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3월 20일
로봇 정비실에 3명의 관리자들과 이주영 이사가 모여 있었다. 지혜는 절전 상태로 그들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 사기꾼 집단은 로봇으로 하여금 직원들을 해고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짰다. 그들은 지혜를 더 이상 회장대리가 아닌 완전한 수호그룹의 회장으로 만들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회장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직원들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 전무는 이 이사와 함께 해고 명단을 짰다. 거기에는 강재욱 상무를 비롯해 평소 김 전무에게 비판적이었던 자들, 애 키운답시고 출산휴가나 연차를 꽉꽉 채워서 쓴 사람들, 몰래 노조를 후원했던 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명단을 만들어 USB에 저장했다.
로봇의 소프트웨어 관리자 데이빗 캐슬은 김 전무에게 로봇의 조종과 관련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특히나 캐슬은 전무가 로봇을 조종한다는 사실이 밝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전무는 그 점에 별로 주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이제 내 말 한 마디면 곧바로 해고가 가능하다는 거군. 그렇지?”
김 전무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네, 전무님의 지시를 해석한 뒤,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찾아냅니다.”
캐슬이 말했다.
“역시 공화당 친구들이 일은 잘 해. 그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기업들이 해고도 제대로 못했을 거야. 쓸모없는 녀석들은 빨리 잘라버려야 회사가 돌아가지. 안 그래, 박 부장?”
“……그렇습니다.”
박 부장이 조용하게 대답했다.
“자네 표정이 어디 안 좋아 보이는데? 아픈 데라도 있어?”
“아닙니다. 전 멀쩡합니다.”
캐슬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박 부장이 무언가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전무님, 알아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뭔데?”
“로봇은 사람처럼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인간의 관점에서 로봇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로봇에게 명령을 내릴 때는 반드시 논리적으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그래, 나도 알아. 어찌되었든 내 말에는 절대복종 한다는 말이잖아.”
캐슬은 김 전무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더 이상 그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 이제 명령을 내리겠다. 로봇을 깨워라.”
이주영 이사가 서지혜를 절전 상태에서 깨웠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지혜가 말했다.
“너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리겠다.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명령이다.”
“말씀하십시오.”
전무가 USB칩 하나를 그녀의 머리 뒤에 꼽았다. 상태 모니터에 그녀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왔다.
“지금 너의 머릿속에 전송한 정보는 두 개의 명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는 정리해고 명단이다. 이들은 수호그룹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작자들이니, 망설이지 말고 신속하게 해고해야 한다. 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고 과정에서 두 번째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명단의 사람들은 나를 비롯한 내 부하 직원들이다. 이들에게는 절대로 피해가 가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나?”
지혜는 잠시 동안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의 머릿속의 모든 정보가 업데이트되었다.
“명령을 이해했습니다. 다만 해고 작업을 수행할 경우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는 데, 정말로 이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시겠습니까?”
지혜가 말했다.
“물론, 물론이지. 절대로 봐주지 마라. 이 회사에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은 망설임 없이 쓸어버려야 해.”
“그렇다면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곧 명단에 대한 해고 절차를 집행하겠습니다.”
김 전무가 기분이 좋은 듯 크게 웃었다. 이 이사 역시 옆에서 그를 아부했다. 박 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2029년 4월 1일
직원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오늘은 정리해고 대상자가 발표되는 날이다. 서지혜, 즉 인간이 아닌 로봇이 회장의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수호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은 김학성 전무가 되었다. 그 로봇의 육체와 정신은 이사회에서 선정한 관리자에 의해 언제라도 바뀔 수 있었고, 그 관리자들은 모두 김학성 전무의 지시를 받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회사 내에서는 그 가사로봇은 사실상 김 전무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직원들은 김 전무를 두려워했다. 그는 열정적이고 유능했지만, 한편으로는 강압적이고 오만한 면이 있었다. 그는 종종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시도했다가 회사에 수천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힐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정재현 회장이나 다른 부하직원들의 수습으로 무사히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를 제어할 사람은 이 회사 내에 없었다. 김 전무는 인건비 감축을 명목으로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을 내쫓은 적이 많았고, 이제 그 스케일이 대폭 커진 것이다.
정리해고 대상자는 무려 15,000명으로, 그룹 전체의 직원 80,000명의 약 19%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여기에는 노조에 적극 참여한 직원들, 회사내의 단합을 위한 워크숍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은 직원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말근무를 빠진 직원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자신이 해고될 것이라고 직감한 직원들은 명단이 나오기도 전에 짐을 싸고 있었다. 어차피 잘리는 게 확실해진 이상, 괜히 회사에 따지기보다는 하루 빨리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게 이득이리라.
김학성 전무와 그의 비서들이 수호그룹의 본진인 수호전자 본사에 입장했다. 비서들은 지시 받은 대로 사내 게시판에 해고 대상자 명단을 게시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의 불안은 절정에 이르렀다. 몇몇은 상사에게 이런 식으로 해고를 해도 되냐고 항의했으나, 상사들 역시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띄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을 귀찮게 하던 사람들을 전부 내쫓게 된 것이다. 이제 수호그룹은 그의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회장처럼 무생물에게 재산을 물려주거나 국가에 반납할 계획이 없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대대로 이 그룹을 물려줄 생각이었다. 이미 그의 장남은 수호전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식을 낳지 않고 로봇에게 재산을 물려준 것은 분명 회장 본인의 선택이다. 그리고 법적으로 나는 그 로봇의 관리인이 되었다. 사실상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선택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김 전무는 기다란 복도를 지나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옆의 마케팅 부서의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분노하고 있었다. 분명 그들은 해고가 확정된 자들일 것이다. 한심하긴. 그러게 누가 내 눈 밖에 나라고 했나?
