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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미 책을 팔아서 상당한 부자가 되어있었고, 그가 작품 발표를 중단한 이후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최고의 작가로서 칭송 받고 있었다. 그는 작가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전부 얻었다. 이미 얻은 것을 위해서 다시 싸울 필요는 없었다. 그건 그의 강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편하게 먹어. 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얻어낸 것을 거의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남들이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명예와 부가 그의 손안에 있었다. 이제는 그냥 그것을 쓰면서 살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서 비도는 단 한 글자도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그 자신도 모르게 작업실로 걸어가는 일이 생기자, 그는 작업실을 아예 열쇠로 잠가버렸다. 그녀의 망령도 그 방 안에 갇혀버린 듯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 옆을 지나갈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작업실로 눈길이 가긴 했지만, 그건 그저 버릇일 뿐이라고 비도는 생각했다. 뻔질나게 들락날락 거리던 곳이었으니 의식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일 터였다.
스스로의 강박을 떨쳐내고, 마음을 편하게 갖게 되자, 비도의 생활은 훨씬 편하고, 만족스러워졌다. 더 이상 자리에 앉아 몇 시간씩이나 끙끙댈 필요가 없었다. 그저 수백 만원짜리 홈시어터로 영화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는 팔아치웠던 고급 SUV를 다시 타고,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질주했다. 또 백화점에서 남들이 쳐다만 보고 있는 것들을 마구 집어와 전시해놓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창작물을 토해내기 위해 힘쓸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남의 것을 보고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게 훨씬 쉬웠고 더 즐거웠다.
그 날에도 비도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영화를 틀어놓고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싸늘한 냉기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뭉게뭉게 뭉치는 냉기들이 발을 쓸고 지나갔다. 냉장고 안에는 아이스크림 대신 별 쓸모없는 것 밖에는 없었다. 비도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기 위해 마트를 가는 건 번거로운 짓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시간이 넘쳤다. 예전처럼 무언가를 할 때마다, 그 때문에 포기해야하는 몇 글자들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냉장고 문을 닫고는 집을 나섰다. 대문까지 지나간 그는 뭔가를 발견한 듯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았다. 대문에 달린 우편함에 편지 하나가 들어가 있었다. 무심코 편지를 집어 들려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별장의 주소를 거의 외부에 전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별장에 편지를 보낼 사람은 별로 없었다. 출판업자나 기자라면 직접 찾아오거나 전화를 했을 터였다. 극성 팬 밖에는 그걸 보낼만한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는 찝찝한 가운데에 그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편지를 뜯다 말고 편지의 겉을 살폈다. 편지의 겉에는 수신인도 발신인도 적혀있지 않았다. 마치 새 편지를 그저 풀만 붙여 바로 보낸 것만 같았다.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살폈지만, 역시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편지의 내용물을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호기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는 반쯤 뜯은 편지를 그냥 땅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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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는 그의 양 손을 합친 것보다 커다란 그릇에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리모컨을 들고 볼만한 것들을 뒤적거렸다. 영화에, 드라마에, 평생 동안 텔레비전만 봐도 그것들을 전부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버릇처럼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려던 그는 자신이 숟가락을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부엌에서 숟가락을 꺼내 다시 소파 앞으로 걸어갔다. 거실을 가로지르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현관 앞에 편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비도는 숟가락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반쯤 뜯겨진 편지. 비도는 그것이 얼마 전 자신이 받은 편지라는 것을 알아챘다. 목덜미의 잔털이 누가 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짝 곤두섰다. 그리고 그의 눈은 현관문으로 향했다. 비도 자신은 결코 이 편지를 집 안에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문의 틈으로 편지를 집어넣은 듯 했다.
그리고 비도는 문 안에 편지를 넣으려면 대문이나 담을 넘어와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불쾌함이 온 몸을 내달렸다. 서늘하고 축축한 것이 온 몸을 핥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비도는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 주변에 있는 나무들, 그 나무에 기생하고 있는 그림자들. 그 어디에서도 사람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비도는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집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유독 낮아 보였다. 그는 겁을 숨기려는 듯이 문을 세게 닫았다.
그는 문에 기대어 서서 편지를 노려봤다. 수신인이 적혀있지 않는 걸로 보아서는 이 편지를 쓴 누군가가 직접 우편함에 편지를 넣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걸 버리자마자 문 틈으로 밀어 넣었다는 것은 이 주변에서 계속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반만 붙어있는 편지를 거칠게 뜯었다. 너덜너덜하게 뜯긴 편지 봉투가 팔랑거렸다.
