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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죽음
작가 : 기옹
작품등록일 : 20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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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죽음-11
작성일 : 20-09-30     조회 : 306     추천 : 0     분량 : 3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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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한동안 조용하던 505호가 다시 어수선해졌다. 한 달 만에 남자가 집에 왔는지 거구의 발소리가 조용하던 천장을 울렸다. 일부러 발을 구르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어는 귀마개나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위층의 소음은 귀마개를 뚫었다. 남자가 집에 온 이후 다툼은 매일 밤 이어졌다. 밤이면 연립을 울리는 남자의 고성과 여자의 비명에 연립은 숨죽인 채 방관하고 있었다. 둘 중 누군가 죽어도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처럼.

  심한 다툼은 잠자리로 이어졌다. 싸울 때처럼 남자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여자의 교성은 고통에 가까웠다. 이들의 싸움은, 나의 고통은 누군가 한 명이 죽어야 끝날 수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나는 여기를 떠나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고 여자의 말처럼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일까.

  새벽이 되어서야 층간소음이 멈췄다. 자는 둥 마는 둥 곤두서 있던 신경도 촉수를 거뒀다. 하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담배라도 피워야 잠이 올 것 같아 베란다로 나갔다. 그러다 문득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베란다 창고 막혀 있는 집들의 비밀……. 그곳에는 정말 시체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여자가 지어낸 이야기일까. 담배를 물고 오른쪽 벽으로 향했다. 여자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벽으로 알고 지나쳤을 그곳을 슬며시 쓰다듬어 보았다. 벽면이 다소 거칠었다. 거칠기는 다른 곳의 벽면과 비교했을 때 더욱 뚜렷했다. 거실로 가 베란다의 불을 켰다. 벽면의 밝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적어도 30년 전에 시공한 벽면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여자의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여자의 말과 달리 저곳은 애당초 그냥 벽이었을지도 모른다. 낡은 벽면이 싫었던 이전 거주자가 새로 시공한 것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부터였을까…….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거실로 들어갔다.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제임스가 내게 이 집을 넘겨주고 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캐나다로 무사히 돌아갔을까, 아니면 정말 죽었을까. 이 마을을 떠나기 위해서 누군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면 내가 그 제물이었을까. 제임스는 내가 죽기 바랐던 걸까, 살기를 바랐던 걸까. 연립을 돌아다니는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들이 부유했다. 급기야 이럴 바에는 나가 죽어라, 라고 되뇌고 있었다.

  잡념과 망상이 만들어낸 호기심은 급기야 연립의 빈집을 찾아나서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심하다고 되뇌었지만 점심 무렵에는 이미 4층에 올라와 있었다. 다른 층보다 4층과 5층에 문이 잠겨 있지 않은 빈집이 많았다.

  연립의 빈집을 찾아다닌 끝에 문이 잠겨 있지 않은 집은 열 곳이었다. 집 안 구조는 모두 동일했고 다만 라인에 따라 구조의 위치만 다를 뿐이었다. 살림살이가 그대로 방치된 집도 있었고, 집 안이 쓰레기로 가득한 곳도 있었다. 길고양인지, 반려견인지 모를 고양이 사체가 썩어 가고 있는 집까지 존재했던 흔적은 가지각색이었다. 열 곳 가운데 베란다 창고가 시멘트로 막혀 있는 곳이 일곱 곳이었다. 501호는 집안 곳곳이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듯 핏자국은 빛바랜 검붉은 빛을 띠었지만 살기는 선명했다. 문득 작년 여름의 살인사건이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303호로 갔다. 각종 공구가 가득했던 303호 창고에서 망치와 정을 가져왔다. 망치로 베란다 벽을 쳐대기 시작했다. 소심하게 내리친 망치에 벽은 꿈쩍하지 않았다. 있는 힘껏 벽을 내리치기 시작하자 시멘트가 조금씩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연립을 울리는 망치 소리에 겁이 나 그만두고 싶었지만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내리친 벽 가운데를 중심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 틈에 정을 대고 내리쳤다. 수십 차례 계속된 망치질 끝에 벽 가운데가 깨지고 그 사이에 회색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어진 균열들에 정을 대고 망치를 내리치니 시멘트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치열했던 망치질로 땀범벅이었지만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창 너머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이 연립을 비켜가는 듯했다. 그나마 햇살만이 마지못해 연립을 비추고 있었다. 왜 시작했을까를 따지기에 돌이킬 수 없었다. 이미 녹슨 철문이 눈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봄, 같은 반 학생이 자살을 했다. 자살한 준석은 중학교에서 유일하게 같은 고등학교로 배정된 친구였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이후 학교를 오가며 마주치는 것 말고는 교류가 없던 그 애와 같은 반이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2년 내내 집단 괴롭힘을 당했던 준석은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고등학교 3학년에 진학해서도 가해 학생 한 명과 같은 반이 되었다. 그들의 괴롭힘은 교묘해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준석이 가해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증명하거나 처벌할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존재하는 형국이었다.

