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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움직여 어색하게나마 활짝 웃었다. 신문에 실릴 그의 웃는 모습이 멋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게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는 그의 자신과는 매우 개별적인 문제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완전히 웃는 행위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생글생글하게 웃는 얼굴로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아냈다. 번쩍거리는 빛들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싸인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서있는 팬들을 볼 수 있었다. 기자들이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서자 뒤로 한참이나 이어진 줄이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꿈틀거리면서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마치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전부 양 손에 ‘현실’을 든 채, ‘현실’ 500만부 돌파기념 사인회, 라고 쓰인 입간판 옆을 지나갔다. 비도는 계속해서 간간히 터져대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처음의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그는 사람들이 책을 내밀 때마다 기계적으로 표지를 열고 안에 싸인을 휘갈기고는 악수와 함께 책을 돌려주었다. 물론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건네주고, 그들의 책을 받아 싸인을 해주며,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인회 내내 그를 사로잡은 감정 중에서 괴로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그는 평생 이 짓만을 하라고 해도, 덜컥 수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의 그런 생각은 두 시간이 지나자 슬슬 무뎌지기 시작했다. 줄이 조금 줄어든다 싶으면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타나 다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치 머리가 잘려도 끊임없이 재생하는 괴물처럼 사인 받는 줄은 거의 일정한 길이를 유지했다. 저녁이 되어갈 때쯤이 되어서야 줄은 점점 길이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점심 때 쯤에 시작된 사인회는 거의 저녁이 넘어서 끝이 났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기쁨의 감정이 역력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작가님.”
“아, 네 편집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김 편집장이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비도도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김 편집장은 그보다 거의 열 살이나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경력도 상당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비도에게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물론 비즈니스 관계에선 서로가 존댓말을 쓰는 것이 당연하긴 했지만, 그의 존댓말에는 단순한 예절 이상의 것이 있었다.
‘현실’을 펴낸 이후로 비도는 그런 것을 상당히 자주 겪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예절 이상의 것’을 통해 대했다. 그리고 그런 대접을 받는 건 결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역시 작품이 좋다 보니 인기가 장난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그저 그런 글을 모두 너무 좋게만 봐주셔서 저야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물론 비도는 자기가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은 그저 그런 글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비도는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도는 그 사실을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건 진짜 그의 글이 아니었다. 그건 죄책감과는 다른 것이었다. 굳이 범주를 설정하자면, 질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러한 내색을 내비칠 수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그건 진짜 그의 글이었으니까 말이다. 비도는 문득 도서관 구석에서 바스러지고 있을 그의 책이 떠올랐다.
“그저 그렇다니요. 누적 판매량이라고 해도 500만 부가 팔리는 책은 결코 흔치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게다가 아직 ‘현실’은 두 권 밖에 나오질 않았잖습니까. 이 정도면 누적 판매량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죠. 아, 그리고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제 번역본 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해외 반응도 충분히 좋을 거 같은데, 다음엔 500 만 부가 아니라 5000 만 부 축하를 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는 껄껄거리면서 말했다. 그가 그걸 아부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비도는 그게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생각을 떠올리자 비도는 오히려 불쾌해졌다. 누군가가 그의 속을 걸레로 마구 문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질투심 같은 것도 아니었다.
질투심이라는 건 어느 정도 따라잡을 만한 가능성이 보여야만 느끼는 것이다. 5000만 부? 그 숫자를 두고서 그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오히려 자괴감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제 거의 다른 행성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멀리가 버렸다. 그에 반해 비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리에 앉아서 아부나 듣고 있었다. 물론 그가 평소에 받아보지 못한 대접을 받는 것 자체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돈을 주웠다고 해서, 맞은 뺨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작가님 그보다… 시리즈의 다음 작품도 저희 출판사에서…”
비도는 웃고 싶었다. 아니, 울고 싶었다. 자신이 저런 말을 들어본 적이나 있었던가? 그런 말은 그가 평생 글을 써오면서 바라 마지않던 말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영혼은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에 대한 대가로 교수형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으며, 아니 그것을 막았는지, 그 순간에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그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막으려고 시도하며 그는 말했다.
“뭐, 아직 나오지도 않은 걸 가지고 어떻게 얘기를 하겠습니까? 혹시 압니까? 다음 권은 형편없을 지도요.”
비도는 마치 그러기를 바란다는 듯이 말했다. 비도는 멈칫했다. 어쩌면 그는 정말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게 자신에게 가져올 결과라고는 끔찍한 것뿐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게 나한테 도대체 무슨 소용이야? 비도는 생각을 흩뜨려놓으면서 다시 김 편을 쳐다봤다. 비도 자신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한 모양이었다. 김 편은 자신의 말에 비도가 기분이 나빠졌다고 생각했는지 잔뜩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완성 되시면… 언질이라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도는 괜시리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시죠. 저도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십시오.”
