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화분에서 나는 향기가 코를 찔렀다. 내 속으로 들어온 향기는 잠자던 세포들을 간질였고 나는 튀어나오는 웃음과 함께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천사들의 과장된 몸짓이 보였다. 천사들은 서로 껴안은 상태로 펄쩍 뛰다가 내 볼과 자기들의 볼을 꼬집었다. 우리들은 모두 아팠다. 동준천사가 내 몸을 일으켰고 우성천사가 달콤한 물을 입속에 넣어주었다. 나는 그 물을 다 먹고 기지개를 켰다. 몸이 가벼웠고 마음은 편안했다. 나는 날아갈듯 일어난 다음 화분에 코를 묻고 한 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모여 있는 천사들 중 두호천사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위치를 물었고 천사들의 손은 방을 가리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불을 얼굴까지 덮은 사람이 누워있었다. 나는 이불을 걷어 두호천사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피가 솟구치던 그의 몸을 살폈다. 몸은 없어진 부위 없이 온전했다. 내가 붕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한 후 다시 이불을 씌우려하자 그의 손이 이불을 잡았다.
"조한은 잘 있지?”
"빛 가운데서 환하게 웃고 있던데."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
"상처는 어때? 많이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파."
"빨리 일어나서 빛을 발하자!"
"안정천사, 조한이 했던 말 기억하지. 우성천사와 우리 셋 중에 한 명이 리더가 되라는 말."
"기억해."
"나와 우성천사는 안정천사가 리더가 되기를 바라고 있어."
"누가 리더가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내가 할게."
대화를 엿듣던 우성천사가 우리 옆으로 와 손을 잡았다. 우리는 서로의 눈이 하는 말에 표정으로 대답했고 박자를 맞춰 웃었다. 나는 천사들의 손이 너무 따뜻해 놓기 싫었지만 거실로 나가자는 그들의 제안에 손을 놓고 일어섰다. 다른 천사들은 방에서 한 대화를 다 들은 듯 내게 박수를 보냈다. 나는 손을 들어 그 박수를 그만두게 했다.
음식이 놓인 식탁으로 자리를 옮긴 천사들은 나를 조한이 앉던 자리에 앉히고 손을 모았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그들이 나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 속에선 지난 시간들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하나가 실종됐을 때부터 천국에 다녀온 오늘까지의 일들이 한 눈에 펼쳐졌는데 그중엔 잊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잊고 싶은 사람들은 판사와 박사, 마두, 단이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하나, 조한, 동민이었다.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은 대호병원에서 조한에게 카드키를 건네준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고 싶은 마음과 악마들 틈에 있었던 여자가 왜 조한을 도와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같이 들었다. 내 마음은 그 날 조한의 표정과 그 여자의 표정을 기억나게 했는데 둘의 표정은 미리 약속한 행동을 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여자가 악마를 위장한 천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천사가 있었다면 조한은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그 여자의 존재를 천사들이 알 수 있도록 나에게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가 악마를 위장한 천사라는 생각을 버렸다. 나는 호흡을 길게 내뱉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천사들이 자신을 사랑하듯 인류를 사랑하게 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보단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게 하시고,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보단 영원한 기쁨을 위한 삶을 살게 하시고, 교묘한 악의 늪에 절대로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 악과 맞서 싸워 승리하게 하소서! 천사를 하다가 만날 수 있는 고난과 역경과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진리의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과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사랑을 주소서!"
"대호병원은 문을 닫았어요. 악마들은 이제 그곳에 없고 집으로 돌아간 환자들은 내일부터 찾아가 볼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안정천사."
"오늘이 며칠 째죠?"
"조한이 죽은 지 칠일 째에요."
"힘들지 않겠어요?”
"어제까지는 힘들었지만 이젠 괜찮아요."
"그럼, 내일부터 그 환자들을 찾아가 상처 난 몸을 소독해 주고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해주죠."
