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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죽음
작가 : 기옹
작품등록일 : 20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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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죽음-9
작성일 : 20-09-30     조회 : 308     추천 : 0     분량 : 7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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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여자는 일주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합판으로 몇 번의 신호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분명 여자의 발걸음 소리, 변기에 물 내려가는 소리, 티브이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자는 나의 신호와 연락에 답을 주지 않았다. 결국 주점으로 직접 찾아가서야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일주일여 만에 만난 여자의 얼굴은 멍투성이었다. 나를 본 여자는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얼굴이 왜 이래?”

  나의 물음에 여자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주문이나 해요. 나 바빠요.”

  홀에 손님은 나를 포함해 세 테이블 밖에 없었다. 나는 맥주 한 병을 시켰다. 맥주를 가져다 주고 자리로 가려는 여자를 붙잡았다.

  “퇴근하고 우리 집에 들러.”

  “안 돼요. 오늘 그 사람 오는 날이에요.”

  쌀쌀맞은 여자의 태도에 당황스러웠다. 홧김에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밤, 남자와 여자가 다투는 소리에 새벽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로부터 여자를 만난 건 일주일 뒤였다. 까맣던 멍자국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옅어졌지만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잘 지냈어요?”

  여자는 치킨과 맥주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도 우리 집에 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엌에서 접시와 맥주를 꺼냈다. 나는 거실에 앉아 여자의 행동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테이블에 치킨과 맥주를 셋팅한 여자는 맥주캔을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미 술냄새가 진동하고 있던 차였다. 나 역시도 맥주캔을 따 들이켰다.

  “괜찮아?”

  어렵게 뗀 한 마디에 여자가 웃었다. 일주일 전보다는 많이 편안해진 모습이었지만 여자의 미소에는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괜찮지 않으면 어떻게 할건데요?”

  여자는 뭔가 체념한 듯 치킨 조각을 뜯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데. 술집에서 남자들 노리개로 사는 게 넌 좋니?”

  여자가 손에 쥔 치킨을 던지 듯 내려놓았다. 여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오빠가 뭘 안다고 말을 함부로 해요. 그런 오빠는 얼마나 대단하길래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해요?”

  “아니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래서 그런 거지…….”

  “누가 누굴 걱정하는데요. 오빠, 솔직히 말해봐요. 여기 죽으러 왔죠?”

  여자의 얼굴에 조소가 가득했다.

  “딱 보면 알아요. 이 동네 오는 사람은 딱 두 부류거든요. 죽으러 오거나 그런 사람을 찾으러 오는 사람이거나. 죽어버린 동네에 뭐하러 오겠어요. 딱 봐도 뻔하죠. 오빠 같은 사람들 솔직히 많이 봤어요. 뭐든 심각해 하고, 힘들어 하고……. 세상 고민 혼자 다 짊어지고 사는 것 같은 사람들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 보면 하나 같이 다 한심하더라고요. 자기가 뭐라도 된 양 진지하고, 고상하게 구는데, 솔직히 자기들도 찌질해서 이런 데 오는 거 아니겠냐고요. 안 그래요?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면 안 되고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훈수질이나 하고……. 한 번이라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은 해봤어요? 지금도 봐요. 벌써 몇 개월째 아무것도 안 하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찌질하게 죽을 궁리나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면서……. 나는 오빠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 무시할 자격은 없다고 봐요.”

  여자는 작정이라도 한 듯 거침없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여자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니가 뭘 안다고!”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늘 몸은 마음과 따로 놀았다.

  “거봐 남자들은 다 똑같아. 말로 안 되니까 결국 주먹을 쓰네. 예전에 어떤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남자는 인류애는 없고 자기애만 있어서 세상에 남자만 있다면 아마 지구가 멸망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겪어 보니까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네.”

  여자는 시종일관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여자의 말에 그 어떤 말로도 대응할 수가 없었다.

  “니가 뭘 안다고, 뭘…….”

  “어린애처럼 투정 그만 부려요. 한심해 보이니까.”

  여자는 마지막 한방을 던지고는 가버렸다. 부서질 듯 닫힌 현관문 때문에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기관총처럼 난사된 여자의 말들이 온몸 구석구석 박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낱 백치같은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모멸감이 일었다. 나는 여자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문 열어! 문 열라고!”

