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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회장님
작가 : HoneyShake
작품등록일 : 20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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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6
작성일 : 20-09-06     조회 : 44     추천 : 0     분량 : 1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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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은 잠을 자기 위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자기 전에 10분 정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둘만의 시간. 문득 회장은 자신이 그녀에게 항상 의존하면서도, 본심을 털어놓은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

 

 회장이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해?”

 

 “난 질문을 많이 하는데, 넌 나한테 질문을 거의 안 하잖아.”

 

 “난 처음부터 네 명령을 듣도록 만들어졌으니까. 로봇 주제에 호기심이 많아서 좋을 건 없지.”

 

 그랬지. 그녀는 로봇이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내심 본인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한동안 무언가 질문할 거리를 찾는 듯 저 멀리 방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넌 아내나 자식이 없었지.”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맞아. 그리고 연애 같은 것도 해본 적 없어.”

 

 “왜? 돈이 그렇게 많았으면서.......설마 너 동성애자야?”

 

 “아니야! 무슨 소릴……”

 

 회장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상할 게 있나? 돈이 많다고 해서 시간이 많은 건 아니잖아. 직원들 중에서도 일하느라 바빠 결혼 안 한 사람들 많아.”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아내나 자식이 있었으면 굳이 내가 필요하지 않았을 거고, 상속문제로도 골치 아플 일도 없을 거고. 내가 알기로 너 정도 되는 부자들 중에 결혼 안 한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런 것 같기도 해. 그래서 부모님도 살아계실 때 나보고 계속 누구랑 이든 간에 결혼을 하라고 하셨지. 근데 옛날 생각을 하면 하기 싫어지더라고.”

 

 “무슨 일 있었어?”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궁금한 걸 물어보라고 한 건 본인이었지만, 막상 과거를 얘기하려니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듣고 싶어? 별 거 없는데. 나한테 실망할 지도 몰라.”

 

 “앗, 미안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런 건 아니야. 궁금하면 말해줄게. 내 옛날 얘기.”

 

 그녀는 회장의 옆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회장은 전등의 불을 껐다. 달빛이 창문 밖에서 들어와 둘을 비췄다.

 

 “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어. 형 하나랑 여동생 하나가 있었지.”

 

 그는 자신의 몸을 지혜의 옆에 가까이 붙였다.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한 발열 기능이 작동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피어난 따뜻한 온기가 회장의 몸에 전해졌다.

 

 “난 어렸을 때부터 형과 항상 비교 당했어. 형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어. 공부, 운동, 성격 등......심지어 게임조차 나보다 더 잘했어. 난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만 하면서 보냈는데, 형은 새로운 게임도 한두 번 정도 하고 나면 나보다 훨씬 잘하는 거야. 여동생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외모 덕에 모두에게서 사랑받았어. 거기다 항상 남에게 친절했지. 우리 회사 공장에서 사고가 났을 때는 아버지께 받은 용돈을 모아 피해를 입은 노동자한테 보상을 해 줄 정도였어.”

 

 “비교 당하느라 고생했겠네. 그래도 네가 잘하는 게 몇 가지 있지 않았겠어? 그러니까 결국 최종 승자가 된 거잖아.”

 

 “그렇지 않아. 내 실력은 홍보팀과 언론에 의해 과장된 거야. 웬만한 대학교에서 무작위로 한 명을 뽑아도 나보다 나을걸. 아무튼 그때의 나는.......솔직히 지금 봐도 좀 문제가 많았어. 성격 탓에 남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고. 돈 많은 집 아들이니 누구에게 괴롭힘 당하거나 맞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사랑받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지.”

 

 그는 추억에 잠겨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난 회장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어. 대학교를 졸업하면 독립해서 수호그룹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 생각이었거든. 부모님도 괜히 리더 자리를 놓고 남매끼리 싸우기보단 차라리 그 쪽이 낫다고 생각하셨어. 형은 반도체, 광학장비 회사를 물려받고, 여동생은 쇼핑몰과 호텔, 재단에서 운영하는 봉사단체를 맡고. 우린 물질적으로도 풍족했고, 자기 몫에 대해서도 모두 만족했기 때문에 남매치곤 특이하게도 싸울 일이 없었어. 이때까지는 참 좋았는데……”

 

 “형에게 교통사고라도 난 건가? 인터넷에서 학습한 내용에 따르면 사고로 인해 뇌 손상이 왔다던데. 하지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었어.”