비도는 굽실대는 그를 뒤로 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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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보더라도 꽤나 가격이 있어 보이는 가구들. 초점을 제대로 맞추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텔레비전. 한 쪽 벽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리벽과 그 앞을 꾸며주고 있는 작은 정원. 그리고 마치 이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샹들리에. 이 별장의 주인으로서 지내온 날들은 이미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시기를 지났지만, 등하는 아직도 이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별장 안은 유흥가 뒤편의 골목처럼 어두웠다. 별장의 화려함, 그리고 그 물건들의 화려함은 어둠에 파묻혀서 거의 무디게 보였다. 등하는 일부러 불을 키지 않았다. 샹들리에에 빛이 들어오고 그것들의 화려함이 드러나 버리면 모든 것들이 신기루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때문에 오직 핸드폰에서 쏟아져 나오는 창백한 파란빛만이 별장 안에서 반짝거리는 유일한 것이었다. 새파란 빛에 절은 채로 그녀는 액정 화면을 훑어보았다. 손가락을 까딱여 화면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입에는 미소가 번졌다.
모두가 다 그녀의 작품을 칭찬하고 있었다. 아니, 칭찬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들은 그녀의 작품을 찬양하고 있었다. 21세기의 셰익스피어가 나타났다느니, 영화관객수를 넘은 판매부수라느니, 오랜만의 한국 문학계의 쾌거라느니, 전부 낯간지럽고 유치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결코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온갖 미사여구들을 훑어보던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인터뷰 방송 시간을 놓쳤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팽개치고는 텔레비전을 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빛이 들어오자마자 화면에 비도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리포터와 마주 앉은 채로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처음 카메라에 얼굴을 비출 때에는 일부러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몇 번씩이나 카메라에 얼굴을 비추고 나자 이제 그는 상당히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태도로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특히나 그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 다운을 받아서라도 챙겨봤다. 그건 단순히 그녀가 그와 연인 사이로 발전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언급하는 것은 그녀의 책이었고, 인터뷰어가 묻거나 칭찬하는 것 역시 그녀의 책이었다. 그는 그녀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보는 것은 그녀의 인터뷰이기도 했다.
카메라는 비도와 리포터를 투샷으로 비추었다. 리포터 역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게 직업이고 일상이 되어서인지 그녀의 미소는 그게 영업용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웃으면서 비도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이미 간단한 소개 같은 건 끝난 뒤인 듯 했다.
“작가님 ’현실’이 이렇게 성공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을 하셨나요?”
리포터의 질문에 비도는 짐짓 겸손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혀 예상 못했죠.”
비도가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등하는 코웃음을 쳤다. 예상을 못했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그녀에게 먼저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겠다고 말한 것은 비도였다. 작품이 성공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런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등하는 손톱을 깨물었다. 뭐, 하지만 겸손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거니까… 나라도 비슷하게 말했겠지.
“이번 작품을 내시기 전에 잠깐 슬럼프를 겪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그걸 극복하고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내셨나요?”
“공백기간이 좀 있긴 했었습니다만, 그 동안에도 계속 ‘현실’을 준비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슬럼프는 아닌 셈이죠. 그 기간이 제가 ‘현실’을 만들도록 도와줬으니까요.”
비도는 자신이 ‘현실’을 썼다는 가정 하에, 거의 자신의 인생을 새로 써놨다. 누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그것이 마치 진짜인 양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었다. 확실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으면, 그게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겠군. 등하는 중얼거렸다. 리포터는 대본이 적힌 카드를 슬쩍 봤다.
“전문가분들의 의견에 따르면 ‘현실’이 기존 이 작가님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높은 차원의 경지에 이르렀다는데요. 이런 변화에 어떤 노하우 같은 게 있으신가요?”
리포터의 말에 비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리포터의 질문과 비도의 웃음 사이에는 아주 짧은 시간의 침묵이 있었다. 그건 정말 아주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등하는 그 침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 사이에 뒤틀려 있는 비도의 감정 역시 전부 느낄 수 있었다. 등하는 피식 웃었다. 비도의 저 부자연스러운 큰 웃음은 뱃속에서 날뛰고 있는 질투심과 굴욕감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등하는 우월감이 밀물처럼 그녀의 몸 속을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특별한 노하우가 있겠습니까? 그저 쓰고 또 썼을 뿐이지요. 그리고 얘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저는 ‘현실’이 그렇게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도 멈추지 못할 것 같은 기세로 흐르던 우월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녀의 입에 걸려있던 야릇한 미소 역시 뚝 멎었다. 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내려앉은 어둠 속에선 오직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 울렸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앉아서 계속해서 무슨 말인가를 내뱉는 비도의 입을 쳐다봤다. 등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말소리가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얼웅얼 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질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죠. 다들 아시다시피, 현실은 시리즈입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다음 권에서는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리포터의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사운드바를 통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팬 분들께 한 마디 하시죠.”
“우선, 저에게 이런 명예를 안겨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부족한 작품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더 힘써서 저 스스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비도는 그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려지는 비릿한 웃음. 그는 그녀의 노력을 깎아 내리면서 자기 자신을 더 높이고 있었다… 아니다. 그건 누구나 할 만한 그런 말이었다. 겸손을 가장해서 내뱉는 그런 상투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는…
“아얏!”
손 끝을 찌르는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등하의 손톱에서는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녀는 텔레비전을 끄고 조용히 일어나 불을 켰다.
샹들리에가 번쩍하고 빛났고, 별장의 어둠은 온데간데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