안에는 사진만 몇 장이 들어가 있었다. 비도는 사진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멈칫 했다. 이내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그는 문을 짚고 간신히 섰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새벽에, 그 퍼붓는 빗속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꼬였다. 마치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이 구정물과 뒤섞여 버렸다. 비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다시 편지를 내려다봤다. 편지 안에는 어떤 글도 써 있지 않았다. 거기엔 오직 사진만 몇 장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사진 속 비도는 비에 잔뜩 젖은 채, 시체를 구덩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비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머리가 아뜩해졌다.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그럴 리 없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그걸 부정해 봐도 사진에 찍힌 것은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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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는 탁자 위에 흩어져 있는 사진들을 훑어봤다. 그가 시체를 끌고 가는 모습, 구덩이를 파는 모습, 구덩이에 시체를 밀어 넣는 모습, 시체를 다시 파묻는 모습. 모든 것이 다 찍혀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편지 봉투 안에는 오직 사진 밖에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거기에는 어떤 요구사항 같은 것도 적혀있질 않았다. 차라리 전 재산을 내놓으라는 편지가 있었다면 그게 더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 편지를 받은 지가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경찰이 그를 찾아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고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만약 정말 신고를 할 생각이었다면, 그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것을 보며 즐거워 할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게 굳이 사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사진을 찍은 사람은 비도에게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사진을 보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벌써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편지를 보낸 녀석이 누구던 간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비도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거지?
시계 태엽이 딸깍 거리면서 돌아가는 소리만이 그의 마음을 자꾸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모든 것을 벗어 던졌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그를 방해하던 사람들 뿐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서 그를 구속하던 것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가 쌓아놓은 것들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겨우 카메라로 찍은 사진 몇 장에, 그가 이뤄낸 것들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갈기갈기 찢었다. 마구 찢겨진 그의 모습이 팔랑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우우웅
비도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핸드폰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하게 몸을 떨었다. 비도는 재빨리 핸드폰을 낚아챘다. 화면에는 발신자 표시 제한이라는 글자만 떠올랐다. 그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머뭇거렸다. 편지의 주인이 어서 연락해오기를 기다리긴 했지만, 동시에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계속 연락이 안 올 지도 몰라, 라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의 떨리는 손가락이 화면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받기도 전에 전화는 갑자기 음성 메시지 모드로 바뀌었다.
“뭘 그렇게 머뭇거리십니까?”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렸다. 비도는 깜짝 놀라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뭘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냐고? 그건 마치 비도가 머뭇거리고 있는 걸을 직접 보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편지를 보낼 때,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지금도 그를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비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움직이기가 무섭게 다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아뇨. 일어나진 마시고. 계속 앉아계세요.”
비도는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이 녀석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의 바로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거머리가 그의 몸에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도는 떨리는 손으로 커튼을 쳤다. 그러자 전화 너머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걸 또 왜 치고 그러십니까. 팬 서비스 정신이 너무 부족하시네요.”
비도는 황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뭐야.”
“제가 뭐냐고요? 글쎄요. 질문이 너무-“
“당신 뭐냐고!”
비도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것이 그의 감정을 떠밀고 있었다. 그는 집 안을 서성거렸다. 몸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비도는 다시 쏘아붙였다.
“너지? 이 사진들 보낸 거 너 맞지? 너 누구야. 응? 너 누구냐고.”
”저는…”
비도는 숨 죽인 채로 답을 기다렸다.
“작가님의 열렬한 팬입니다.”
비도는 핸드폰을 집어던질 뻔한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불리한 것은 그였다. 이 남자는 비도가 살인을 저지른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야 했다. 그게 돈이든 뭐든 그걸로 이 남자가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 했다. 그게 안 된다면…
“원하는 게 뭐야. 얼마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겨우 돈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비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돈 때문이 아니라고? 그는 핸드폰에 얼굴을 바싹 붙였다.
“그럼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지?”
“아, 우선 말이죠. 제 질문에 대답해주시면, 저도 그 질문에 대답해드릴게요.”
“좋아. 말해 봐..”
“작가님은 왜 마지막 권을 안 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남자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도는 그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비도는 두려움과 분노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이성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비도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본론을 말해! 그딴 게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스피커 너머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짜증스러워하며 말했다.
“제 질문에 답해주시면 제가 이러는 이유도 말씀드린다고 했잖아요..”
“장난치지마. 원하는 게 뭔지 그거나 당장 말해.”
“제 질문에 답해주시면 제가 원하는 걸 말씀드린다니까요.”
“웃기지마. 당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비도가 화를 내자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곤란하게 나오시네요. 제 질문에 답해주지 않으시면 이 사진들 경찰서에도 보낼 겁니다.”
비도는 몸을 움찔했다. 경찰들이 사진을 보게 된다면 그는 끝이었다. 뒷산에 묻었다는 것을 알 테니 금세 시체를 찾을 테고, 그는 빼도 박도 못하고 감옥에 갇힐 게 분명했다.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질 것이라는 것 역시 예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일이 잘 해결 될까? 비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구를 들어주더라도 사진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남자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요구해 댈 것이 뻔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비도가 모든 것을 잃을 때까지 그것은 계속될 것이었다.
정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비도는 그것을 깨달았다.
