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이후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마치 죽은 동료에게 달려드는 물고기 떼처럼 비도를 뜯어먹으려했다. 그리고 그건, 그의 가족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는 나흘이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장마가 일주일이나 이어질 거라고 말했다. 비도는 기자회견을 연 뒤로는 거의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화장실에 가거나, 물에 밥을 말아먹을 때를 빼고는 작업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 외에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끊임없이 집 앞에서 기웃거리는 기자들과 출판업자들을 쫓아내는 일뿐이었다. 빗소리로 눅눅해진 작업실 안에서, 그는 원고지 위에 만년필을 서걱댔다. 그러나 빗소리와 비교하여 서걱대는 소리는, 그가 작업실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을 생각했을 때, 거의 들리지도 않는 것에 가까웠다.
만년필은 앞으로 나가기를 망설이는 것처럼 원고지의 한 칸 위에 갇혔다. 그는 원고지를 파헤치면 뭔가를 발견해내기라도 할 것처럼 만년필을 북북 그어댔다. 걸레짝처럼 찢어진 원고지 안에 잉크가 새카맣게 번져들었다. 비도는 자신이 남겨놓은 흔적을 토사물이라도 되는 양 쳐다보았다.
그 때 비도의 핸드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원고지에서 시선을 떼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바로 전화를 거절했다. 통화기록에는 똑같은 번호가 6개나 떠 있었다. 비도는 아예 그 번호를 스팸번호로 지정해 버리고는 핸드폰을 구석에 내팽개쳤다.
비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잔뜩 눅눅해져 버린 머리칼은 손가락 틈에서 힘없이 구겨졌다. 그는 어떻게든 뒷이야기를 생각해내려고 했지만, 자리에 앉아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점점 하얗게 비워져 가는 것만 같았다.
“그 애라면…”
그렇게 중얼거리던 비도의 얼굴에 경멸로 일그러졌다. 그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얼굴을 쳐다봤다. ‘그 애라면…’이라고? 비도는 두개골을 열고 그 속에 손을 집어넣어, 방금 그 생각을 떠올렸던 뇌를 짓뭉개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한참이나 자기 파괴의 욕구를 억누르던 그는 모든 걸 다 내팽개쳐놓은 채로 작업실을 나왔다. 그 자리에 아무리 오랫동안 앉아 있어봤자, 찢어진 원고지와 엉망진창으로 번진 잉크자국 외에는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아니, 포기하면 안될 이유라도 있나? 그는 더 이상 아등바등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어쩌면 더 이상 머리를 싸매면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는지도 몰랐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얻었다. 그는 작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었고, 그가 벌어들였던 돈은 아직도 충분히 남아있었다. 그래. 이제는 그냥 쉬면 돼. 그는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이라고는 귀찮게 달려드는 하이에나들을 무시하는 것, 쳐내는 것뿐이었다.
그는 소파 위에 앉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가 그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그는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아주 깊은 곳까지 빠져들었다.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가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공기의 가장 아래쪽, 어둠이 너무 습하고 진득해서 숨조차 쉽사리 쉴 수 없는 곳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로,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녀가 앉아있는 철제의자. 그녀의 잘려나간 발. 모든 것이 현실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어쩐지 그녀만은 너무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두들기는 타자소리, 그것 역시 기이할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다.
“원고지 같은 건, 구닥다리들이나 쓰는 거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직접 만들어지는 것 같이 울렸다. 비도는 어둠 속에서 귀를 틀어막으며 입을 열었다.
“……”
그의 입은 뻐금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오직 타닥, 타닥, 타닥 하는 타자소리만 칠흑 같은 진공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안에서 비도는 뭐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당연히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도가 떠들어대는 것을 마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어둠에 거의 파묻혀있었지만, 비도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비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사실은 너도 알고 있잖아?”
가슴 속을 계속 맴돌던 불꽃이 솟구쳤다. 그의 몸을 터져나갔다. 비도는 소리 없는 괴성을 질렀다. 비도의 손에는 어느새 망치가 들려있었다. 그는 겁에 질린 듯이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진정된 얼굴로 망치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띵동-
비도는 억지로 끌려나온 것처럼 꿈에서 깨어났다. 그가 있는 곳은 더 이상 꿈 속의 심연이 아닌 푹신푹신한 소파였다. 그렇지만 그는 꿈에서 느꼈던 진득한 습기를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비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서 숨을 헐떡댔다. 그 꿈은 악몽이었을까? 비도는 탈진한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숨을 골랐다.
띵, 띵, 띵동-
초인종이 채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뒤따라 흘러나온 초인종 소리는 그 전의 것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비도는 꿈속에서 들었던 타자소리가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인터폰 쪽으로 걸어갔다.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로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비도는 몸을 움찔했다. 뭘 무서워 하는 거야? 날 위협할 수 있는 건 이제 없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터폰의 렌즈 속에서는 한 남자가 우산을 털어내고 있었다. 새까만 야구모자를 푹 눌러써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비도는 한 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뒤로는 비가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비도는 가만히 서서 화면을 쳐다보기만 했다. 우산을 몇 번 털어 물기를 흩어낸 남자는 얼굴을 들이밀면서 소리쳤다.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좀 열어라.”