  505호로 올라가 현관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조용히 하라는 주민들의 고함소리가 공격해왔다. 도망치듯 5층을 내려왔다. 이런 내 자신이 초라했다. 누구라도 내게 침묵보다 말을 먼저 가르쳐 주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서울로 이사온 뒤 내게는 친구가 없었다. 말이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마을에서는 이미 ‘귀신 사는 집’ 아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와 어머니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고등학교는 마을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의 학교를 배정받아 소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태생적인 우울감은 쉽사리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일부러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했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좋았지만 그런 낌새가 감지되면 일부러 피하거나 뿌리쳤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자존심이라 여기게 되었다. 마음을 쉽게 내주지 않는 것, 그것이 자존심의 보루라 생각했다. 이상한 자존심이었다.

  친구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에 입학해 친하게 지냈던 친구 2명이 있었다. 별장이 있던 동네는 주로 서울 토박이들이 모여 살고 있던 작은 부촌이었다. 인근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마을의 규모가 커지기는 했지만 단독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끼리는 서로의 살림살이를 알고 지낼 정도로 가까웠다. 마을에 있는 2개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2개의 중학교에 나뉘어 진학하는 터라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절반은 아는 사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교생이 20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에서 내가 별장 사는 아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일부러 피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은연중 분위기에 휩쓸려 내게 다가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은수와 경훈이 내게 다가오기 전까지 내가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를 늘 생각하고 있었다.

  새학기가 보름 정도 지나가고 있던 점심시간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 내 앞으로 은수와 경훈이 앉았다. 은수는 학급의 회장이었고, 경훈은 은수의 단짝이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가 운동을 잘했던 은수는 반에서 인기가 많았다. 경호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다. 1학년 내내 반에서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친하게 지내자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들이 뭐가 아쉬워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놈과 친구를 하려 한 것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따지고 계산할 만큼 눈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낯선 환경 속에서 그저 혼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내게 그들이 내민 손은 쪽방으로 내리비친 한줄기 빛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그들과 지내다 보니 1학기가 금방 지나갔다. 학교에서 만큼은 자유로웠고, 자신감에 넘쳤다. 은수와 경훈과 함께 있으면 그 누구도 내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잠시나마 행복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은수와 경훈은 우리 집에 가고 싶어했다. 마음은 그들을 초대해 여름을 보내고 싶었지만 팍팍하고 삭막한 살림살이와 냉랭한 집안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집은 내게 치부였다. 그것이 들통나면 그들이 떠나갈 것 같았다. 나는 매번 핑계들로 그들의 방문을 거절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은수와 경훈은 아무런 연락 없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무방비 상태였다. 불쑥 찾아온 그들을 돌려보낼 수 없었다.

  부업으로 마늘을 까고 있던 어머니는 무심히 그들을 맞이했다. 커다란 고무대야 세 개에 담겨 있던 마늘 때문에 집 안에는 마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마늘에 냄새에 은수와 경훈의 코가 움찔했다. 얼떨결에 그들을 집안으로 데려왔지만 마음은 계속 조마조마했고, 자고 가겠다는 그들의 등을 억지로 떠밀 수밖에 없었다.

  개학을 하고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같이 밥을 먹고, 하교 후 학원에 들렀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 하지만 경훈이 학원을 그만두면서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과외를 하게 되었다며 학원을 그만둔 경훈을 따라 은수도 학원을 그만두었다.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은수와 경훈이 학원을 그만두었어도 우리는 학교든, 그들의 집에서든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과의 대화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함께 가던 급식실도 경훈이 공부를 핑계로 늦게 가게 되면서 나와 은수 둘이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셋이 있으면 제일 많은 말을 하는 은수였지만 나와 밥을 먹을 때면 말수가 줄었고, 오히려 다른 친구들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했다. 급기야 다른 친구를 동석시켜 밥을 먹다가 그들과 함께 먼저 자리를 뜨고는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다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혼자가 된 이유를 알게 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수랑 경훈이가 그러는데, 송인호네 엄마 귀신 씌였대. 얼굴이 하얗고, 눈에 초점이 없는데 무서워서 혼났다는 거지. 여름이었는데도 집 안이 엄청 춥고. 결정적으로 은수랑 경훈이가 그 집 나오다가 귀신을 봤다고 했잖아.’

  ‘은수 그 자식도 허풍 쩌는 거 아니야? 괜히 우리 관심 끌려고.’

  ‘2층 방 창에서 흰옷을 입은 여자애가 서 있었대.’

  ‘우리 엄마 말로는 걔네 엄마 무당이라고 하던대? 그 집 술주정뱅이가 무서워서 무당을 집에 들인거라고.’

