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길,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인 길이지만, 어떤 길이던 종착점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속도로, 우리의 길의 종착점에 도착해야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길”
요즘 유행하는 'D'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하지만 신비주의 컨셉인지,
D에 관해선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얼굴, 그의 과거, 그의 소속사, 그의 본명까지도. 그에 대해 유일하게
밝혀진 것은 그가 키가 약간 작은 남자라는것, 알려진 정보가 없어서인지, 그가 부르는 노래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 해야하나.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다.
그는 공연을 할 때나, 방송에 나올 때나, 항상 '웃는 가면'을 쓰고 나왔다. 흔히 볼 수 있는 웃는 얼굴을 꾸며낸 가면,
그의 노래와는 전혀 다른, 환하게 웃고 있는 가면을. 언젠가 그가 출연했던 예능 프로를 시청한 기억이 있다.
한 출연자가 D의 가면 속 얼굴이 궁금하다며 그의 가면을 벗기려 해보았으나, 결국엔 실패했었지.
그 장면을 보며, 다른 출연자들과 스태프들, 그리고 D 마저 멋쩍은듯이 웃음 소릴 내었었다.
하지만 난, 그 장면을 보면서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가면을 벗길뿐이었으나
TV너머로 느껴졌던 그 우울하고 싸늘한, 멀쩡한 사람까지 깊은 늪 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셀수도 없이 많은 벌레들이 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불쾌감, 우울과 심연, 그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기를 꺼내달라고, 구원해달라고, 외치는 느낌을. 마치 나를 부르는 듯한 그 느낌을, 화면 너머의 D에게 받았다.
그 느낌을 받은 이후로, 난 D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과거, 이름, 성별, 나이...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모든 인터넷 사이트를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그의 정보는 티끌만큼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정체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단서 비슷한게 보이면 불법적인 사이트에도
접속하여 그를 검색해보았지만, 역시나 오리무중. 오히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D'라는 늪에,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 굉장히 불쾌하고, 섬뜩하고, 우울하고, 괴로운... 온 세상의 부정적인
것들을 한데 섞어놓은걸 마주한다면 그런 기분일까 긍정적인 노래도 있지만, 대체로 어둡고, 부정적이고, 우울한
그의 노래보다 더 어둡고, 부정적이고, 우울한. D는 도대체 누구인가?
아, 마침 3시에 예정되어 있었던 그의 첫 인터뷰가, 지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온 세상을 집어 삼킬듯이 비가 내리는 새벽, D의 이야기와 진행자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 * * * * * * * *
"안녕하세요? 새벽이면 돌아오는 새벽 라디오의 진행자, XXX입니다!"
항상 듣는, 진행자의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멘트. 그 뒤에 이어져 나오는 D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난 살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D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직 앳된 소년의 목소리.
노래를 부를 때의 그 울부짖는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저희 라디오에서 당신의 첫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어 매우 영광입니다. 자,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게 된 소감을
말씀 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제 얘기를 하질 않아서... 살짝 새롭기도 하고, 무엇보다 많이 떨리네요.”
이어지는 사회자의 질문.
“자 그럼. 각설하고 첫 번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셨던 것 위주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D라는 이름을 활동명으로 사용하고 계신데, D 님의 본명은 무엇인가요?”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고, D의 입이 열렸다.
“제 이름은... 밝힐수가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의 답변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말소리들이 뚝 끊겼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애초부터 합의된 사항이었으니, 답 해주시고 싶은것만 답 해주시면 됩니다.”
능숙하게 위기를 넘기는 노련한 사회자의 활약으로 조용해졌던 라디오에서 다시 말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본명을 말씀해주시기 어렵다니, 다른걸 질문하도록 하죠. D,
당신의 나이를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그것도... 죄송합니다.”
그의 반복된 대답 회피에, 라디오의 소리가 다시 조용해졌다.