 

 그녀가 물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나았을지도 모르지. 사고를 당했다면 본인 잘못이 아니라 단지 운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을 테니까. 정 반대로 형이 너무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자연스럽게 죄 값을 치르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거야. 형은.......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쳤어.”

 

 “그건 처음 듣는 내용이네.”

 

 “형이 내 집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을 때가 아마 15년쯤 전이었을 거야. 그녀는 형보다 3살 더 많았는데, 연예인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예뻤어. 공부도 잘했고, 아마 문학 계통을 전공했을 거야. 그녀는 자신 같이 가난한 집안의 사람이 형이랑 사귀어도 되는지 다소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우린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 어차피 재벌 가문끼리 결혼으로 동맹을 맺는 시대는 지났고, 다른 재벌집 아들 딸 들도 모두 연애결혼을 했거든. 형은 이르면 1년 안에 결혼을 할 거라고 말했어.”

 

 “그런데 회장님 부모님께서 반대했던 거군. 그렇지?”

 

 “강력하게 반대했지. 처음에는 부모님께서 너무 시대착오적인 게 아닐까 싶었지만, 나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어. 그 여자는 전 남자친구와 2년 정도 동거를 했었는데, 그 남자는 허풍이 심한 사람이었어. 젊은 나이에 사업을 한답시고 상당한 빚을 졌고. 게다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빚의 일부는 여자친구의 몫으로 만든 거야. 여자친구는 형이랑 만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그 빚을 갚고 있었어. 걔는 그것 때문에 항상 형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

 

 “그건 좀 놀랍네. 듣고 보니 부모님 입장도 이해가 가는걸.”

 

 “나도 처음 소식을 들은 후에는 결혼을 반대했지만 형은 신경 쓰지 않았어. 난 처음에 형이 부모에게 손을 벌릴 줄 알았어. 여자가 진 빚은 대략 5천만 원 정도였는데,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큰돈이지만 우리에겐 작은 돈이었거든. 하지만 형은 용돈에 의존하지 않고 과외 알바와 인턴쉽을 병행해 가면서 같이 빚을 갚기로 했어. 빚을 절반 정도 갚으니까 결국 부모님께서도 두 손 두 발 다 드셨어. 결혼을 허락한 거지.”

 

 “해피엔딩이네. 그런데 그 뒤에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

 

 “그래.......솔직히 지금도 떠올리기 싫은 일이야. 결혼을 앞둔 어느 날, 형이 직장 동료로부터 전화를 받았어. 부산에서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걷고 있는 걸 봤다는 거야. 분명히 손잡고 걷고 있다고 했지.”

 

 “말도 안 돼.......재벌집 아들을 두고 바람을 핀다고?”

 

 “처음에는 형도, 나랑 여동생도 믿지 않았어. 하지만 의심은 날로 커져만 갔고, 결국 그녀와 우리 삼남매가 모인 식사자리에서 그녀가 메신저를 하는 도중 화장실에 가자 형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어. 운이 좋게도 휴대폰 화면이 꺼지지 않아 안에 있는 내용을 전부 알 수 있었지.”

 

 회장은 과거의 기억이 많이 불편한지 몸을 움츠렸다. 지혜는 천천히 회장의 팔을 쓰다듬었다.

 

 “여자는 확실히 바람을 피우고 있었어. 그것도 전 남친과 말이야. 그녀에게 수천만 원의 빚을 지게 만든 그 남자 말이야. 처음부터 그 망할 놈과 짜고 형을 엿 먹이려 했던 거냐면 그건 아니야. 우리가 모든 내역을 살펴본 결과 분명 여자친구는 처음에는 전 남친을 멀리하려 했어. 그 많은 빚을 지게 만들고 어떻게 뻔뻔하게 다시 자기 앞에 나타날 수 있냐고 했지.”

 

 “그런데 어쩌다가……”

 

 “이 부분은 말하기가 좀 복잡해. 사실 나도 정확한 진실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어떤 이유로 둘은 만나게 됐고, 술을 마신 뒤 같이 잔 거 같아.”

