞이했다.
푸르스름한 벽돌 도로 위에서 승합 마차와 차량이 복잡하게 뒤섞이며 다녔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보냈다.
광장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줬다.
화려한 분수대 주위에서 경쾌한 노래가 연주되고 있었다.
세계적인 도시의 이름에 걸맞게 먹거리와 볼거리가 거리에 넘쳐흘렀다. 평일인데도 축제를 연상하게 할 정도였다.
“대충 여기쯤일 텐데······.”
손에 쥔 음식이 다 먹어갈 때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년은 조용히 그녀를 힐끔 곁눈질하더니 덩달아서 주변의 건물들을 훑어봤다. 문득 소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나가 찾는 데가 저쪽에 있는 거지?”
그녀를 부른 소년은 검지로 북서쪽을 향해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쪽은『레이의 여관』이라고 적힌 간판이 달린 건물이었다. 부드러운 하늘색으로 물든 벽과 백색의 창문으로 꾸며져 있었다. 창가에는 예쁜 꽃들이 핀 화단이 놓여 있었다.
“맞아, 저기야.”
그녀는 한층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레이의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의 문이 열리자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입구로부터 바로 보이는 카운터에 한 여자가 있었다.
포근하게 검은색으로 뒤덮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옷의 소맷부리와 옷깃, 단추는 앙증스럽게 흰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귀엽고 순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그 여자는 깜짝 놀랐다.
“연화야,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에요, 레이 언니.”
그 여자의 이름은 레이.
레이는 카운터에서 벗어나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안 힘들었어? 돌아다니면서 다친 건 없고? 굶지는 않았지?”
“네. 잘 다녀왔어요. 레이 언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레이는 그녀의 얼굴을 점토처럼 주물럭거렸다. 그 탓에 그녀가 하는 말이 우스꽝스럽게 들려왔다.
“근데요, 언니. 제 얼굴을 그만 만지면 안 될까요?”
“미, 미안. 네가 가고 난 후에 걱정이 진짜 많았었거든.”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손을 뗀 레이는 멋쩍게 웃었다.
“위베르와 메리도 잘 지냈니?”
레이는 그녀 옆에 있는 소년과 소녀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 아이들은 잘 지냈다고 대답했다.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소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자리에 편히 앉아있어. 간단한 거라도 내올게.”
“네? 아녜요, 어차피 금방 가야······ 하는데······.”
레이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기다리는 신세가 된 그녀는 창가의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하얀 천으로 감싼 테이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 살며시 들어온 기분 좋은 햇빛은 이 어두운 공간을 운치 있게 꾸며놓았다.
주방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레이가 보였다. 고운 천이 놓인 유리 컵에 뜨거운 물을 차근차근 붓고 있었다. 감미로운 커피 향이 한가롭게 풍겨오기 시작했다.
카운터 왼쪽 구석엔 숙박 시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잠시 후, 레이는 주방에서 나오더니 쟁반을 테이블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쟁반에는 다양한 모양의 쿠키와 향기로운 커피가 담겨 있었다. 소녀를 배려했는지 우유도 있었다.
“어, 과자다!”
소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낼름 쿠키를 집어 먹었다.
소년은 커피가 익숙하지 않은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홀로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는 조심스럽게 레이를 바라보았다.
“그······ 저희 슬슬 가봐야 하는데요······.”
“괜찮아. 네가 왜 서두르려고 하는지 알고 있어. 하지만 나만 믿고, 지금 편하게 있어도 돼. 정말이야.”
오히려 그녀를 안심시키며, 레이는 자리에 앉았다.
“정말요?”
“응. 정말로.”
조용히 쿠키를 집은 그녀는 망설이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레이는 최근에 재밌었던 일들부터 이야기하듯이 풀어놓기 시작했다. 말솜씨가 좋아서 어느새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 그 아이들은 귀 기울였다. 아까 전만 해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그녀도 레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레이의 이야기처럼 시간도 여유롭게 흘러갔다.