우리들은 밥 알 하나도, 반찬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 먹은 후 음식으로 모자란 비타민과 무기질을 약으로 보충했다. 우성천사는 조한이 쓰던 방을 정리해 내 방을 꾸며주겠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나도 그를 따라 올라가 조한의 짐을 정리했다. 그의 짐은 간단했고 버릴 것이 없어서 맘먹고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입던 옷들은 내가 입으면 되니 치울 필요가 없고 그의 책도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치우지 않기로 했다. 천사들과 조한이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는 위치를 조금 바꿨는데 그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조한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우성천사는 1층에 있는 내 짐을 가지러 나갔고 나는 방에 남아 청소를 시작했다. 빗자루로 먼지를 모은 후 파란색 걸레로 방과 창틀, 책상을 닦다가 서랍 속에 들어있는 조한의 일기장을 우연히 봤다. 그것은 두꺼운 무선 노트였는데 표지에 '일기장'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면 막 쓰는 연습장으로 오해할 뻔 했다. 나는 주인 없는 일기장을 몰래 읽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늘에 있는 조한이 화낼 리 없기 때문에 그것을 펼쳤다. 날짜를 확인하며 띄엄띄엄 일기를 읽다가 하나가 실종된 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곧 시선이 흔들렸다. 왜냐하면 그 날 조한이 하나를 만난 것을 기록한 내용을 봤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 조한이 하나의 실종과 관련된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나는 의심을 마음 한편에 둔 채 일기를 계속 읽었고 그 날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조립됐다.
조한은 하나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하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는 악의 근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하나는 그 악의 근원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조한은 하나의 결심을 말렸지만 그녀는 완고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읽자 마음이 아팠다. 여태껏 하나가 실종된 줄만 알았는데 실종이 아니라 스스로 사라진 것이라니….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눈물은 일기장위에 떨어졌고 곧 두 글자를 지웠다. 글자가 지워지기 전에 확인한 것은 내 이름이었다. 내 이름 뒤에 써진 낱말들은 하나가 나를 걱정했다는 것과 쉽게 떠나지 못할 정도로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마음을 때렸다. 하나가 어디 있는지도 알아내지 못한 어리석은 내가 싫었고, 하나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나는 일기장을 손에 꽉 쥔 채 엎드린 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눈물은 그치지 않고 흘러 바닥을 적셨고 나는 일기장이 물에 젖지 않도록 높이 든 다음, 하나가 실종된 다음 날로 넘겼다. 조한은 하나를 말렸지만 하나는 조한의 눈을 피해 도망갔다. 그래서 조한은 하나의 행방을 알기 위해 이대청 판사의 집으로 갔다. 조한도 판사가 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판사를 만나 하나를 못 봤냐고 물었고 판사는 아무 대답 없이 부하들을 불러 조한을 때렸다. 나는 그날 '천후'에서 잠들어 있을 때 조한이 피를 흘리며 집으로 들어온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렇다면 하나는 지금 어디 있을까? 판사의 집에서 봤던 6명의 여자는 하나가 아니었으니 판사의 집에 있을 리는 없다. 혹시, 판사가 하나의 정체를 알고 죽인 걸까? 만약 하나가 죽었다면 천국에 갔을 때 봤을 텐데….
하나는 분명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악의 근원을 약화시킨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다른 악을 찾아 그 속으로 또 혼자 들어간 것일까? 그 위험한 곳을? 하나는 다른 천사들도 많은데 왜 자기가 그 일을 하려는 것일까?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계단을 오른 나와 동준천사, 우성천사는 대호병원에 감금됐다가 구출된 사람의 집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얼굴을 내놓은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그는 우리들의 신분을 묻지 않고 집으로 들어오게 했다. 나는 그가 안내하는 방석에 무릎을 대고 기도한 후 그의 손을 잡았다. 나는 그의 아픔과 상처를 느꼈다. 그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컸다. 동준천사는 우리들이 사온 딸기와 사과를 접시에 담아왔다. 그는 딸기를 입에 넣은 후 볼 때는 몰랐는데 먹어보니 무엇인지 알겠다며 흐뭇해했다. 그가 병원에 감금됐던 지는 5년이 넘는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을 수 있었고, 하루에 세 마디 이상 말하면 잠이 오는 주사를 맞아야 했고, 같이 입원한 사람들과 하루라도 싸우지 않으면 전기충격을 당하거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수술은 멀쩡한 장기와 뼈, 관절, 근육을 망가뜨리고 뇌와 척수를 손상시키는 수술이었다. 그가 옷을 얼굴까지 걷어 올리자 배와 폐, 심장을 덮고 있는 피부에 온통 수술 자국이 있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준비한 위로와 사랑을 주기 위해 말을 꺼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요. 당신을 통해 세상은 더 밝아졌고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하늘에 가득 퍼져 있어요. 당신이 울었던 시간을 당신이 웃을 시간에 비교하려면 큰 바다와 작은 물방울 하나가 필요해요. 당신은 당신을 만드신 분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 사랑은 영원하며 빈틈이 없어요. 우리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당신의 이름을 우리가 알고 있고, 그 이름을 잊지 않을 거예요.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의 친구예요. 외롭고 힘든 일이 있을 땐 언제라도 연락하세요. 우리가 다시 올게요. 그리고 저… 혹시 천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똑같이 말하는 군요."