  새학기가 한달이 지나가고 있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 준석이 앉았다. 나는 의아한 듯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밥을 먹었다. 준석 역시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왕따들끼리 밥 먹는다.’ 수군거림을 뚫고 준석이 입을 열었다. ‘학교 끝나고 잠깐만 보자.’ 그리고는 식판을 들고 자리를 떴다.

  학원 주변 패스트푸드점에서 준석과 마주 앉았다. 낯설고 생소한 장면이었다. 용건이 뭐냐는 나의 말에 준석이 물었다.

  ‘너처럼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강하다고? 내가? 준석의 질문에 웃음이 나왔다. 강하다니…….

  ‘중학교 때부터 널 봐왔어. 널 보면 혼자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듯 보였거든.’

  아이들이 나를 상대하지 않는 건 두 부류였다. 무서워서 피하거나 더러워서 피하거나.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뭔데?’

  퉁명스러운 나의 말에 준석은 위축된 듯했다. 그러나 단호하고, 흔들림 없는 말투에 결의가 느껴졌다.

  ‘알려줘. 너처럼 강해질 수 있는 법을.’

  준석의 질문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강한 듯 보이는 준석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사는 이유가 뭐냐고,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냐고.

  ‘맞설 자신이 없다면 그냥 일상인 듯 살아야겠지. 그럴 자신이 없다면 피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준 것인지 모르겠다. 준석의 말처럼 강해 보이려고?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나도 너와 같다는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나의 말에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곱씹던 준석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뒤로 우리는 예전처럼 모르는 사이로 돌아갔다. 그리고 봄 축제가 한창이던 4월, 준석은 학교 옥상에서 투신했다. 벚꽃이 한창이던 따스한 봄날 점심시간이었다. 모두의 행복한 순간을 교란이라도 하려는 듯 준석은 흩날리는 벚꽃과 함께 떨어졌다. 그날 이후 누군가에게 봄은 죽음으로 기억될 게 분명했다. 한 달 동안 혼수상태에 있던 준석은 결국 죽었다.

 

  나는 강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당당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궁창 속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는 동안 고3 때 준석이 떠올랐다. 그 문고리를 잡고 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한 것일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일까.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를 돌려 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있는 힘껏 당긴 뒤에야 녹슬어 뻑뻑해진 문이 열렸다. 창고 안에는 환기하지 않아 고여있다 쿰쿰하고 퀘퀘한 냄새가 쏟어져 나왔다. 맡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텁텁함에 숨을 참게 되었다.

  창고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낡은 선반 위에는 누렇게 변색된 플라스틱 반찬통 몇 개와 작은 대야들이 포개져 있었다. 구석에는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무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상자를 여니 안에는 꽃무늬로 장식된 유골함이 있었다. 유골함의 뚜껑을 여니 잿빛가루가 담겨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거실에 앉아 테이블에 올려놓은 유골함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페스트푸드점에 앉아 있던 준석이 마주 앉아 있었다.

  ‘너는 어떻게 그 문을 열었던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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