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그프리트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내 키의 반인 허리밖에 오지 않은 꼬마는 이제 내 가슴까지 자랐다. 그래도 과거 조카들과 오라버니의 손주들에 비해 상당히 더딘 발육이었다.
지그프리트의 ‘재앙의 별’은 ‘행운의 별’과 상충되어 나와 함께 있으면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정확히는 나와 지그프리트가 함께 있었던 시간만큼, 둘이 떨어져 있어도 효과가 지속되었다.
그렇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그프리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수록 좋았다. 우리는 거의 하루종일 개인 시간을 제외하고 붙어있었다. 예를 들어 지그프리트가 받는 수업에 나도 참관을 해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 종일 붙어있어도 우리는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요정족의 신체적 특성을 물려받아 계절에 한 번 짧게는 일 주, 길게는 한 달 동안 외출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봄기운이 향기롭게 맴돌 때 나는 계절을 탔다. 이에 맞춰 내 신체도 변했다. 계절에 예민한 요정족은 계절의 변화에 대비해 미리 약을 준비했다. 하지만 올해는....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되어 바빠진 지그프리트의 일정에 맞추게 되어 약을 준비할 수 없었다.
밤 몰래 빠져나오려면 예민한 이 아이는 눈치를 채 나를 붙잡고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년처럼 지그프리트를 데리고 약초를 따러 갈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바쁜 황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인, 오늘은 같이 안 나가요?”
침대 옆에 걸터앉은 지그프리트가 내게 물었다. 나는 변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채였다.
“네, 오늘은 몸이 안 좋네요.”
콜록. 콜록. 나는 기침 소리를 지어냈다. 지그프리트와 나는 벌써 삼십분 넘게 이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 일어나서 거울을 확인할 새도 없이 나는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인이 아픈데 남편이 어떻게 나가요. 오늘은 부인 옆에서 간호할게요.”
“아니요! 지그프리트, 지그프리트는 일정대로 나가주세요.”
나는 곧바로 반박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소심하게 이불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아이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꼬마 신랑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아이는 내가 황후처럼 ‘재앙의 별’의 기운에 노출되어 아프다고 착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그프리트의 앞에 변한 모습을 보여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늘 약 먹고 푹 쉬면 저녁에는 괜찮아질거에요. 그러니깐 오늘 일정 제대로 수행하고 오세요!”
“진짜지요? 제가 돌아오면 잘했다고 칭찬해주셔야 해요?”
“당연하죠! 그러니 남편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자기 전에 동화책도 읽어드릴게요.”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이는 나를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지그프리트의 손은 여전히 내가 뒤집어 쓴 이불을 움켜잡고 있었다.
하... 이 아이를 어떻게 하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약초가 있어야 하다고! 약초를 찾기 위해서는 황궁 북쪽의 얼음 궁에 갔다 와야 하는데... 모습을 들키지 않고 얼음 궁에 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편도로 걸어서 세 시간인데.
“...부인이 어마마마처럼 거짓말 하면 어떻게 해요....”
지그프리트가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아이는 내가 황후처럼 약속을 안 지킬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거였다.
나는 뒤집어 쓴 이불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만 피고 나머지 손가락을 접었다.
“약속해요. 남편이 수업 끝났을 때 맞춰서 제가 마중 나갈게요.”
“약속이에요.”
지그프리트는 말끝을 끌며 나를 의심했다. 그래도 아이는 역시 아이인지 내 새끼손가락에 본인의 손가락을 걸었다. 우리는 세 번 손가락을 흔든 뒤 약속을 했다.
“다녀올게요. 몇 시에 수업 끝나는지 알죠?”
“다섯 시. 잘 다녀와요, 남편.”
지그프리트가 이불을 뒤집어 쓴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꼬마 주제에 이런 건 어디서 배워 온 거야. 미래의 폭군은 여자 몇을 울릴 죄인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지그프리트가 나갈 때 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그프리트는 오년 만에 나 없이 혼자 생활을 하게 된다.
지그프리트가 나가고 나서 나는 빼꼼 이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방 안은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부부의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시녀나 시종 한 명 없었다. 지그프리트의 재앙을 두려워해 황실 고용인들도 두려워해 높은 봉급에도 불구하고 일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즉, 인력난으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옷을 갈아입기 전까지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옷을 갈아입었다.