"네? 누구랑 똑같이 말한다는 거죠?"
"병원에 있었던 간호사 중에 당신과 똑같이 말해 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요? 혹시… 그 간호사의 이름이 뭐였죠?”
"하나. 성은 잘 모르겠고 이름이 하나였어요."
"그럼, 지금 그 간호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요?”
"방금 여기서 나갔어요."
"뭐라고요?"
"여러분이 오기 전에 상처를 소독해 주고 갔어요. 빨리 나가면 만날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곧 육체가 달릴 수 있는 한계를 넘기 위해 발과 다리를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계단은 한꺼번에 10개씩 내려갔고 뛰어가는 방향에 서있는 사람들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아파트 입구를 지나 도로 앞 횡단보도에서 몸을 멈춘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며 하나의 얼굴을 찾았다. 내 앞에 있는 사람 중엔 하나가 없었다. 내 왼쪽에 있는 사람 중에도 하나는 없었다. 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중엔 하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없었다. 내 뒤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는 없었다. 나는 내 앞을 지나가는 버스 안을 쳐다봤다. 그 속에도 하나는 없었다. 하지만 낯익은 얼굴이 있었는데 그 얼굴은 대호병원에서 조한에게 카드키를 건네 준 여자의 얼굴이었다. 혹시 그 사람이 말했던 하나가 이 여자일까? 그렇다면 하나와 이름이 같은 간호사? 나는 서서히 빨라지는 버스를 쫓아갔다.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뛰어가다 나무와 세게 부딪힌 나는 갈수록 빨라지는 버스를 잡기 위해 몸을 일으켜 다시 뛰었다. 다음 정거장까지 버스를 쫓아간 나는 손님이 내리고 닫히는 버스의 뒷문을 세게 두드렸다. 다시 열리는 문으로 들어간 나는 그녀의 주변에 몸을 세웠다. 우리 둘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은근슬쩍 그녀의 눈을 피했고 그녀도 그렇게 했다. 그녀는 병원에서 조한에게 카드키를 건네준 여자가 맞았다. 머리 모양이 약간 달랐지만 눈, 코, 입의 생김새와 어깨넓이, 목과 쇄골의 형태가 분명히 그 여자였다. 버스는 내가 탄 정거장부터 손님들이 많이 타서 사람들로 가득 찼고 곧, 그녀와 나 사이가 손님들로 막혀버렸다. 나는 손잡이도 잡을 수 없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몸을 의지한 채 서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버스가 급브레이크를 잡으면 나는 누군가의 발을 밟아야 했고 내 발도 누군가의 발에 밟혀야 했다. 사람들은 짜증을 내며 누가 자기의 발을 밟았는지 따졌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버스가 또 다른 정류장에 멈췄고 이번엔 타는 사람보다 내리는 사람이 많았다. 내리는 사람들 속에 그녀가 보였다. 나는 사람들 틈에서 가까스로 몸을 빼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앞에 있는 다른 버스로 갈아탔고 나도 그녀가 탄 버스에 몸을 올렸다. 그녀와 나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나란히 서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내가 기억하는 그 여자의 얼굴이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말을 붙일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내가 말을 붙이려고 하는 이유는 조한에게 카드키를 넘겨준 것이 의도된 것인지를 알고 싶었고, 그 의도가 천사들을 도우려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버스는 빠르게 가지 않았다. 사람들도 많지 않아 조용했고 태양도 서서히 지는 시간이라 조명을 켜지 않은 버스 안은 아늑했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일부러 잠을 자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순식간에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꿈도 꿨다. 나는 꿈속에서 달콤한 솜사탕을 먹고 있었다. 그 솜사탕은 계속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고 먹을수록 맛이 짙어졌다. 나는 꿈에서 깨는 것이 싫었다. 현실은 꿈만큼 달콤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달콤한 것도 많이 먹으면 속을 쓰리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잠에서 완전히 깬 후, 주변을 살폈다. 서서히 정류장을 떠나는 버스의 창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기사에게 부탁해 버스를 세워 내린 후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의 걸음은 내가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멀리서도 그녀가 들어가는 집을 봤으니 나는 더 빨리 걷지 않고 그 집 앞 까지 갔다.