“…생각할 시간을 줘.”
비도는 베란다 쪽을 쳐다봤다. 이 남자는 베란다를 통해서 그를 보고 있었다. 베란다의 정면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그가 시체를 묻은 바로 그 산. 이 남자는 거기에 숨어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도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핸드폰의 마이크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곧장 지하실을 향해서 뛰었다. 현관문은 눈에 띈다. 지하실의 문으로 나가면 그가 알아챌 수 없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거의 굴러 떨어질 듯한 기세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는 지하실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망치를 집어 들었다. 그가 지하실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이 남자는 계속 뭐라뭐라 지껄여대고 있었다. 비도는 이를 악 물었다. 실컷 떠들어라. 곧 그 입을 다물게 해줄 테니.
비도는 조심스럽게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지하실의 입구는 땅에 반쯤 파묻힌 채로 곧장 산의 옆길로 이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나무들이 마치 지하실을 가려주듯이 서 있었다. 여기로 나가면, 그는 눈치챌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는 숨 죽인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답은 언제쯤 주실 겁니까?”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줘.”
비도는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수풀 사이에 숨어 자신의 베란다를 쳐다보았다. 베란다를 볼 수 있는 곳. 비도는 이를 악 물었다. 베란다는 2층에 있는데다가 탁 트여있어 베란다를 볼 수 있는 장소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어떻게든 녀석이 있는 곳을 찾아내야 했다.
비도는 바닥에 놓인 돌멩이들을 집어 들었다. 그 녀석이 눈치채고 도망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망치를 허리춤에 쑤셔 넣고는 한 손 가득히 돌멩이를 들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돌멩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시간을 두고, 여러 방향으로 던졌다. 왼쪽, 왼쪽 사선, 그리고 정면. 매번 돌멩이를 던지고 나서 그는 핸드폰을 귀에 바싹 붙였다. 그가 돌멩이를 던진 곳에 이 남자가 숨어있다면 분명 소리가 들릴 터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비도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지하실 문으로 빠져 나온 것을 본 걸까? 이미 도망쳐버린 것일까?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그랬다면 모든 건 끝이었다. 안절부절했다. 몸의 뿌리가 조금씩 사그라 드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여기서 초조해하면 안 돼.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그가 정말 도망치기로 했다면, 당장 전화를 끊고서 경찰에 신고를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전화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아직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어서 그를 찾아야 했다.
그는 오른쪽 사선으로 있는 힘껏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는 허공으로 날아가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비도는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나무가 무언가에 부딪혀 파삭거리는 소리였다.
찾았다. 그를 찾았다.
번갯불이 몸을 타고 흘렀다. 남자는 아직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돌멩이가 나무에 떨어지는 것을 눈치 못 챘거나, 아니면 그걸 그냥 별게 아닌 걸로 치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회였다. 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몸을 잔뜩 숙이고 빠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발 밑에서 풀 소리가 사그락하고 나거나, 어쩌다가 나뭇가지가 부스러지기라도 할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소리가 났던 방향으로 50미터 가량을 갔지만 이 남자의 실루엣조차 볼 수 없었다. 돌이 생각보다 멀리까지 날아갔던 것이었을까?
비도는 다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는 소리가 났던 쪽으로 상당히 와 있었다. 이번에 다시 돌을 던지면 이 남자가 눈치챌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방향도 모른 채 무작정 달릴 수는 없었다. 비도는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돌멩이를 다시 힘껏 던졌다. 돌멩이는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핸드폰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들렸다.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 비도는 망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눈치채도 상관없었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돌멩이가 어디로 떨어졌는지가 대충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소리가 이 정도로 분명하게 들릴 정도면 그가 알아채고 도망간다고 해도 충분히 잡을 자신이 있었다. 망치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풀들과 잔가지가 그의 기세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전부 쳐내면서 달려나갔다. 그는 마침내 돌멩이가 떨어진 장소에 도착했다. 그는 곧장 내려칠 각오를 하며 망치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했다. 분명히 그 녀석은 여기에 있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도망가는 그 녀석의 뒷모습이라도 보여야 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 진작 눈치 채고 도망갔다면 핸드폰에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잘못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돌이 떨어진 곳은 분명 이 부근이었다. 이마 위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비도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녀석은 여전히 통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긴 시간 동안 계속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고? 이상했다. 그렇게 말 많던 녀석이… 목이 타들어갔다. 비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봐 당신.”
“이봐 당신.”
비도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 울리듯이 되돌아왔다. 그랬다. 거기는 텅텅 비어있는 게 아니었다. 비도는 잘못 찾아온 게 아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도는 우거진 풀들 위에 놓여진 핸드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도 죽이시려고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비도는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남자는 순식간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팔을 휙 뻗었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비도가 뭘 어찌할 틈도 없이 남자의 손이 그의 목에 꽂혔다. 온 몸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그를 덮쳤다.
의식이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세상이 순식간에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