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나가자 방 밖의 공기가 너무 뜨거워서 얼었던 몸이 금세 녹았다. 그리고 멀리서 시작된 불길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마약을 태우는 천사들의 계획이 성공했고 마두를 죽여야 하는 나의 계획도 성공한 것이다. 불길은 순식간에 나를 덮치려했다. 하지만 불길보다 먼저 조한이 나를 낚아챘다. 나를 등에 업은 조한은 불길을 가로 질렀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열에 의해 타버렸지만 옷과 몸은 조한의 빠른 몸놀림으로 괜찮았다.
마약이 타는 냄새는 좋지 않았다. 동물을 태우는 냄새도 아니었고, 식물을 불지를 때 나는 냄새도 아니었고, 화학실험을 할 때 발생하는 악취와도 달랐다. 그것은 꼭 오래된 쓰레기를 태울 때 나는 냄새와 비슷했다. 나는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고 유해한 가스를 마셔서 정신이 몽롱했다. 조한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힘이 없었다.
다리와 입술을 동시에 움직이며 불 사이로 달리던 조한이 쓰러졌고 등에 있던 나는 불길이 센 쪽으로 굴러 들어갔다. 반대쪽에 천사들이 보였다. 천사들은 조한을 일으켜 세운 후 도석천사의 등에 업히게 했다. 그들은 나를 도와주지 않고 쳐다만 봤다. 살인한 천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도와달라는 손짓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혼자 일어서려다 넘어졌다. 조한을 업은 천사는 계단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천사들도 한 명씩 올라갔다. 나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팔로 잡고 한 발씩 걸었다. 두 발짝을 힘겹게 갔을 때 동민이가 다가와 허리를 잡아주었다. 상체의 무게가 없어진 나는 더 빨리 걸을 수 있었다.
불길에 타들어 가던 천장이 조금씩 내려왔다. 빨리 빠져 나가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 뻔했다. 동민은 내려오는 천장을 눈으로 확인 한 후, 허리를 잡은 손을 앞쪽으로 밀어서 내가 더 빨리 걸어갈 수 있게 해줬다. 어느새 도착한 계단 앞에서 동민은 내가 먼저 올라가도록 발을 받쳐 주었고 나는 첫 번째 계단에서 발을 또 헛디뎌 넘어졌다.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운 동민은 다시 한 번 나를 계단으로 올려놓고 엉덩이를 밀어주었다.
나는 힘없는 다리를 계단에 걸쳐만 놓고 팔의 힘으로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까지 그렇게 올라간 후 아래를 쳐다봤다. 불길이 내 신발까지 올라와 있었고 동민은 보이지 않았다.
천사들은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이 동민이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당황해했다. 나는 천사들보다 더 당황했다. 내 뒤에 있어야 할 동민이가 올라오지 않다니…. 동민이가 나 때문에 죽은 걸까? 나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다 닫혀있는 문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나는 빨리 일어나 문고리를 잡아 뺐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천사들은 오열했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모여들었고 조한은 오열하는 천사들의 어깨를 만져주었다. 나는 슬그머니 몸을 뺐다. 천사들 곁에 있을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정도가 아니었다. 사과를 먹은 아담이 창조주를 피했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나는 나를 증오했다. 내가 한 행동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마두만 죽인 것이 아니라 동민까지 죽인 것이다. 악마를 죽인 것은 그렇다 치고 천사를 죽이다니…. 마음이 몸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고 다시 들어온 마음이 원래의 자리로 들어가지 않아서 몸의 여기저기가 아팠다. 뇌는 기억과 현실, 미래의 예측이 뒤죽박죽 돼서 생각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내가 만약 과거를 생각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과거는 현실에 지배돼서 왜곡될 것이고, 내가 만약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한다면 미래는 과거의 기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내가 만약 현실 속의 생각을 한다면 그 현실은 미래의 소원과 과거의 기억들이 충돌해서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지하철역을 나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오늘의 날짜와 이곳의 위치, 어제의 날씨와 내 이름 등을 물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의 미래로 걸어갔으며 나는 나의 과거만 보고 있었다. 나는 미래로 걸어가는 그들처럼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동민이가 죽은 현실, 내가 마두를 죽인 현실, 하나가 실종된 현실, 그 외의 모든 것들도 다 삐뚤어지고 맘에 안 드는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근처의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 목에 부었다. 그런데 소주의 쓴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취하지도 않았다. 더 먹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길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 당신의 미래를 나의 것과 바꾸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말없이 내게 주먹질을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판사의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리고 내릴 때 택시비가 없어서 기사를 때렸다. 기사는 내게 택시비를 받으려 했던 것을 사과한 후 골목을 빠져 나갔다.
담을 넘는 것은 쉬웠다. 벽돌 사이사이에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을 밟으면 몸을 위로 옮길 수 있었다. 담을 넘어 잔디에 내려앉은 나를 보고 개가 짖었다. 나는 개에게 신경 쓸 겨를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판사는 집에 없었다. 1층과 2층에 있는 모든 방과 화장실을 뒤졌지만 나오는 건 최혜한 박사와 젊은 남자뿐이었다.
젊은 남자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고 박사는 내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으로 턱을 받히다가, 일어서서 팔짱을 끼고 원을 그리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안정 군. 아니,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박스도 안 들고….”