어느덧 마차 소리가 가까이 들려오자, 이야기꽃이 시들었다.
“드디어 왔나 보네.”
레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넌지시 열리는 문 사이로 어느 한 청년이 여관에 들어왔다.
그는 검은 긴 바지를 입었고, 드레스 셔츠와 조끼 위에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흔히 소위 신사라고 불릴만한 정석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슈아씨?”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안녕하세요, 연화씨. 오랜만입니다.”
슈아는 볼러를 벗으면서 살며시 웃었다.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레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편지를 읽었는데, 일단 그곳에 가기 위해선 리토라르로 가야 하잖아. 꽤 멀기도 하니까 슈아씨에게 부탁했어.”
“연화씨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진짜요?”
이런 건 생각지도 못한 것처럼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참고로 돈은 내가 다 지불했으니 걱정 붙들어 매고.”
“네······ 에?! 아닙니다. 아무 대가 없이 도와드리는 겁니다. 괜한 오해 하지 말아주세요!”
깜짝 놀란 슈아는 필사적으로 양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이 재밌는지 조용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귓가까지 새빨개진 그는 말없이 레이를 쏘아보았다. 레이는 휘파람을 불며 먼 곳을 바라봤다.
“아, 아무튼, 출발합시다. 저는 미리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견디기 힘들었는지 슈아는 자리를 먼저 박차 밖으로 나왔다.
여관에서 나와보니, 길거리에 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상자형으로 된 검은색 마차였다. 4명이 탈 수 있을 만한 여유로운 좌석에, 밖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창문이 달려 있었다.
마차 아래를 동그랗게 받쳐준 곡선은 물결처럼 마부석까지 이어졌다. 슈아는 마부석에 앉은 채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먼 곳인데 괜찮아요?”
슈아에게 다가간 그녀는 그의 배려가 마음은 고맙지만, 한편으로 과분하게 느껴졌는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연화씨라면 어디든지 상관없습니다.”
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화야. 이럴 때는 감사합니다, 넙죽 받는 거야. 어서 타.”
레이는 등 떠밀면서 억지로 그녀를 자리에 태웠다. 그 아이들은 그녀를 따라 마차에 탔다.
“잘 다녀와.”
레이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살며시 얼굴이 풀리더니 레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잘 다녀올게요.”
◈
도시에서 벗어날수록 울창한 숲이 주위를 메우기 시작했다.
무성하게 자란 푸른 나뭇잎이 살랑거렸다. 산길을 따라가면, 저 멀리 노르스름하게 물든 광활한 들판이 펼쳐졌다.
돌과 나무로 이루어진 집들이 띄엄띄엄 있었다.
리토라르 마을은 마치 동화책에서 현실로 튀어나온 것처럼 수려했다. 산뜻한 분위기가 잔잔하게 마을을 맴돌았다.
마차가 향한 곳은 갈색 지붕으로 뒤덮인 새하얀 주택이었다.
슈아는 고삐를 지그시 잡아당기며 차근차근 말을 세웠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녀는 사뿐히 땅을 내디뎠다.
“감사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슈아는 부드럽게 대답하면서 마부석에서 조심히 내려왔다.
“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슈아가 모자를 벗자, 황금빛이 뒤덮인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바람결에 살랑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던 회색 눈빛이 문득 창문으로 향하더니, 살포시 미소를 띤 그는 입을 열었다.
“오시는 것 같네요.”
“네?”
슈아의 귀띔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화씨인가요?”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녀는 조용히 뒤로 돌았다.
“마차 소리에 나와봤는데 이번엔 좋은 일이었네요.”
현관에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의 푸른 눈동자는 그녀를 향했고,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여자는 살며시 입을 열었다.
“의미를 찾았나요?”
그녀는 말을 아꼈다.
곱씹는 듯이 그녀는 묵묵히 그 여자를 바라봤다.
다시금 봄바람이 불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빛이 평안하게 반짝이며 봄빛을 머금고 있었다.
“긴 얘기가 될 것 같아요. 앤 언니.”
그녀는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