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4월 4일
수호전자의 강당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강당 위의 현수막에는 ‘신임 회장의 취임을 축하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강당의 맨 앞자리에는 박병헌 부장을 비롯한 보조 관리자들이 차지했고, 그 뒤로 수호그룹의 주요 임원들이 앉았다. 나머지 자리에는 신임 회장을 보고 싶어 하는 직원들이 앉았다. 데이빗 캐슬은 취임식에 관심 없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서지혜는 연단 앞으로 나왔다.
“지금부터 신임 회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수호전자, AL테크, 수호케미칼, 세리아몰에 근무하는 모든 임직원 여러분. 모두들 알다시피, 저는 로봇이자 동시에 돌아가신 정재현 전 회장님의 후계자이기도 합니다. 제가 만들어진 목적은 인공지능의 지식을 활용해 사람들을 돕는 것이고, 저는 지금 그것을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직원들은 로봇의 말솜씨에 적잖이 놀랐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인간이 로봇인 척 하고 있다고 믿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저는 회장대리로서, 로봇 관리자와 임원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거수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이제부터는 직접 경영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로봇이 회사를 경영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계신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전 여러분들께 약속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합리성과 논리에 기반한 경영을 통해, 수호그룹을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그리고 영상을 통해 저를 보고 계신 직원 분들에게 부탁합니다. 힘을 합쳐 수호그룹의 미래를 만들어 갑시다!”
직원들의 박수 소리가 강당 안을 가득 채웠다.
취임식이 끝나고 다과회가 열렸다. 웨이터들은 달콤한 케이크와 와인을 들고 임직원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박 부장이 신임 서지혜 회장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늘따라 더욱 늠름해 보이십니다.”
“고마워요. 부장님도 멋있어 보이네요.”
지혜가 웃으며 답했다. 한편 구석진 곳에서는 몇몇 임원들이 모여 수군대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 지혜가 정재현 전 회장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의외로 해고 대상에서는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사회의 신임도 받지 않고 회장 취임식을 올리다니. 아무리 정재현 회장님의 후계자라 해도 이건 월권행위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조만간 김 전무님처럼 짤리는 겁니까?”
한 임원이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저 로봇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죠. 애초에 생각이란 걸 하긴 하는 겁니까?”
다소 뚱뚱한 다른 임원이 말했다. 그는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저기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로봇을 조종한다던데, 저 사람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그가 박 부장을 가리켰다.
“박병헌 부장이었나, 아마 그럴 겁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저 사람은 원래 김 전무한테 고용된 사람이었는데, 로봇을 몰래 조종해 반란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던 강재욱 상무가 말했다. 그는 손으로 박 부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치겠네……난 아직 주택 대출도 다 못 갚았다고. 자식들 대학 등록금도 대야 하는데……”
또 다른 임원이 탄식했다. 강 상무는 어떻게든 이들의 마음을 다잡아주려 했다.
“벌써부터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김학성 전무와 그의 측근들이 해고당하면서 저희가 승진하기에는 더 유리한 상황입니다. 즉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그때 서지혜 회장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앗, 이쪽으로 온다!”
뚱뚱한 임원이 속삭였다. 그는 먹던 케이크를 급하게 입에 털어 넣었다.
“안녕하세요?
회장이 웃으며 인사했다. 세 명의 임원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아,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강 상무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회장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로봇 CEO라니, 저희 수호그룹이 변화를 선도하는 회사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모두들 반가워요. 회사를 위해 일하느라 고생이 많네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임원들은 동시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들은 회장에 대해 궁금한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가 김 전무처럼 짤릴 것이 두려웠다.
“왜 그래요? 혹시 제가 너무 어려우신가요?”
“저기, 회장님……”
한 임원이 총대를 맸다.
“절대로 회장님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만, 혹시 저희도 조만간 해고되는 건 아닐까 걱정됩니다. 그……회장님께서는 김학성 전무님의 파벌을 대부분 해고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그 사이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언제 짤릴지 몰라 전전긍긍한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채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러분은 그게 걱정되나 보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제가 너무 과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해고가 된 사람들은 꼭 김학성 씨의 파벌이라서가 아니라, 회사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직장 또라이’들을 걸러낸 거죠. 제 통계에 의하면, 여러분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아요.”