“왜 이리 소란스럽죠?”
지혜의 등장에 사무실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직원들은 갑작스런 회장대리의 등장에 다들 당황해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김 전무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저게 왜 여기에 나타난 거냐. 분명 내 지시 없이는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설정을 해두었을 텐데……’
직원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서지혜……회장대리님?”
“오늘부터는 그냥 회장입니다. 직원들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수십 명이 넘는 사원들이 그녀 앞으로 모였다. 그들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로봇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다.
“와, 진짜 사람 같아. 우리 회사에서 이런 걸 만들 수 있었나?”
“조용히 해, 저래 뵈도 지금 회장이나 마찬가지라고.”
직원들이 지혜를 보고 수군댔다. 지혜는 그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어색하다는 건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여러분들께 전해드릴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마 오늘 아침 해고 소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몇몇 직원들은 이미 해고 통보를 받았을 수도 있겠지요. 그 지시는 무시하십시오. 제가 새로운 해고 대상을 선정했습니다. 새로운 명단은 곧 회사 전체에 공지될 것입니다.”
직원들이 당황했다. 안 그래도 해고 문제로 시끌시끌한데 갑자기 새로운 해고 명단이라니.
“저기……회장대리님?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직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새로운 명단이 나온다고 하셨는데……무슨 기준으로 해고 대상자를 선정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음, 그 부분을 알려주지 않았군요. 해고의 기준은 현 시점에서 회사에 불필요한 사람들 입니다. 제품 개발이나 홍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을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웹 사이트에 올라온 공지사항을 통해 확인하세요.”
직원들은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공지사항
밤낮으로 수호그룹을 위해 애써 주시는 모든 임직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새로 취임한 서지혜 회장이라고 합니다. 아마 제 이름을 뉴스에서 한 번쯤 들어본 분도 있을 테고,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회장님의 투병생활을 옆에서 돕던 가사로봇 이었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는 최종적으로 저에게 재산을 상속하셨습니다.
수호그룹의 임시 회장대리가 되고 나서, 저는 이 회사에 대해 이런저런 공부를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분야에서 지속적인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비효율적인 업무 처리는 대기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새로운 회장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수호그룹의 전체 직원 중 총 1021명을 해고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상당한 연봉을 받지만 회사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는 사람들로, 오직 인맥과 정치질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들 역시 과거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격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냉정해져야 합니다. 해고당한 분들도 제 뜻을 이해하길 바랍니다.
해고 명단은 첨부 파일에 나와 있습니다. 그 명단에 나와 있는 분은 각 계열사의 인사팀에 연락해 퇴직금을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기존에 여러분들께 전달되었던 해고 명단은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직원들은 명단을 확인했다. 예전 김 전무의 해고에 비하면 그 수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직원들은 해고의 칼바람으로부터 안전했다.
“살았다! 나 살았어!”
“다행이에요. 예전 명단에는 들어가 있었는데……”
“회장님이 절 살려 주셨습니다. 정말 해고당하면 어쩌나 눈앞이 캄캄했는데……”
건물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직원들은 새로운 회장에게 감사하며 일을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왜 다들 좋아하는 거야?”
김 전무는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옆의 직원들을 캐물었다.
“저, 전무님……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이사가 전무에게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해고 대상자의 명단이 나타나 있었다. 그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명단 중간쯤에 있는 이름들을.
“김……학성? 나? 내가 해고 대상자라고?”
“저도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명단에 따르면 저희가 해고되나 봅니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대체 누가 이런 명령을 내린 거야!”
김 전무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근처를 지나가는 직원들은 애써 그를 모른 척 했다.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만, 일단 여기에는 회장대리님이 직접 결정을 했다고……”
“그게 말이 되냐고! 걔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건데?”
“전부 회사를 위해서 입니다, 전무님.”
지혜가 그에게 다가왔다.
“너……이게 무슨 짓이냐.”
“전 회장으로서 누구든지 해고할 권리가 있습니다. 법적으로도 문제는 없습니다.”
“이 개 같은 년이……”
김 전무는 당장이라도 저 지혜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다른 직원들은 그가 원래 지혜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로봇이 반란을 일으킨 이 상황 속에서도 속으로 분노를 삭힐 수밖에 없었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지혜가 그에게 봉투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 안에 해고 시에 지켜야 할 법적인 수칙들이 담겨 있습니다. 퇴직금은 이번 주 내로 지급될 것입니다.”
김 전무는 최대한 냉정을 찾으려 애썼다. 그는 일단 자신 휘하의 로봇 관리팀에 연락했다.
“관리팀, 비상사태다. 회장대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보조 관리자 중 한명인 김연지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무님? 로봇이 반란을 일으켰단 말입니까?”
“그래, 믿기지 않겠지만, 저 로봇이 나를 해고한다고 한다. 오류가 생긴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나한테 반란을 일으킨 건지는 몰라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 빨리 애들 보내서 정비실로 끌고 가라.”
연지는 곧바로 현장 수리 요원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김 전무는 안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이나마 로봇에게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했다는 것에 무척이나 불쾌해 했다.
이주영 이사는 사내 인트라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보고 있었다. 해고 소식이 알려진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수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이런……이런 엿 같은 일이……”
웬만해서는 험한 말을 쓰지 않는 이 이사의 입에서 거친 욕이 튀어나왔다. 옆에 있던 전무도 같이 그 글들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