"판사님 어디 있어요?”
"그건 나도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인데."
"전화 해보시면 아실 수 있잖아요."
"집에서 온 전화를 받는 남자는 바보라고 생각하시는 양반인데 통화가 되겠어요.”
"하나 아시죠? 혹시 하나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하나? 그게 누구죠?”
"제 여자 친구요. 같이 인사하러 왔었잖아요. 그래서 박사님이 예뻐해 주시고 따로 만나신 적도 있잖아요."
"제가요? 제가 젊은 여자를 뭐 하러 만납니까? 젊은 남자들 만날 시간도 없는데."
박사는 악마일까? 말투와 행동을 보면 천사는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왜 하나를 기억하지 못하지?
박사는 내게 다가와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나는 그 손을 빼내어 꺾었다. 박사는 비명을 지른 후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곧 들이닥친 개와 남자들은 나를 물어뜯고 때렸다. 개는 하체 위주로 물어뜯었고 남자들은 얼굴 위주로 때렸다. 한참 후 개들이 지쳐 나가 떨어졌고 남자들은 박사의 명령을 듣고 때리는 것을 멈췄다. 개와 남자들이 나가고 박사가 내 곁으로 걸어왔다. 처박힌 내 얼굴을 들어올리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내 턱을 받힌 박사가 무슨 말을 할지 무척 궁금했다.
"난 젊은 남자들이 좋지만 착한 남자들은 싫어. 질색이지. 너같이 나쁜 놈들이 좋아. 뭘 좀 아는 녀석들 말이야. 아프니? 피가 많이 나네. 닦아 줄까? 아니면 뭘 좀 먹을래? 판사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릴 거니? 판사님이 너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지 무척 궁금하다."
"당신은 악마입니까?"
"이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을 하다니. 개를 몇 마리 더 불러야 되겠어?”
"판사는 악마야. 알고 있지.”
"그럼… 하나는 뭐니?”
"하나는 천사야!"
"누가 그래, 하나가 천사라고."
"당신은 좀 전에 하나를 모른다고 하더니 하나가 천사라는 말에 왜 화를 내는 거지."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분류하는 미련한 놈 같으니라고. 너의 논리는 이 시대에 맞지 않아. 이 시대는 모든 것이 옳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야! 알긴 알아! 악도 옳고, 악도 좋고, 악도 할 만하고, 악도 아름답고, 악도 이기는 시대라고! 알긴 알아!"
"하나 어디 있어?"
"그 이름부터가 맘에 안 드는 계집애가 어디 있는지 내가 도대체 어떻게 알겠어? 이름이 하나가 뭐야? 하나가! 뭐가 하나라는 거야!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맞는 시대에 오직 하나란 이름이 도대체 뭐냐고! 시대착오적 이름이야. 역겨워!"
나는 바닥에서 일어서기 위해 애를 썼지만 개가 다리근육을 거의 다 물어뜯었기 때문에 일어설 수 없었다. 한 참 동안 그렇게 있어도 판사는 오지 않았고 박사는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동민을 생각했다. 이젠 과거가 돼버린 일이지만 현실 속의 생각을 지배했다. 죄책감이 만든 슬픔에 눈물이 났다. 동민에게 미안한 것일까? 나에게 부끄러운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하나를 위한 것일까? 흐르는 눈물은 아무 대답이 없었고 나는 계속되는 질문 때문에 지쳐 잠이 들었다.
차가운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기온이 뚝 떨어진 새벽이다. 나는 덮을 것이 주위에 없었으므로 몸을 웅크려 추위를 달랬다. 다시 잠이 들려할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판사가 술에 취해 들어왔고 나는 몸을 돌려 판사의 눈에 띄게 팔을 크게 흔들었다.
"왜 혼자만 왔나? 일이 잘 안됐어?”
"아니요. 잘 됐어요. 마두가 죽었어요. 제가 죽였어요."
"단은?"
"단도 죽었어요. 단은 제가 안 죽였어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여기 마두의 손톱이 있어요. DNA검사 해보세요."
"손가락 하나 자른 것 가지고 죽음을 대신하려는 수작이군."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마두를 제가 죽였다고요!"
"난 너의 말을 믿지 않아. 네가 나한테 한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데."
"제발… 믿어 주세요. 이건 진짜에요. 제가 마두를 죽인 것은 진짜에요."
"그럼 그렇게 한 번 믿어주지. 그만 가봐!"
"하나는요? 하나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셔야죠."
"또 그 여자 이야기군. 자넨 여자가 하나 밖에 없나?"
"저에겐 하나 밖에 없어요. 저에겐 하나 밖에 없으니까 하나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빨리 나가!"
내가 걸을 수 있었다면 판사와 박사를 죽였을 것이다. 무슨 도구를 사용했을지는 모르지만 맨 주먹이라도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집에서 기어 나오는 것도 힘들어 대문까지 가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고 구급차의 도움으로 간신히 병원에 갔다. 아주 고맙게, 판사와 박사가 구급차를 불러주었는데 도착한 병원에서 의사들이 했던 말을 듣고 그 고마움이 싹 가셨다.
"이런 젠장, 꼭 악마가 공격한 것 같은 다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