“역시! 비밀이 많은 사나이이신 D님 답습니다. 자, 그렇다면 D, 당신이 밝힐 수 있는 것을, 저희의 질문 없이,
당신이 한번 얘기 해주십시오.”
정적을 깨는 사회자의 질문에, D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 했다.
“...제가요?”
“네. 저희는 당신이 무엇을 얘기할 수 있는지 모르니까, 당신이 직접 말씀
해주시는 것이 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가요?”“...”
반복되는 정적, 그것을 깬 것은 방금 전보다 더 떨리는 D의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저로써는... 밝힐 수 있는게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D의 답변에, 계속해서 라디오를 이어나가던 진행자의 목소리도 끊겨버렸다.
“...”
아까보다 더욱 길게 이어지는 침묵. 한참이 지나고, 진행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럼... 이번 인터뷰는 이쯤에서 마치겠습니다. 저희는 2부에서, 간단한 인터뷰 후기와 함께 다시 뵙겠습니다.”
평소보다 한 시간 더 일찍 방송이 마무리되고, 급하게 띄운 듯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잠시 뒤, 노래가 끝나고 2부가 진행되었지만 항상 내 귀를 사로잡던 방송은, 더 이상 내 귀를 사로잡지 못했다.
내 머리 속은 온통 D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왜 하나도 밝히지 못 하는거지? 대체 왜?
인터뷰 수락에 응한게 아니었던건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인터뷰는 자기가 수락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가 인터뷰에서 하고싶던 말이 있던것인가?’
갖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쯤, 무엇인가 떨어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내 방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난, 내 방안을 둘러보다 내 발치에 떨어져
박살나있는 유리잔을 발견했다.
“젠장... 이건 왜 깨진거야..?”
자리에서 일어나자 깨진 유리잔의 파편이 나의 발끝을 살짝 베어냈다. 그 따끔한 통증에, 난 작게 소리를 질렀다.
“이런... 약이 어디있더라...”
나의 눈 앞에 보이는 선반에서 자그마한 약통을 꺼내, 연고와 밴드를 꺼낸 뒤 다시 선반에 집어넣은 뒤 연고와
밴드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가져오는 그 짧은 순간, 그 짧은 순간에 어떤 생각이 나의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혹시, 어떠한 이유 때문에 말을 못한 것이라면?’
그런 생각은 유리잔 파편을 모두 쓸어내고 다시 의자에 앉아 발가락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 와중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되었다.
‘그래, 이 잔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듯이, D 역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한건가? 외부의 압력이 있던것인가? 인터뷰 수락을 해두고,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는건, 역시...’
생각이 멈추지 않고 계속 되자, 밝은 햇살이 정신 차리라는 듯, 커튼 사이로 날 비추고 있었다.
“젠장...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이, 내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슬슬, 시작할 시간이야.’
나는 라디오를 듣던 의자를 책상으로 가까이 당겨서 앉았다. 그리고 책상 옆에 비스듬하게 기대두었던
검은색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자... 써 보실까...”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 작게 울리는 윙윙대는 소리를 들으며 작은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자동차들이 달리는 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윗층에 사는 어린 아이들이 쿵쿵대는 소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천천히 끓기 시작하는 소리, 잔잔하게 들려오는 삶의 교향곡을 들으며 노트북의 잠금을 해제한다.
넓은 바다가 펼쳐진 노트북의 배경화면을 잠시 감상하며 커피잔에 믹스커피를 세 봉지 정도 털어넣는다.