황태자비의 기품 있는 옷이 아니라 황실에서 일하는 시녀도 아닌 하녀의 유니폼이었다. 때를 타면 안 되기에 검은색의 활동하기 편한 옷이었다. 그 앞에 새하얀 앞치마를 둘러줬다.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하나로 묶어 올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제법 고운 하녀 한 명의 모습이었다. 손바닥은 일하지 않아 굳은 살 하나 없었고 피부는 타지 않아 새하얀 백옥이었지만.
요정족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얼음 궁으로 가는 건 쉬웠다. 나는 옷을 담은 나무 바구니를 들고 북쪽 궁 방향으로 다급히 걸어갔다.
*****
세 시간 만에 나는 간신히 얼음 궁에 도착했다. 얼음 궁은 관리가 되지 않아 거의 허물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궁의 벽에 생긴 커다란 금은 작년보다 더 커져있어서 바람이 불때마다 기괴한 귀신 울음소리를 냈다. 바람의 요정들이 벽을 통과하면서 나는 소리였다. 회색빛의 작은 바람의 요정들은 키득거리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똑같이 손을 흔들어 줬다.
인간이 없으니 요정을 보이고 들리지 않는 척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나는 얼음 궁 곳곳에서 장난을 치거나 놀며 날아다니는 요정들에게 인사를 하고 때로는 짧게 수다를 떨었다.
얼음 궁 입구에서 십여 분 더 걸으면 작은 개구멍이 나왔다. 바위로 숨겼기에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나는 땅의 요정들에게 부탁을 해 혼자서 옮기기 어려운 바위를 함께 옮겼다.
바위를 옮기자 작은 체구의 성인 한 명이 들어갈 정도의 개구멍이 나왔다. 먼저 바구니를 최대한 멀리 밀어 넣은 후, 개구멍으로 기어들어갔다. 낑낑 거리며 개구멍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온 몸은 먼지와 흙투성이였다. 새하얀 앞치마는 얼룩져버렸다.
잡초와 약초가 섞여 자란 관리되지 않은 정원. 절반이상 벗겨진 은으로 칠한 벽은 오래되어 보였다. 얼음 궁은 작년과 변함없었다. 죄인을 유폐하는 궁인 얼음 궁은 관리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오로지 죄인이 있을 때만 최소한의 관리가 되기에 궁이 오래되어 보이고 사람 손길이 없어보일수록 좋았다.
나는 성벽을 조금 돌아 얼음 궁의 정원으로 갔다. 무성한 잡초와 약초 사이에 작은 검은색 덩어리가 있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인간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요정? 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까치발을 든 채 조용히 다가갔다.
바닥에 있는 검은색 덩어리는 인간이었다. 아이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후드 사이에 삐져나온 타오르는 머리카락색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수백 년 전...은 아니지만 근 백년 이상 쌓여온 아이를 달래는 스킬이 있었기에 어린 아이 하나쯤 굽든 삶든 쉽게 회유할 자신이 있었다.
“꼬마야, 얼음 궁에는 왜 있니.”
내 질문에 아이는 나를 노려봤다. 지그프리트처럼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있었다. 아이는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애꿎은 흙을 파고 있었다. 나는 말없는 아이의 옆에 똑같이 쭈그려 앉았다.
“뭐 하고 있니?”
나는 아이가 파고 있는 흙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이는 말없이 휙, 고개를 돌렸다.
“꺼져.”
“여기 내 궁인데.”
나는 아이의 말에 괜히 오기를 부렸다.
“......”
아이는 말없이 일어났다. 이게 아니었는데. 아이는 한 걸음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아이를 올려다봤다. 나이는 지그프리트보다 한두 살 많아보였다.
아이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 등을 돌렸다. 나는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악!”
아이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내 손을 쳤다. 아이는 팔을 움켜잡으며 넘어졌다.
“꼬마야!”
나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의 후드를 벗겨 상태를 확인해봤다. 아이의 무릎과 손바닥이 붉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다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어디선가 경험한,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아이의 팔을 걷어냈다. 아이의 옷은 봄에 맞지 않는 두꺼운 겨울옷이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아니 성인 보호자라면 아이가 꽃이 만개한 봄에 솜이 들어간 겨울옷을 입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나.