  그들의 대화에 시간을 복기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은수와 경훈이 내게 접근한 것은 우리 집에 정말 귀신이 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을 아이들과 내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그런 오기가 발동한 것인지 나는 점심시간마다 은수와 경훈이 밥을 먹는 자리에 끼어들어 밥을 먹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고 일주일, 이주일이 지날 때까지 그들이 앉은 자리를 찾아다니며 합석을 했다. 나의 도발적 행동에 당황해하던 그들은 차츰 나를 유령 취급했다. 나의 행동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다른 학생들과 대화하는 그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커졌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마다 돌을 씹는 듯했고, 일부러 크게 웃어대는 그들의 웃음소리는 나를 향한 조롱과 비웃음으로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도 없는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나를 피해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리를 옮기면 나도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멈추지 않았고, 점심시간마다 벌어지는 진풍경에 아이들은 흥미진진하게 관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폭발한 쪽은 그들이었다.

  ‘그만하라고, 이 미친 새끼야!’

  은수는 나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고, 그걸로 일주일 정학을 맞았다.

  몹시 추웠던 열네 살 겨울이었다. 2학년이 올라간 이후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게 함부로 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질풍노도라는 말은 나에게 사치였다. 질풍노도라는 말로 나의 혼란과 두려움, 분노와 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모든 것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10대는 악과 냉소로 무장해 나간 시기였다. 그 어떤 마음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건 재은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지방 소도시에서 전학 온 재은은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아이였다. 지방에서 전학을 왔지만 공부를 잘해 늘 상위권을 유지했고, 마음씨도 얼굴만큼 예뻐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재은이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문학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조별 수행평가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언제나 그랬듯 조별 과제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수행의 주체였고, 나머지는 들러리였다. 선생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조별 과제의 의미는 없었다. 나 역시 한발 물러서려 했지만 재은은 내게 자료수집 부탁을 했다. 그때부터였다. 조별 수행이 끝난 이후 재은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혼자 있는 내게 일부러 말을 걸었고, 음료수나 빵 등을 책상에 올려놓고 가기도 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어떻게든 나를 챙기려 사진을 찍을 때나 밥을 먹을 때 아이들 사이에 나를 동석시켰다. 나의 시선을 피하는 아이들의 눈빛, 어색한 공기. 이제는 낯설지도 않은 분위기에 마지못해 응했다. 그래, 너도 어디까지 가나 보자, 라고. 재은의 눈빛은 마치 자신이 갈 곳 잃은 어린양을 보듬어 주는 선한 목자가 된 듯 자부심과 뿌듯함으로 빛났다. 그런 재은에게 물었다. ‘너, 나 좋아하냐?’ 내 말에 피식 웃기만 하던 재은은 말했다. ‘널 친구로서 좋아해. 친구로서 존중하고, 감싸주고 싶어. 다른 뜻은 없어.’ 환하게 웃는 미소에 근심 걱정 따위는 묻어 있지 않았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나는 매일 밤 재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고 일주일, 이주일이 지날 때까지 매일 재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처음 나를 본 재은은 몹시 반가워했고, 나흘째에는 핫팩을 손에 쥐어주었다. 일주일째는 핫팩과 캔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너, 나 좋아하니?’

  재은의 질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스웠다.

  ‘응, 너 좋아해. 친구로서.’

  나의 말에 재은의 표정이 굳어졌고,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주일 뒤 재은의 집 앞에 경찰차가 출동했다. 눈 내리는 밤, 나는 출동한 경찰에 연행됐다. 스토커로 고소를 당한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경찰서로 온 재은은 부모님 사이에서 떨고 있었다. 그런 재은을 보니 더 우스웠다.

  ‘좋아한다며, 친구로서. 그래서 나도 친구로서 네게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뿐이야.’

  나의 말에 재은은 손에 쥐고 있던 묵주를 빠르게 돌렸다. 구치소로 들어가는 내게 재은은 말했다.

  ‘너를 위해 계속 기도할 거야.’

  그 말이 너무 우스워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연락을 받고 온 어머니와 남자의 트럭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 집으로 가는 내내 나와 어머니를 향한 남자의 고성은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남자가 어머니에게 이혼 얘기를 꺼낸 것이. 묵묵히 남자의 고성을 받아내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어쩌면 위선이나 가식보다 어머니의 태도가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마음은 열리면 공격당하거나 이용당했다. 굳게 닫아 버리면 외면당했다. 가식과 위선, 무관심과 침묵 중 어느 것이 더 나쁜 것인지, 아니면 더 나은 것인지 저울질했다. 저울은 평행을 이루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에 따라 기울기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었다. 마음에 정의 따위는 없었다.

 

  505호 남자는 한 달 동안 집에 오지 않았다. 여자의 가벼운 발소리만이 그녀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한 시간 간격으로 몇 번씩 천장을 툭툭 쳤다. 하지만 여자는 반응이 없었다. 괜찮았다. 여자가 반응할 때까지 두드릴 수 있었다. 내 마음의 정체를 알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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