사르륵, 사르륵, 사르륵, 세 번에 걸쳐 커피믹스가 잔 안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커피믹스를 털어 넣으니
주전자가 삐이- 하며 김을 뿜어냈다. 교향곡의 클라이맥스. 노트북의 ‘1’이라 쓰여진 문서를 열고,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뜨거운 물이 차오르며 곡이 끝나감을 알렸다. 물을 적당히 채우고,
크지 않은 냉장고의 냉동실을 열어 얼음을 꺼내 커피에 넣는다. 퐁, 퐁, 퐁, 퐁. 얼음 네 개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커피잔 안으로 떨어졌다. 얼음이 빠르게 녹아들며, 교향곡의 종지부를 찍는다. 그렇게 완성된 냉커피를 들고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노트북의 화면을 메우고 있는 ‘1’이라는 제목의 문서, 삶의 교향곡이 끝나고,
‘D’를 기록한, 나의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가 가면을 쓴다는 사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추측한 그가 가면을 쓰는 이유, 그리고 그에 대한 내가 찾은
불확실한 정보들과, 내가 생각한 다른 정보들을 구분하여 적어두었다. 그렇게 정보를 나열해 적는데만 정신이
팔려있던 날, 누군가가 가볍게 흔들었다.
“어이! 뭘 하길래 사람이 문을 두들겨도 답이 없어?”
아, 지금 나한테 성질을 내며 이야기를 하고있는 사람은, 이반. 나의 친구이자, D의
열렬한 팬으로써 내가 더 많은 정보를 추측할 수 있게 도와준 녀석이다.
헌데, 이녀석이 왜 여기?
“너 되게 내가 여기 왜 왔냐는 듯한 표정이다?”
당연하지, 이 녀석과 난 친구이기는 해도,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오가는 사이는 아니기 때문에. 잠깐,
아무 말도 없이..?
“너 설마... 기억 안 나는건 아니지..? 지난주에 얘기했잖아, 오늘은 D의 콘서트가 있는 날이라고! 자리 어떻게
못 구하냐고 물어본건 너잖아!”
아, 젠장.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를 직접 보게 되면 뭐라도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녀석에게
D의 콘서트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냐고 물어봤었지. 그게 하필 오늘이라니... 타이밍 하고는.
“그래서, 몇신데?”
“바로 출발해야해! 해가 져버리면 공연이 시작한다구.”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하루종일 노트북 앞에만 앉아있었더니,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대충 옷을 입으며 창밖을 바라보니,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푸른빛의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암튼! 준비 끝냈으면 빨리 나와! 시간 얼마 안남았다고!”
젠장, 더럽게 닦달하네. 문서는 그의 콘서트엘 다녀 온 뒤에 더 이어야겠다. 그를 직접 본다면,
더 쓸 내용이 생기겠지... 이렇게생각하며, 난 이반의 손에 이끌려, 집에서 끌려나와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이거 늦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궁시렁 거리는 녀석의 옆모습을 보며, 난 푸른빛에서 검은빛으로 물들어가는 차창 밖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었다.
D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어떨까, 그의 가면 속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지 생각하며. 잠깐 잠이 든 것일까, 어느새 창밖은 온전한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녀석은 차에서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도착 한거야?”
“그래. 마침 깨우려 했는데. 타이밍 좋게 일어났네. 빨리 인나! 조금 걸어야해.”
이반의 말에, 난 외투를 챙기고 차에서 내렸다. 이반이 차를 주차해둔 곳은 작은 공터였는데, 그곳은 다른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려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공터를 둘러싼 울타리 밖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가 탁 트인 곳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곳이 절대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는 것. 이 두가지는 확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독 많이 들리는 풀벌레 소리와, 새어들어오지 않는 불빛, 간간히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
그리고 그 흔한 공원 내 주의 표지판이나 공원의 이름이 써있는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드디어 내 장기를 팔아먹으려 드나 라는 생각에 이를 때쯤, 차에 가만히 기대어 서 있던 이반이 입을
열었다.
“아, 팬카페 회장님한테 메일 왔다. 따라와. 아마 우리 가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있을거야.”
“그럼 여기 빼곡하게 들어선 차들은 뭐야? 그들은 다 어디있는건데?”
“먼저 갔다거나 하겠지. 메일은 다 각자 오니까.”
“괜찮은ㄱ...”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반이 먼저 내 말을 끊었다.
