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고 나는 대답과 동시에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해가 없는 시커먼 하늘이 보였고 버스를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불쌍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종점의 위치를 물었고 아주머니는 내가 모르는 지명을 얘기했다. 나는 지명이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서울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짐작했다.
버스는 끊겼다. 나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기로 했다. 첫 번째는 내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첫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천사들에게 전화해서 나를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마땅한 선택이 아니었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 있는 장소가 눈에 띄지 않았고 천사들에게 전화해 정거장을 놓친 실수를 말하는 것이 창피했다. 넉넉한 용돈이 있어서 주위의 숙박시설에 들어갈 형편도 못됐으니 난감했다. 나는 일단 거리로 나가 걸었다. 걸어서 서울까지 가려는 마음을 먹으면 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걸으면서 먹는 밤공기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아침에 먹는 공기는 상쾌한 맛과 달콤한 맛이 나지만 밤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달을 봤다. 달은 자신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고 구름에 가려 흐리게 보였다. 나는 달 속에 있을지도 모를 하나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무릎을 구부렸다 펴면서 몸을 위로 올렸다. 달과 더 가까이 가면 하나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프를 해도 가까워지지 않는 달 때문에 나는 담으로 올라갔다. 발끝을 올리고 손끝을 펴서 달을 만지려 했지만 더 두꺼워진 구름은 달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나는 화가 나서 구름에게 소리쳤고 구름은 곧 비를 뿌렸다. 비는 내가 서있는 곳에만 내렸다. 손을 뻗어 내 몸이 없는 곳을 만지면 그곳엔 비가 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비를 피하려 지붕이 있는 다른 곳으로 뛰었다. 그러나 비는 나보다 더 빨리 뛰어 미리 그곳에 가 있었고 지붕을 빗겨서 내 머리위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수압이 높은 샤워기 바로 밑에 서있는 것처럼 몸의 모든 부분이 홀딱 젖어버렸다. 나는 따뜻한 커피와 뜨거운 난로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나가 수건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하나의 걱정스런 말투에 짜증난 내 맘은 부드러워 질 것이다. 하나가 가져다주는 옷으로 갈아입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우면 스르륵 잠이 올 것이다. 나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 상상을 상상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눈을 뜨고 손으로 비를 막아봤지만 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때렸다. 한꺼번에 여러 방울이 몸을 때리니 기분이 나빴다. 나는 몸을 쪼그리고 하나의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하나가 내 목소리를 들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내 귀에 '하나'라는 이름이 담겨지는 것으로 만족했다.
갑자기 브레이크가 바퀴를 세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빨간색 스포츠카가 인도 곁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잠시 후,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운전석에 앉은 선글라스 낀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멀리서 봐도 잘생긴 것을 알 수 있었고 앉아있었지만 키가 커 보였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들은 굵기가 남달랐고 등과 허리는 좌석의 크기와 거의 비슷했다.
"안정 씨, 타세요."
내 이름을 알고 있는 남자를 내가 모를 리 없는데… 도대체 누구지? 나는 또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생겼다. 하지만 비가 더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의문을 뒤로 하고 차에 탈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안정 씨가 이렇게 비를 맞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데 천사들은 뭐하는 거야?”
"저를 어떻게 아시죠? 그리고 천사들은 또 어떻게…"
"어떻게 알긴요. 저도 천사니까 다 아는 거죠."
"천사라고요?”
"네, 저는 대천사에 소속된 천사이고요. 이름은 단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대천사?”
"안정 씨가 천사가 되신 지 얼마 안 되셔서 천사들의 세계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우리 대천사는 그냥 천사가 아니라 앞에 큰 대 자가 붙은 대단한 천사들입니다. 천사의 후예들하곤 비교도 할 수 없죠. 이름부터 다르잖아요. 없어서 하는 말이지만 천사의 후예들이 뭡니까, 후예들이.”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
"괜찮긴요. 그냥 천사면 천사지 뒤에 후예들이 왜 붙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천사들이 아니라 그냥 조한, 두호, 우성, 동준, 하영, 도석, 학선, 동민이라고요."
"천사들의 이름을 어떻게 다 알죠?”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도 얼마 전까지 천사의 후예들이었어요."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이 친구가 속고만 살았나.”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다면."
"어쨌든 제가 천사의 후예들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단의 운전은 거칠었다. 빗길이라 자동차의 제동능력이 떨어져 위험했는데 그는 그런 것에 상관없이 과속과 급정거, 예측출발, 끼어들기를 자주 했다. 마치 악마들이 운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울로 올라가면서 질문과 대답을 반복했다. 대천사의 하는 일과 천사의 후예들이 하는 일은 비슷하지만 일을 하는 방법은 많이 다르다고 단이 말했다. 대천사의 일처리는 어떤 일이든 한 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되어 있고 범죄 한 사람들을 절대로 봐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천사의 후예들이 맡은 사람들은 변화된 후 또 죄를 지을 수 있지만 대천사가 맡은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대천사가 천사들에게 주는 혜택과 복리후생은 대단했다. 단이 타고 있는 차도 대천사에서 준 것이고 결혼 할 때 아파트 구입 자금을 지원해 준다고 했다. 그리고 월급을 한 달에 한 번 주는 것이 아니라 일 년 치를 한 번에 다 주고 매월 우수 천사를 뽑아서 두둑한 보너스와 해외여행티켓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천사 활동에 관한 모든 비용을 넉넉히 쓸 수 있도록 한도가 없는 카드도 준댔다. 나는 귀가 솔깃한 내용이 많아 단의 입 쪽으로 몸을 기울여 감탄사를 자주 내 뱉었다. 대화의 중간에 우리는 서로의 나이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됐고 말을 놓기로 했다.