나는 담을 넘어 집안을 보기 위해 발뒤꿈치를 들었다. 집은 여기저기 오래된 흔적이 있었고 한쪽 기둥이 갈라져 있어서 곧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집안을 움직이는 그녀의 그림자와 다른 하나의 그림자를 봤다. 그 그림자는 그녀의 그림자 보다 길고 넓었다. 잠시 후, 그 그림자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몸을 옮겨서 옆 골목에 숨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그림자의 주인은 머리가 긴 남자였다. 그 남자의 나이는 굉장히 많아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의 아버지가 될 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와 그녀와의 관계를 알아맞히기가 어려웠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침을 모아 멀리 뱉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주변의 어두움 속에서 빨간색으로 보였다. 나는 그 눈빛이 낯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눈빛이었고 내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나는 몸을 앞으로 가져간 후 눈을 비벼 그 눈빛이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알려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긴 머리를 쓸어 올리자 나는 그가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빛의 주인은 이대청 판사였다. 체격이나 행세가 예전의 판사와 많이 달랐지만 독이 가득한 눈빛은 그대로였고 건들거리는 폼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배를 앞으로 내민 자세는 그가 판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해주었다. 나는 판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조한이 비참하게 죽던 날이 생각났고 판사가 했던 조롱과 협박, 폭력이 다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기증이 나서 벽에 등을 기댄 나는 고개를 위로하고 하늘의 달을 쳐다봤다. 달을 보다가 별을 보며 조한이 판사를 살려둔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또 천사들이 왜 악마를 한 명도 죽이지 않았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곧, 선을 위해 악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찼다. 나는 한 숨을 내쉬는 것으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판사는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끈 후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집을 지나쳐 언덕을 내려가려 했다.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고 몸의 중심을 앞으로 이동했을 때 집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에 전신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조한에게 카드키를 건넨 여자가 있는 집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나다니….
내 영혼은 진실을 알아차렸다. 그 간호사가 바로 하나다. 하나의 얼굴은 바뀌었지만 하나의 목소리는 바뀌지 않아서 그녀가 하나인 것을 알게 했다. 나는 몸을 돌려 그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를 악의 근원에서 빼내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반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내가 움직이려고 힘을 줄 때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목소리라도 한 번 더 듣고 싶었지만 내 몸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관절이 거칠게 부딪혀서 하나의 반대편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그래도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돌려 하나에게 가려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쪽으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내 등을 하나와 멀리 떨어뜨려 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나를 뒤에 둔 채, 하나를 악의 근원에 남겨 둔 채, 하나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그냥 버려 둔 채, 그곳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걸음을 계속하며 나중에 천국에서 하나를 만나면 할 말들을 생각했다. 그러자 입 끝이 귀에 걸렸고 걸음에 빠른 박자가 생겼다. 숨을 내쉴 때 나는 소리가 흥겨운 휘파람 소리 같아졌고 코끝이 찡해졌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히니 하늘이 보였다. 해가 없는 검은 하늘 속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하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을 따라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은 이별 속에서 완성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