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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은 책을 덮었다. 그는 마치 이리저리 뒤엉킨 퍼즐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책을 쳐다봤다. 책에는 큼지막하게 ‘현실’이라는 두 글자가 박혀있었다. 그리고 표지의 옆에는 저자의 이름 세 글자 역시 박혀 있었다. 이현은 그것을 쓸어내리며 소리 내어 읽었다.
“이비도.”
그는 그게 마치 소원을 이뤄주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되뇌이기 시작했다.
“이비도. 이비도. 이비도….”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책을 펼쳤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퇴짜를 놓았던 이비도가 ‘현실’을 쓴 이비도와 같은 사람이라고? 몇 번씩이나 책을 다시 읽어봐도 도저히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둘 사이에는 거의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그건 단순히 더 잘 쓰고 못 쓰고나, 더 재밌고 재미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체나 서술 방식, 문장이 풍기는 분위기, 이야기의 구성 방식, 장면을 연출하는 기법. 모든 것이 달랐다. 차이점이 몇 개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비도가 몇 년 동안 어디 산 구석에 처박혀서 정진을 거듭하다가 돌아오기라도 했다면, 그러한 변화를 납득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현에게 퇴짜를 맞은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현실’을 출간했다. 출판 계약이나 사전 준비 등등을 생각해보면 거의 2~3주만에 새 작품을 뚝딱 찍어냈다는 소리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가 퇴짜 놓은 작품이 출간되지 않았기에 그 기간은 대외적으로 공백기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을 파쇄기에 넣고 갈아버린 지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이현 자신뿐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의혹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물론 한 번에 여러 작품을 준비하는 작가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같은 기간 동안 준비한 두 작품이 그렇게나 차이점이 많은 것을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만한 차이는 거의 몇 년 동안은 노력해야지 생겨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장 찝찝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이현은 다른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그걸 들었다. 이현은 뭔가 특별한 정보라도 얻기 위해 그를 불러내 술까지 사먹였지만, 그는 별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만 늘어놓을 뿐, 이현은 그 역시 별로 알고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뜨려고 하던 차에, 그는 의외의 얘기를 해줬다.
“원고를 프린트해서 보내줬는데 말이야. 야, 확실히 재밌긴 하더라.”
“잠깐 뭘 했다고?”
“어? 확실히 재밌었다고.”
“아니, 원고를 프린트해서 보냈다고? 타이핑? 컴퓨터로 쳐서 보낸 거 말이야?”
그의 동료는 무슨 별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컴퓨터로 쓰지 뭐로 쓰냐?”
이현은 정수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뛰쳐나갔다. 물론 나중에 친구한테 욕을 한 바가지로 얻어먹었지만 말이다. 비도는 원고를 컴퓨터로 타이핑해서 내는 법이 없었다. 그는 항상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써서 보냈다. 비슷한 시간에 함께 작업한 작품인데, 하나는 원고지로 쓰고 하나는 컴퓨터로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파쇄했던, 비도가 글을 썼던 원고지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확신했다.
‘현실'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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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주장에 그의 부하는 코웃음을 쳤다. 이현은 발끈해서는 책으로 그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어딜 선배가 말하는데 코웃음을 쳐?”
“아니, 말이 그렇잖아요. 이비도 작가가 무슨 자수성가 청년사업가도 아니고 무슨 대필작가를 써요?”
부하의 말에 이현은 잔뜩 흥분해서는 비도가 신인상을 받았던 책과 ‘현실’을 책상에 올려놓고 조목조목 비교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이렇게 다르고, 저기가 저렇게 다르고… 그는 열에 들떠서 설명해나갔지만 부하는 시큰둥한 얼굴로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선배,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요. 원래 시간이 지나면 문체나 뭐 그런 건 발전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야. 뭘 듣고 있었냐. 나한테 작품 하날 퇴짜 맞고 한 달도 안돼서 ‘현실’이 나왔다니깐?”
“하지만 그건 이미 파쇄해버렸다면서요. 그래선 증거로 쓸 수도 없잖아요. 게다가 퇴짜 놓은 작품이면 끝까지 읽지도 않았을 텐데, 겨우 한 번 읽은 걸, 그것도 끝까지 읽지도 않은 걸 기억에만 의존해서 비교해 놓고는 정말 둘이 완전히 다르다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요?”
이현은 움찔했다. 사실 부하의 말은 그렇게 틀린 것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맞다. 기억은 불확실하다. 단지 하루만 지나도 기억은 흐릿하게 번진다. 별로 관심도 없이 읽었던, 한 달 전에 읽었던 소설. 그런 것에 대한 기억이 확실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글을 읽을 때의 느낌, 그것만은 비록 두루뭉술하더라도 확실하게 남아있었다. 이현의 글은 ‘현실’과는 달랐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이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얌마. 내가 경력이 몇 년인데, 그만한 눈썰미도 없을 것 같애?”
이현이 생각보다 진지하게 물고 늘어지자, 부하는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그도 이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백 번 양보해서 대필 작가가 있다고 쳐요. 그럼 그 대필 작가는 왜 이비도 작가 대신에 글을 써주는데요? 그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직접 책을 냈으면 그가 벌어들이는 무지막지한 인세나 작가로서의 명성 같은 게 전부 자기 차지였을 텐데, 뭐 때문에 대신 글을 써주겠어요?”
이현은 부하의 지적에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현 자신도 그 의문을 떠올렸지만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사실 예술계에서는 유명 예술가가 무명 예술가의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내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다.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벅찬 무명 예술가는 유명 예술가에게 작품을 제공하고 돈을 받고, 유명 예술가는 자신의 인지도를 이용해 무명 예술가의 작품을 팔아먹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순히 작품의 힘 만으로는 결코 성공하기 힘든 그러한 환경에서만 일어난다. 비도는 애초에 인지도가 있는 작가도 아니었을 뿐더러, ‘현실’은 어느 무명작가가 내더라도 성공할 만한 작품이었다. 그는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큰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그 이유를 찾아보자 이거 아니냐. 혹시 아냐? 약점이라도 잡혀서 대신 써주고 있는 지도 모르지.”
부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현은 책 모서리로 정수리를 내리찍을까 고민을 하다가, 부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며 이를 악 물었다. 그렇지만 부하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는 마치 이현을 다그치는 듯한 말투로 따졌다.
“어제 사장님이 막 다그친 거 뻔히 들었으면서 그래요? ‘현실’ 다음 권이 나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무조건 따오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쳐댔잖아요. 지금부터 미리 밑밥을 깔아둬도 모자를 판에 그 사람 신경을 건드려서 어쩌자는 거에요?”
“야. 막말로 진짜 대필했다는 증거를 찾아내면, 그걸로 협박을 해서 우리 출판사에다가 책을 내게 할 수도 있잖냐.”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세요.”
이현이 되는 대로 지껄이자, 부하는 거의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 됐어. 나 혼자서라도 알아낼 테니까.”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방을 나왔다. 꼭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을 밝히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그는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