 

 “남자 때문에 그렇게 피해를 입었는데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 대화 내역을 보면 그날 뒤로 여자는 그 남자에게 눈에 띄게 우호적으로 변했어. 그녀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진실을 알아버린 형과 싸우는 동안, 난 계속해서 밑의 내용을 읽었지. 그녀가 생각하기에 형은 친절하고 돈도 많았지만, 채팅 내용에 따르면.......밤에는 많이 어설펐던 것 같아. 메신저에서 그 남자는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며 으스댔어.”

 

 “남녀 사이란 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인 것 같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형에게 받은 생활비의 일부를 그 남자에게 보내기까지 했어. 난 그 여자가 밉기보다도 이해가 가질 않았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언젠가는 걸릴 일이었거든. 메신저에 나타난 그 남자의 얼굴은 형보다 나을 게 없었어. 당연히 돈도 형이 훨씬 더 많았고. 아무리 성생활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돈을 잃을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중요할리가 없잖아. 그런데 그녀에겐 그렇지 않았던 거야. 그녀는.......더한 쾌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던 여자였어.”

 

 “그게 인간의 본성일지도 몰라.”

 

 “그런가? 아무튼 사실이 드러나서 그 여자는 형에게 싹싹 빌었지만, 형은 그동안 자신이 준 돈의 절반을 되돌려주라고 명령했지. 절반만 돌려받는 것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라면서 말이야. 원래 법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필이면 그녀의 밤일 담당은 우리 수호전자의 하청업체 직원이었어. 그런 인간이 어떻게 차기 총수에게 사기를 칠 생각을 한 건지.”

 

 “그건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서 돈은 어떻게 됐어?”

 

 “못 돌려받았어. 형은 하청업체에 찾아갔다가 그 남자와 크게 싸우게 됐고, 결국 양쪽 모두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어. 근처에 있던 송곳과 칼로 서로를 찌른 거야. 그 남자는 곧바로 죽었고, 형은 뇌사 상태에 빠졌어.”

 

 “아……”

 

 “형은 한 달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죽었고, 그렇게 내가 차기 그룹 총수로 선정된 거야. 처음에 난 부모님께 그냥 여동생에게 전부 넘겨주는 게 어떠냐고 했어, 사실 형의 죽음에는 내 책임도 있었거든. 내가 형에게 직접 한 번 찾아가 보라고 말한 거야. 정말 괜한 이야기를 한 거지. 게다가 이번에는 언론이 문제가 됐어. 당시 정권이 재벌 기업들에게 적대적이다 보니까, 언론은 끊임없이 형을 비난하는 기사를 냈어. 애인에게 차였다고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식으로 말야. 심지어 사람들은 우리 가족 전체에게 저주를 퍼부어댔고. 여동생은 그걸 버티지 못했어. 오랫동안 사랑만 받고 살아와서, 사람들의 혐오를 버텨내지 못한 거야.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어. 정말.......다들 힘들게 살았구나.”

 

 지혜는 회장을 꼭 안아주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지. 죽은 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거든. 게다가 몇몇 임원들은 내가 회장이 될 자격이 없다고 수군댔어. 난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했어. 당연히 연애나 결혼 따위는 할 시간도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형과 같은 꼴이 되고 싶진 않았어. 어쩌면 모든 여자들이 싫어진 걸지도 몰라. 다행인 건 부하 직원들 중에 머리가 좋은 녀석들이 많았다는 거야. 그들에게 중요한 업무를 맡기고, 난 적당히 조율해주는 역할만 해도 회사는 잘 굴러갔어. 여기에 더해 가끔씩 기어오르는 애들은 내쫓아주고. 결국 내가 회장 자리에 오를 때쯤에는 별 말이 없었지.”

 

 “잘 했어, 이제까지 정말 열심히 살았네, 우리 회장님.”

 

 지혜는 회장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회장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잠에 들었다. 그가 완전히 잠에 든 것이 확인되자, 그녀는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그녀에게 시스템 일시 정지 명령이 내려졌다.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프로토타입 1호. 이제 충전하러 가도 좋습니다.”