"안정아, 너도 대천사로 오는 것이 어때?”
"거기서도 40일간의 훈련을 받아야 하니?”
"아니, 우리는 훈련이 없어. 천사의 후예들에서 하는 40일간의 훈련은 정말 위험하고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잖아. 안 그랬니?"
"어, 정말 힘들었지. 그럼 너도 그 훈련을 받았겠네?"
"난… 그때 몸을 좀 다쳐서 안 받았어."
천사의 후예들로 가는 길은 골목길이 많았다. 단은 좁은 길에 짜증을 냈고 주차되어 있는 차들과 여러 번 부딪혔다. 나는 목적지에 도착한 차에서 내려 단에게 고마웠다고 인사했다.
"안정아, 오늘 나를 만난 건 비밀이야. 알았지.”
"왜?”
"천사들이 알면 질투할 수도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비밀로 하자, 알았지!"
"응."
"그리고 며칠 내로 한 번 만났으면 좋겠어."
"글쎄, 시간 내기가 힘들 것 같은데…"
"하나가 어디 있는지 안 궁금한 가 본데."
단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엑셀을 밟았고 나는 빠르게 출발하는 차를 쫓아갔지만 잡을 수 없었다. 단이 어떻게 하나가 있는 곳을 알고 있지? 나는 빨리 단을 다시 만나 하나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서 안절부절 했다.
집으로 돌아와 천사들의 방을 둘러보았다. 조한은 자고 있었고 다른 천사들도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내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잠을 자고 있는 천사들보다 집까지 나를 태워다준 단이 더 좋아졌다. 단은 남자가 봐도 정말 잘 생겼고 매너도 좋았다. 돈도 많아 보였고 유식했으며 유머감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천사들은 뭔가 부족해보였고 말도 세련되게 못했으며 일처리도 확실하게 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욕조에 몸을 담갔다. 빗물에 젖어 추웠던 몸이 따뜻해졌고 긴장됐던 근육이 풀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벽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단이 하나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내가 굳이 천사의 후예들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내가 천사가 된 것은 하나를 찾기 위해서니까. 그리고 이곳에 있는 천사들보다 대천사에 있는 천사들의 근무조건이 더 좋은 것 같아 부러웠다. 단이 타는 차를 타고, 단이 입는 옷을 입고 천사의 일을 한다면 더 잘 될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난 후 단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도 없이 바로 약속을 잡았다. 단을 만나기로 한 곳은 강남역 6번 출구 앞이다. 나는 우성천사에게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던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혼자서 약속장소로 갔다. 어깨를 옆으로 돌려야 걸어갈 수 있을 만큼 복잡한 거리 속에서 나는 단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안정, 너는 이 옷 하나뿐이야
단은 내 귀에 자신의 입을 바짝 갖다 대고 인사대신 질문을 했다.
"안녕, 단."
"밥은 먹었니?”
"아니, 아직 안 먹었어."
"여태껏 밥도 안 먹이다니 정말 너무 하구만."
나는 단이 천사들을 트집 잡는 것이 거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천사들에게 섭섭하고 못마땅한 것이 있었는데 단은 그런 것에 대해서만 트집을 잡았으므로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거야?”
"하나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지."
"그게 누군데, 뭐하는 사람인데?”
"그건 아직 말해줄 수 없어. 그 사람은 보안이 필요한 사람이거든. 어쨌든 나를 잘 따라다니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조바심만 내지 않는다면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동안 천사들을 따라 다니면서 한 번도 하나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하나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단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먼저 뭣 좀 먹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의 엉덩이를 쫓아갔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맥주와 안주를 파는 곳이었다. 나는 천사가 술을 먹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었지만 단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고 담배도 피웠다. 술을 먹을 때 위아래로 움직이는 단의 목젖은 튼튼해 보였고, 담배를 빨아 당길 때 쏙 들어가는 볼은 매력이 있었다.
"너는 술 안 먹니?”
"안주 좀 먹고."
"오늘 할 일은 특별한 건 없고, 술 먹고 주정하는 녀석들 손 좀 봐주면 끝날 것 같아."
"손을 봐준다고?”
"뼈를 적당히 두들겨 준다고 생각하면 돼. 물론 천사의 후예들에선 이렇게 배우지 않았겠지만."
"폭력 말고 다른 방법을 쓰면 더 좋지 않을까?”
"그게 바로 구시대적 천사가 쓰는 방법이지. 효과가 빠르고 정확한 것이 있는데 왜 오래 걸리고 효과도 별로 없는 것을 선택하려고 하니?”
"폭력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가 없잖아. 행동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답답하다. 너! 계속 내 말에 토를 달려면 당장 꺼져! 그리고 하나를 찾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하라고."
"미안, 미안, 미안, 미안해. 화나게 해서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