아이의 소매를 걷어보니 팔은 상처가 가득했다. 맨 살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다. 아물지 않은 붉은 상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역겨운 고름이 흐르는 회색 상처. 검푸른 멍과 노랗고 회색으로 변한 멍.
아이의 팔은 안 좋은 쪽으로 알록달록했다. 마치, 오 년 전의 지그프리트와 같이 아이는 상처 투성이었다.
“누가 이랬어.”
아이의 행색을 보아하니 고위 귀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귀족들은 사생아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집안에 가둬둔다.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내 처지는 예외적이었다.
귀족의 자식은 아니다. 그러면 하녀나 시녀의 자식 중 하나? 부지런할 하녀나 시녀가 자식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허가받은 사람이 아니면 황궁에 발을 디딜 수 없는데. 이 아이의 정체는 상당히 수상스러웠다.
“놔!”
아이는 황급히 팔을 숨기며 악이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손을 놓자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못 도망가게 발을 묶어 줘.”
나는 흙의 요정에게 부탁했다. 건강한 갈색의 요정들은 사악한 악동같이 키득거렸다. 요정들은 자기가 하겠다며 투덕거렸다.
‘그래!’
‘내가 할 거야!’
‘미르하의 밭을 망가트렸으니 복수할거야!’
요정들은 동시에 떠들며 아이의 발을 묶었다. 아이는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자 무게중심을 잃었다. 양 팔을 위태롭게 휘저었다. 나는 아이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넘어지지 않게 잡아줬다.
아이는 내 시선을 피한 채 입술을 쭈뼛거렸다. 아이는 나랑 대화할 의향이 없어 보였다. 어린 인간이 다쳤으면 치유해줘야지. 아무도 오지 않는 이 냉궁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캐물으려다가 나는 포기했다.
우선 아이의 치유가 우선이니깐.
“에휴, 아가. 손!”
나는 손을 내밀었다. 내 말에 아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이는 입을 열기 전에 오래 뜸을 들였다.
“그래서 뭐?”
아이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지그프리트를 처음 봤을 때처럼 아이는 대단히 날이 서 있었다. 길들이기 전의 야생 짐승 그 자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방어태세를 갖춘 아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는 손을 빼려고 온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다.
“많이 아팠지.”
‘물의 요정아,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줘.’
내 부탁에 물의 요정들이 아이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서서히 아이의 몸을 고쳐나갔다. 아이는 몸이 괜찮아지고 있는 걸 체감하는지 무심한 눈이 점점 커져갔다. 아이는 내 손에서 손을 빼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우리는 어색하게 냉궁에서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서 있었다.
‘미르하! 끝났어.’
‘내가 더 많이 치료했어!’
‘아니야, 내가!’
요정들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의 소매를 걷어 올려 팔을 확인했다. 멍과 상처로 뒤덮인 팔은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로 돌아와 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아이의 메마른 팔과 앙상한 손목이었다.
“자, 끝났으니 가.”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치유하느라 시간이 거의 다 가 있었다. 지금 돌아가면 지그프리트의 수업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약초를 따서 제조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약을 내일 제조해도 문제는 없는데 지그프리트에게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순수한 꼬마 신랑님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 좋아해줄 것이다. 인간의 아이는 새하얀 양피지 같으니깐. 어중간하게 물든 어른들보다 사고가 유연하고 편견이 없었다. 만약 지그프리트가 나를 싫어하면? 맹목적인 애정을 보여준 단 하나뿐인 인간인데.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지그프리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도... 옷을 갈아입고 변한 모습을... 어떻게든 숨겨야지.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다이아몬드 궁으로 돌아갔다.
총. 총. 총.
다급한 발걸음소리가 계속 뒤에서 들렸다. 작은 발로 성인의 걸음걸이를 쫓아오려는 귀여운 소리였다.
터벅터벅.
나는 더욱 속도를 내서 걸었다. 내 발소리에 맞춰 뒤에서 들리는 작은 발소리가 빨라졌다.
타닥. 타닥. 타닥.
그런데 이 아이는 왜 계속 나를 따라오는데!
방금 전, 내가 치료해준 붉은 머리의 꼬마가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