 

 그녀의 눈 너머의 화면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 외에도 서너 명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그녀의 행동과 회장의 상태를 관측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봇이 제대로 회장과 유대 관계를 맺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부족한 부분을 교육하기도 했다.

 

 로봇이 절전 모드에 들어서자, 오퍼레이터들은 마침내 휴식 시간을 갖게 되었다.

 

 “제대로 되고 있는 걸까?”

 

 오퍼레이터 하나가 말했다.

 

 “모르지. 윗사람들은 다 계획대로라고 하는데.......저러다 갑자기 치매라도 걸리면 상속자도 못 정하는 거잖아.”

 

 “이사님이 알아서 하겠지.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돈이나 받으면 돼.”

 

 한편 이주영 이사는 자신의 자택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로봇이 보내온 영상 자료를 검토했다. 그는 로봇을 통해 회장의 마음을 조종하는 임무를 맡았다. 물론 설득만으로는 안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이 이사는 김 전무나 부하직원들 앞에서는 성공을 자신하면서도, 혹시나 계획이 실패하지는 않을까 불안해했다. 하지만 일단 일을 시작한 이상, 그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2028년 11월 12일

 

 회장은 갈수록 몸이 더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자는 시간만 12시간이 넘어갔다. 깨어 있을 때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먹는 양도 줄어들었다. 이미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게 일상이 됐다.

 

 그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막상 그 때가 다가오자 그는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멍하니 소파에 앉아서 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이 없는 그룹의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회장은 이제 10조원이 넘는 돈의 행방을 결정해야만 했다. 국가에 귀속시킨다면 대중은 좋아하겠지만 정치인들이 뜯어가고, 재단을 만들어 그곳에 기부한다면 시민단체에서 뜯어갈 것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게 누구인지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회장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100% 신뢰하지 않았다. 가족이 모두 죽은 이후로, 제 아무리 앞에서 빌빌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믿지 않았다.

 

 돈이 많으면 살기 편하다는 건 다 거짓말이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 위한 투쟁은 더 거칠어지는 법이었다. 회장은 과거 자신의 가족이 겪었던 것과 같은 비극이 앞으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인간의 치졸한 본성이 아닌, 냉철한 지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를 꿈꿨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살펴보았고, 각각의 경우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밤낮으로 고민했다. 시간이 지나고 그는 마침내 답을 내렸다.

 

 “유자차를 타 봤어. 뜨거우니까 천천히.”

 

 지혜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회장은 태블릿으로 직원들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야. 이제 나 없이 회사를 운영해야 할 사람들.”

 

 회장은 직원 몇 명의 인적사항을 복사해 새로운 폴더에 집어넣었다.

 

 “이 사람들이 수호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거야.”

 

 지혜는 태블릿에 뜬 얼굴들을 찬찬히 살폈다. 대부분은 기초 적응 훈련때와 저번 회의에서 본 사람들이었고, 일부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기대되네. 네가 직접 선정한 사람들이니 잘할 거야.”

 

 지혜가 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유산을 누구한테 줄지도 결정했어.”

 

 “정말? 그 많은 돈을 누구한테 주게?”

 

 “......너에게 줄 거야.”

 

 회장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지혜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그래?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잖아. 임원들 대다수는 쓸데없이 회장 자리를 두고 싸울 바에는 너에게 맡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내 곁에서 마지막까지 있어주는 사람은 너야.”

 

 “네 생각이라면 난 항상 찬성이야. 하지만 괜찮겠어?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하는 건데, 뭐. 그리고 남들이 반대하건 말건 내가 죽은 뒤에니깐 내 알 바 아니지. 조만간 유언장을 써야겠어.”

 

 “어려운 결정을 했네. 하지만 솔직히 난 걱정돼.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말야.”

 

 “어차피 실질적인 경영은 전무를 비롯한 아랫사람들이 다 해줄 거야. 너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걸.”

 

 로봇은 회장에게 인사를 한 뒤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한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종 목표가 달성된 상황에 대해 오퍼레이터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로봇의 눈과 이어지는 화면 앞에 있던 다섯 명의 직원들은 환호했다.

 

 “방금 들었어? 회장이 로봇에게 재산을 넘기겠다고 했어! 내가 똑똑히 들었다고!”

