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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죽음
작가 : 기옹
작품등록일 : 20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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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죽음-12
작성일 : 20-09-30     조회 : 322     추천 : 0     분량 : 4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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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언젠가 하교 후 집에 오는 길에 마을 정자에 모여 있던 노인들이 나를 불러 세워놓고 말했다.

  ‘사람이 크고 넓은 집에 산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사람의 기운은 집의 기운을 따라가는 법이야.’

  그 말은 별장에서 나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처음의 우려와 걱정은 마을이 재개발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나가라는 의미로 바뀌기 시작했다. 남자가 죽은 그해, 시에서 재개발 계획을 발표했고, 건설사와 함께 대대적인 설명회를 개최했다. 서울의 오래된 부촌이었고, 개발에는 엄청난 보상금이 뒤따랐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일부 노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재개발에 찬성했다. 단, 어머니만 제외하고.

  어머니는 재개발을 끝까지 반대했다. 제대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윗마을을 제외한 나머지 마을은 아파트 시공에 들어간 상태였다. 2년 후면 완공되는 아파트 공사로 마을은 제법 삭막해져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대문과 벽은 붉은색 락카 스프레이로 쓴 경고 문구와 욕설로 가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청 공무원부터 건설업자까지 집에 다녀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그 누구도 어머니를 설득하지 못했다. 남은 것은 주민들의 협박과 비난, 욕설이었지만 어머니는 단호했다. 결국 별장이 속한 윗마을을 제외한 아랫마을까지만 재개발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죽음 뒤 마을을 떠나며 노인이 했던 말이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사람의 기운은 집의 기운을 따라가는 법이야.’ 어쩌면 별장을 흉가로 만들었던 건 별장에서 일어났던 죽음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문과 비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억지라 해도 상관없다. 사람의 기운이 집을 기운을 따른다면, 남자와 어머니, 나를 불행으로 이끈 책임의 절반은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재개발에 찬성해 막대한 보상을 받고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면 어머니와 나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보다 나아졌을까, 아니면 더 불행해져 있을까.

  유골함을 마주한 뒤 일주일 동안 별의별 생각에 미칠 지경이었다. 이 유골이 학생의 유골이라면 제임스는 왜 유골을 어딘가에 뿌리지 않고 이곳에 숨기고 떠난 것일까. 도대체 이 연립에서 죽은 사람은 몇 명일까, 혹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이 연립에서, 이 마을에서는 살아서는 나갈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제임스가 떠넘기고 간 숙제는 내가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내게 주어진 항목이라고는 사느냐 죽느냐의 이지선다 뿐인데 제임스가 낸 문제의 항목은 범위의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냥 떠나버리면 되는 것일까…….

  오늘도 여자는 남자와 다투고 있었다. 연립의 사람들은 각자 맞닥뜨린 운명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집은 기운이라는 것이 있어 그 기운에 휩싸인 걸까. 지금으로서 그저 이곳이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자를 다시 만난 건 한 달 만이었다. 여자가 일하는 술집을 찾은 건 마지막으로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못 본 사이 여자는 많이 야위어 있었고, 눈가와 입가의 멍은 기미처럼 퍼져 있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여자는 짓궂은 남자들 사이에서 애쓰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쾌활함은 사라진 지 오래인 듯 억지스러운 미소로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택수 그 놈하고는 살 만하냐?”

  중년의 남자 손님 한 명이 여자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세 명의 손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술 시중을 들고 있던 그녀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남자의 손을 떼냈다. 여자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마른 오징어채만 씹고 있었다.

  “택수 그 놈 지겨워지면 나랑 살자. 내가 잘해줄게.”

  중년의 남자는 말하는 중간중간 여자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여자는 성을 내며 자리를 떴다.

  “아니, 저년이 요새 왜 저래. 툭하면 짜증이야, 짜증은. 지가 무슨 요조숙년줄 아나. 걸레같은 게.”

  남자들은 자리를 뜬 여자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남자들의 말에 욱 했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여자를 위한다는 핑계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잠시 뒤 여자가 맥주 한 병과 땅콩을 들고 내 옆으로 왔다. 여자가 내 곁에 앉자 남자 셋이 뭐라고 수근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웬일이에요.”

  여자의 표정은 심드렁했지만 말투나 가려진 표정 뒤에는 오랜만이라는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잘 지냈어?”

  여자는 안부를 묻는 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채 내 잔에 맥주를 따르는 여자의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잘 안 지냈으면 어쩌려고요?”

  퉁명한 여자의 말투가 떨렸다. 한 마디라도 더 물었다가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맥주를 원샷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여자의 잔에도 맥주를 따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같이 떠나자. 그거 말하려고 왔어.”

  내 말에 여자가 입을 막은 채 고개를 들었다. 나는 여자에게 티슈를 뽑아 내밀었다. 여자는 코를 푸는 척하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눈과 코가 빨개진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 오빠,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되게 웃겨졌네.”