그의 요청에도 비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도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남자는 결코 비도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이미 비도의 얼굴이 어떤지 짐작하고 있었다.
“얘야, 얘기 좀 하자.”
“지금 하고 있잖아요.”
남자는 욕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는 참을성이 상당히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정도 사리분별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웃는 얼굴을 지어내며 말했다.
“밖에 날씨 보이지? 비를 엄청 맞으면서 왔단다. 일단 안에 좀 들어가서 얘기하자.”
“들어올 필요 없어요. 어차피 당신이 무슨 말을 할 지는 다 알고 있으니까.”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은 그가 했던 일이나, 앞으로 요구할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얼굴이 마구 일그러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숨긴 것에 불과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비도 역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가족이니까 말이다. 가족이라는 두 음절이 그에게는 그보다 더 혐오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버지한테 당신이 뭐니.”
그는 조곤조곤한 말투를 흉내냈다. 비도는 코웃음을 쳤다. 아마 그는 살면서 그 따위 말투를 진심으로 쓴 적이 없었을 것이다. 비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니 엄마가 또 뭔 이상한 말 한 거냐? 이번엔 그런 거 아니다. 이번엔 진짜 제대로 된 사업이야.”
비도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일부러 그가 들을 수 있도록. 남자는 턱에 온갖 힘을 다 주면서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참아라, 참아라.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돈 효과가 있었다. 그는 욕설도 내뱉지 않았고, 한숨도 내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비도가 선수를 쳤다.
“어차피 나한텐 당신의 망할 사업 같은 거 대줄 돈은 없어요.”
“아니, 하…”
그는 입을 감싸 쥐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있는 힘껏 입을 틀어막았다. 새어나오는 욕설을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렇게 있다가 욕설이 다시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나서 소리쳤다.
“그 현실인지 뭐시긴지 마지막 권 출간하시면 돈도 무지막지하게 들어올 거 아니냐. 하나밖에 없는 아비를 그것도 못 도와줘?”
“신문도 안 보세요? 전 제가 죽기 전까진 ‘현실’은 안 낼거에요.”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인터폰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빌어먹을 책을 왜 안 내는 건데? 쓰지 말라고 할 때는 그렇게 쓰겠다고 하더니, 왜 이제는 안 쓰겠다는 거냐?
응? 이젠 네 그 잘난 글 솜씨도 한 물 간 거냐?”
“당신은 알 필요 없어요.”
비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문에다가 우산을 집어 던졌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의 괴성이 빗소리를 뚫고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인터폰의 스피커가 왱왱 울렸다.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문에다가, 또 우산에다가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우드득하고 우산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참아왔던 온갖 욕설을 마구 쏟아냈다. 발길질은 그가 제풀에 지쳐 자빠질 때까지 계속됐다. 발길질을 끝내고, 그는 물기로 번들거리는 바닥에 앉아 씩씩거렸다. 비도는 조금도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누가 뭐라 해도 난 죽기 전까지는 작품을 안 낼 거에요. 그리고 설령 낸다 하더라도 당신한테 줄 돈은 없어요.”
남자는 바지가 젖어 들어가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렇게 앉아서 비도를 노려보았다. 실제로는 그냥 인터폰의 렌즈를 노려보는 것뿐이었지만, 비도는 그의 눈길을 직접 맞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는 더 이상 발길질을 하지도 않았고,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는 빗속으로, 잔인하게 몸을 파고드는 빗속으로 사라졌다.
#
그리고 그와 비도는 지금 다시 빗속에 있었다.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비구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에 눈 뜨는 것은 고사하고, 숨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콧속으로 비가 끊임없이 들이쳐서, 코로 숨 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비도는 입을 잔뜩 벌리고는 숨을 쉬어야만 했다. 빗방울은 비도가 숨을 쉬는 것이 못마땅한 듯 입 안을 향해 마구 쏟아져 내렸다. 그는 거의 아플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멍하니 바닥을 쳐다봤다.
바닥에는 그가 파다만 구덩이가 있었다. 거의 사람 한 명은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구덩이는,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비 때문에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비도는 자신의 노력을 비웃듯이 흘러 들어오는 빗물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그는 이를 악 물고는 다시 구덩이를 파 내려갔다. 그가 삽을 휘두를 때 마다, 물인지 흙인지 모를 것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거의 흙을 파내는 건지 물을 퍼내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비는 그를 익사시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구덩이 안에 쏟아졌다. 하지만 비도는 아랑곳 않고 계속 삽질을 했다. 점점 숨이 가빠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구덩이 밖으로 올라가는 게 힘들 정도가 되고, 구덩이에 찬 빗물이 그의 발목을 집어삼킬 때가 되어서야 그는 삽질을 멈추었다.