 

 “이게 될 줄은 몰랐네. 설마 정말로 기계가 회장님의 상속자가 될 줄이야.”

 

 “예상보다 결정이 빨랐네. 설득에 최소한 2주는 더 걸릴 거라고 하더니……”

 

 “아무렴 어때. 이제 상속이 끝나고 성과급만 받으면 이 지긋지긋한 야근도 다 끝이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성과에 약간은 당황했지만, 어찌되었든 일이 자기들 뜻대로 풀렸다고 생각했다.

 

 오퍼레이터 한 명이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수고했습니다. 프로토타입 1호. 세뇌 작전을 종료합니다. 이제 그가 죽을 때까지 옆을 지키십시오.”

 

 로봇의 활동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던 오퍼레이터들은 이 기쁜 소식을 이주영 이사에게 알렸다. 그 역시 김학성 전무에게 전화를 걸어 승리의 소식을 전했다.

 

 “김 전무님, 방금 소식 들으셨습니까?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괜히 정부에 돌려주겠다고 말할 까봐 겁났는데.......미인계가 통했습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20년 넘게 고생한 보람이 있네. 그래도 상속이 완료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아. 특히 여론의 반대가 심할 거란 말이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항상 주의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전무님. 가능한 한 빨리 상속 관련 법무팀을 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주영 이사는 마침내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김 전무가 그 많은 돈을 상속받게 된다면, 이 이사의 삶도 한층 더 나아질 것이 분명했다. 로봇은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한 성과를 냈다.

 

 그는 가정부 로봇이 가져올 미래를 상상했다. 모든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주고, 연인이나 가족 노릇까지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굳이 결혼이나 동거를 할 필요도 없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 로봇들을 대량으로 찍어낸 뒤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성격과 외모를 재조정한다면, 사실상 사람들의 마음을 지혜와 같은 로봇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김 전무와 자신이 한국의 진정한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2028년 11월 23일

 

 벌써 또 하루가 지나갔다. 회장은 이제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죽어가는 남자를 재우기 위해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바깥은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진 뒤였다.

 

 “잘 시간이야, 회장님.”

 

 지혜는 열을 잰 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럼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 거야?”

 

 “오늘은.......그냥 가줘.”

 

 회장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냥. 혼자 있고 싶어.”

 

 그녀의 시스템은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제 그 순간이 1년, 1달이 아닌 고작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회장의 얼굴은 이미 시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몸에 장착된 센서는 한때 한국 최고의 부자였던 남자의 심장이 곧 작동을 멈춘다고 말하고 있었다.

 

 “싫어.”

 

 그녀가 말했다.

 

 “네 옆에 있고 싶어. 헤어지고 싶지 않아.”

 

 지혜는 불을 끄고 그의 옆에 누웠다. 따스한 촉감이 회장의 온 몸에 전해져 왔다.

 

 “굳이 내 마지막을 지켜볼 필요는 없어. 주치의와 간호사들을 부르면 그들이 알아서 해결할 거야.”

 

 “그런 말 안 했으면 좋겠어. 죽는다느니 이제 끝이라느니……”

 

 “그래, 그럴게.”

 

 지혜는 지그시 회장을 바라보았다. 회장은 자신의 삶이 끝나는 순간 그녀가 옆에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느꼈다.

 

 “난 무서워.”

 

 회장이 말했다.

 

 “죽는 거?”

 

 “그래. 죽는 거.......아직 인생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했는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걸까.”

 

 그녀는 회장을 천천히 품에 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냄새가 났다.

 

 회장은 그녀가 함께했던 짧은 시간이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인간도 주지 못했던 행복을 로봇이 준 것이다. 적어도 회장에게 있어서 지혜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인간적이었다.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분명 천국에 갈 수 있을 거야.”

 

 지혜가 회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도 좋은 사람이야.”

 

 회장이 대답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회장은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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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리더의 조건 - 6 9/17 334 0
19 리더의 조건 - 5 9/17 302 0
18 리더의 조건 - 4 9/15 310 0
17 리더의 조건 - 3 9/15 298 0
16 리더의 조건 - 2 9/14 305 0
15 리더의 조건 - 1 9/14 383 0
14 정리해고 - 3 9/11 292 0
13 정리해고 - 2 9/11 31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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