  여자의 웃음에 마음이 한시름 놓였지만 즐거워서 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마음이 더 불편했다.

  “너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나는 맥주와 안주를 더 시켰다. 그리고 주점 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 있었다.

  퇴근하는 여자와 함께 연립으로 향했다. 추운지 여자가 몸을 떨었다. 얇은 블라우스와 짧은 치마 차림의 여자는 얇은 카디건만 걸친 채였다. 5월 초였지만 일교차가 커 쌀쌀한 밤이었다.

  “오빠, 난 못 가요. 오늘 술집에 다녀간 남자들, 나랑 같이 사는 그 자식 다 한통속이에요. 그들뿐만이겠어요? 이 동네 사람들 모두 한통속이에요. 오빠만 조용히 떠나면 아무 문제 없을 거에요.”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여긴 아닌 것 같아. 뭔가 이상하다는 거지. 나도 이런 곳에서는 죽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같이 떠나자. 밤에 몰래 떠나면 괜찮을 거야.”

  탄식 같은 여자의 짧은 웃음이 어두운 공기 중에 불꽃처럼 터졌다.

  “밤에 몰래요? 이리와 봐요. 저기 둑방 보이죠? 밤이면 저기 남자들이 교대로 우리 집을 지켜보고 있어요. 내가 도망가나 안 가나. 저 파란색색 지붕집이 그들의 아지트라고요.”

  새벽마다 둑방에 서 있던 검은 형체는 환영이 아니었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식되고 있던 어둠의 실체가 실질적인 실체가 망상이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감이 일었지만 두려움 역시 실제가 되고 보니 새벽의 어둠을 마주하기 힘들어질 것 같았다.

  “내가 하나 더 말해줄까요? 405호 가족, 저 사람들이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저 집,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대부업체를 소개해주기도 해요. 405호 아저씨도 저 집을 통해 돈을 빌렸어요. 아들 유학 보내려고요. 405호 아들은 동네에서 유명한 애였어요. 집은 찢어지게 가난한데 머리가 좋아서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거나 다름없는데 중고교 시절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데다가 모의고사를 보면 전국 100위권 안에 들 정도로 수재였죠. 워낙 뛰어난 아이여서 국내 대학만 머무르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는 거죠. 밑져야 본전으로,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해외 대학에 원서를 냈대요. 그런데 글쎄 두 군데서나 합격 통지를 받은 거에요. 제가 무식해서 학교 이름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둘 다 유명한 대학이었대요. 미국 대학은 장학생은 아니었고, 캐나다 대학을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해서 캐나다 유학을 결심한 거죠. 그런데 보세요. 저런 형편에 아들 유학 보낼 수가 있겠냐고요. 아빠는 일용직 노동자, 엄마는 부업, 형은 뇌성마비 장애.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급급한데 유학은 가당치 않았죠. 그래도 선생님들이 모금운동을 해서 항공료랑 한두 달 치 생활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지만 어찌됐든 유학 가서 지낼 생활비가 없던 거죠. 그래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요.”

  여자의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여자와 나는 자연스럽게 연립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며 여자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아들 유학 보내고 얼마 뒤에 야반도주를 한 거에요. 대출 갚을 길이 막막했던 거죠. 그런데 도망가다 감시자들에게 들켜서 붙잡힌 거에요. 나도 들은 얘기라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동네에서 떠도는 얘기는 거의 사실이라고 보면 돼요. 결국 대부업체에서 가족을 장기밀매업자에게 넘겼대요. 아마 저 여자도 405호에 대출해 준 돈 받아내기 힘들거라 생각한 거겠죠.”

  여자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껐다.

  “나도 도망갔다가는 405호 가족꼴이 날 거에요. 그러니 나에게 도망가자느니, 떠나자느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적어도 아직은 죽고 싶지 않으니까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여자를 따라 나도 일어났다. 여자가 내 손을 잡았다. 여자의 손이 차가웠다. 여자와 손을 잡고 연립으로 들어갔다.

  여자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지 못했다. 다만 오랜만에 여자와 밤을 보내며 여자를 힘주어 안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여자가 내 마음을 알지 않을까 싶었다. 문득 살기 위해 걸었을 어머니의 걸음을 떠올렸다. 어떤 간절함이었을까, 어떤 절박함이었을까. 그 안에는 나를 향한 사랑도 조금은 있었을까…….

  여자가 잠든 틈을 타 집으로 내려가려는데 여자가 몸을 뒤척였다.

  “가는 거에요?”

  “어.”

  조심스레 방을 나서려는데 여자의 물음에 멈춰섰다.

  “오빠, 나 좋아해요?”

  잠꼬대 같은 여자의 말에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여자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됐어요. 잘 가요.”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를 뒤로 하고 집으로 내려왔다. 여자의 물음에 대답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다. 여자의 말처럼 나는 비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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