그는 구덩이 밖으로 삽을 집어 던지고는 낑낑대며 구덩이를 기어 올라왔다. 그의 얼굴과 몸은 온통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비도는 물 먹은 솜처럼 흙 위에 늘어진 채로 헐떡거렸다. 그가 그러건 말건 비는 끊임없이 산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산의 표면 위로 끊임없이 흐르는 비 때문에, 마치 산의 표면이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비도에게 마치 거대한 괴물 위에 누워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죽어버린 괴물의 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그의 입으로 흘러들었다. 그건 마치 괴물의 피를 마시는 것 같았다. 그는 연신 푸푸 거리며 빗물을 뱉어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그걸 마시기를 거부하는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게걸스럽게 마시려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누워 한참을 있었다. 몸의 기운이 전부 비에 쓸려나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그저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쓰러져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일은 마저 끝내야 했다. 일단 시작한 일은, 시작한 손으로 끝내야 했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도는 빗물이 마구 흘러내리는 얼굴을 한 번 손으로 쓸어냈다. 그리고 구덩이 옆을 쳐다봤다. 빗물은 마치 노크를 하는 것처럼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비는 그것을 똑똑똑 하고 두들겼다.
비도는 굳은 얼굴로 그걸 내려다 봤다. 그래 봤자 소용없어. 이미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혔다. 그 가시는 깔대기로 되어있었고, 하늘에서 내리는 우울함과 싸늘함과 냉기는 모조리 그 깔대기를 타고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어차피 이 자식은 쓰레기였어. 비도는 듣는 사람도 없는 허공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침을 삼키려 했지만, 도저히 침을 삼킬 수가 없었다. 주먹만한 응어리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는 대신에 마구 떨어져 내리는 빗물을 입으로 모았다. 꼴깍 꼴깍하고 비를 삼킬 때마다, 비릿한 맛이 났다.
빠직
갑자기 난 소리에 비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둠과 비, 그리고 나무밖에는 없었다. 그의 눈이 비바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꺾인 나뭇가지로 향했다. 부러진 나뭇가지는 수풀에 꽂힌 채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비도는 마치 거기에 누군가가 숨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이내 고개를 도리질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날씨에, 이런 시간에, 이런 장소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기이한 인기척은,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죄책감? 아니, 죄책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마땅히 죽여야 할 놈을 죽인 것뿐. 그냥 아무것도 아닌 걸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 그는 눈길을 거둬들였다.
비도는 그것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것의 옆구리에 손을 댔다. 그건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웠다. 빗물 때문이야. 비가 차가워서 그런 거야. 비도는 눈을 꾹 감고는 중얼거렸다. 그는 이를 악 물고 팔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것의 옆구리를 밀어냈다. 손을 통해 통나무처럼 뻣뻣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다리가 후들거려왔다. 이건 통나무야. 그냥 통나무야. 단지 물을 잔뜩 먹어서 무거운 거야. 그는 주문이라도 외는 것처럼 중얼중얼댔다.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평생 그의 앞에서 머무르고 있을 것만 같던 그것도 결국에는 움직였다.
마치 그에게 굴복했던 것처럼, 그의 의지를 무너뜨리지 못한 것처럼. 묵직한 몸이 질척거리는 진흙 위로 미끄러졌다. 생기 없는 팔다리가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흙탕물이 튀어올랐다. 구덩이에는 이미 상당히 물이 많이 차서인지 그건 거의 거기에 잠기다시피 했다. 짙은 황토색의 물이 그것의 턱 밑에서 찰랑거렸다. 기괴한 각도로 꺾인 팔이 물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게 마치 손을 내미는 것처럼 느껴져서 비도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비도는 구덩이 옆에 서서 그것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깨져서 피로 물들어있던 머리는 빗물에 씻겨져 말끔하게 되어있었다. 마치 잠을 자는 듯한 평온한 모습이었다. 비도는 그 모습이 빗물에 잠길 때까지 쳐다보았다.
빗물이 차올라 오직 오뚝 솟은 코만이, 찰랑거리는 흙탕물 위로 튀어나와 있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다시 삽을 손에 쥐었다. 모든 게 끝나기 전, 무언가 말을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목구멍을 간질이는 것들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
하지만 그의 말은 금세 빗소리에 파묻혔다. 누구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가만히 서있었다. 빗소리는 그럴 일은 없다는 듯이 더욱 거칠게 내렸다. 비도는 삽을 고쳐쥐었다. 그는 흙을 퍼내 구덩이에 쏟아 부었다. 비에 잔뜩 젖은 흙은 쉽사리 구덩이로 곤두박질 쳤다. 그것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빗소리도 숨겨주질 못했다. 철퍽철퍽하는 소리가 밤새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