“조용히 하고 따라오기나 해. 원래 혼자 오려 했는데, 네가 자리 구해달라 했잖아.”
퉁명스레 말을 뱉고는, 녀석은 공터 한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놓인 손전등 하나를 들고, 그 옆에 나 있는 좁은
오솔길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가기도 뭣하고, 무엇보다 D의 정보를 더 캐낼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감에 가득 찬 나는말 없이 이반의 뒤를 따랐다. 무언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우리가 걷다 밟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땅에 널린 나뭇잎들이 밟히는 소리가, 내 신경을 더욱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반이 멈춰섰다.
“뭐야? 이제 도착한거야?”
“그래. 여기가, D의 콘서트장이야.”
“여기가 콘서트장이라고..?”
난 녀석의 말을 납득 할 수 없었다. 이반이 콘서트장이라고 얘기 한 곳은, 무대조차 없고, 오직 초목만이 무성한
가로등이 설치된 숲속의 빈 공터였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앉아있었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도, 그냥 바닥에 앉아있는 사람도,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도, 자신의 외투를 깔고 앉은 사람도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뭐야? 이 사람들..?”
“쉿. 모두 D를 기다리는거야. 그의 콘서트는, 네가 알던 평범한 가수들과는 다르니까.”
아니... 이미 충분히 다른건 알겠는데, 여기서 더 다른게 있다고..? 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누군가가 바닥에 앉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드럼 소리가 들려왔다. 작게 울리는 둥둥 거리는 소리. 내가 설마 이거냐는 표정으로 이반을
바라보자. 이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럼 소리가 서서히 커지자, 들릴 듯 말 듯하게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은, D와 함께하는 이들일것이라. 나는 추측했다. 여러 악기의 소리가 더 섞여서 나의
고막을 자극하는 새에, 마치 속삭이는 듯한,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것만 같은 노랫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 노랫소리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는 듯,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난 천천히, 아주 작게 들리는
노랫소리를 찾아서 고개를 돌렸다. 날 가만히 바라보던 이반의 얼굴을 지나쳐, 반대편에 있는 검은색 코트를 입은채 풀밭에 앉아있는 사람까지 닿았다. 그리고 내 눈은, 내 얼굴은, 내 몸은, 그 사람을 향해 경직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온 몸에서 짜릿. 하고 전율이 흘렀다. 내 모든 감들이, 저 사람이 D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때, 그 사람이 날 바라보았다. 마주한 그의 얼굴엔, 내가 TV와 인터넷으로 그의 정보를 찾아보며 숱하게 보았던, 웃는 가면이 있었다. 그 가면을 마주하자, 내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내 입에선 작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조사하던 대상이 눈 앞에 있다는 것과, 그를 조사하면서 느꼈던 것들이 한데 뒤섞여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아, 이것이 진정한 감동인가, 이것이 진정한 감탄인가, 이것이 진정한 경이인가. 내가 겪어왔던 모든
놀랍고, 무섭고, 신비하고, 경이로운 경험을 모두 합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그의 웃는 가면은, 나의
눈을 통해 머리 속을 온통 헤집어 놨고, 그의 검은 코트는 몸에 덮여, 전신에서 전율이 일게 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의 귀를 통해 다른 소리들을 차단시켰다. 그의 가면은 사람을 홀리는 요물이요, 그의 모습은 사람을 따르게 하는
성물이며,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비명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칠흑같이 어두웠던 숲은
어느새 나뭇잎들 사이로 비치는 태양빛으로 사람들을 깨우고 있었고, 이반도 나의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었다.
이들 중 깨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런데, D와 그의 동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난 분명 잠들지 않았고, 내 모든
신경을 D에게 집중시켜뒀었는데도, 그와 그의 동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밤과 새벽사이에 본 것은,
모두 환영이었나, 모두 그를 향한 나의 탐구심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나. 그게 아니라면, 난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