임원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회장이 적어도 당분간은 그들을 해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연신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대신 이제부터는 더 열심히 일해 주셔야 해요. 여러분한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으니까요.”
임원들은 회장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지만, 현재로서는 그녀에게 기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김 전무는 잊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2029년 4월 5일
캐슬은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출근했다. 그는 요 며칠 사이 일어난 일들에 대해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회사에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가 컴퓨터를 키고 그날의 업무 목록을 살펴보고 있는데, 박병헌 부장의 부하직원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와 서류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는 몇 주일 전까지만 해도 캐슬의 옆에서 그의 알고리즘 설계를 돕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데이빗 캐슬은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직감했다. 자세한 내막은 그 역시 알지 못했지만, 박 부장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김 전무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 역시 박 부장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만큼 해고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캐슬 씨.”
“네, 좋은 아침입니다.”
캐슬이 대답했다.
“저기, 캐슬 씨. 전할 말이 있는데……”
“그 봉투 안에 든 거 말하는 거죠?”
캐슬이 직원의 말을 끊었다.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이제 그만 회사에서 나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데이빗 캐슬의 퇴직 처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가 회사에 필요하다며 해고에 반대했지만, 캐슬은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굳이 한국에 더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좋아했던 직원들과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김학성 전무와 이주영 이사, 그리고 그들의 부하들은 갑작스러운 해고에 맞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전무의 집에 모였다.
“믿을 수가 없어. 로봇에게 해고를 당하다니. 대체 어쩌면 좋지?”
“로봇은 단독으로 해고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즉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이주영 이사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분명 유언에 따르면 경영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3명의 관리자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만 합니다. 전무님께서는 당연히 반대표를 던질테고, 결국 박 부장과 민혁 씨 둘 중에 한 명이라도 해고에 반대한다면 결정은 그대로 취소될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 근데 왜 그 망할 로봇은 날 내쫓은 거야?”
“우선 현행법에 따라 회장으로부터 해고당할 경우 일반 업무에서는 바로 배제됩니다. 아마 서지혜의 과격한 행동 역시 이를 염두에 둔 것일 겁니다. 하지만 관리자라는 직책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아직은 수호그룹의 일원인 상태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김 전무는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직 해고가 취소된 건 아니지만, 박 부장과 민혁이 그 깡통 로봇을 따라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둘을 만나봐야겠군. 이 이사, 관리자들은 언제 모일 수 있지?”
“로봇이 결정을 내린 뒤 바로 소집이 가능합니다. 빠르면 다음 주 쯤에 모일 수 있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그의 지시에 부하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학성은 로봇의 반란에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이번 사태를 별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있는 동안 별의별 사건을 다 겪은 그로서는, 이 정도 일은 그리 무섭지 않았다.
2029년 4월 6일
캐슬이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때, 다른 곳에서는 승진 축하식이 열리고 있었다. 조민혁 선임 프로그래머는 소프트웨어 관리자가 해고당하면서 난데없이 주 관리자로 승진하게 되었다.
“축하드려요, 이제 제 상관이 되셨네요.”
연지가 그에게 작은 상자를 주었다.
“고맙습니다. 이건 뭐예요?”
“스킨, 로션이요. 일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도 챙겨야죠. 피부가 너무 푸석푸석해졌어요.”
다른 관리자들도 한마디씩 축하의 말을 건넸다. 민혁은 고마워하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그때 박 부장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축하해, 민혁 군. 마침내 나와 같은 직위가 되었구나.”
“감사합니다, 부장님. 그런데 갑자기 제가 왜 이 자리에 오른 건지……회장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까?”
민혁이 물었다.
“그래. 캐슬 씨가 해고당한 건 유감이야. 하지만 그는 회사에 별 애정이 없었어. 그렇기에 해고를 당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냉정하게 생각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열정이 있는 사원이야.”
“솔직히 좀 걱정됩니다. 새로운 회장님 바로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아. 이미 만들어진 로봇의 A/S만 하면 되는 거잖아. 나도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는데, 막상 몇 번 해보면 익숙해질 거야.”
“하지만 전 여기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캐슬 씨는 세계 최고 수준의 천재지만, 전 아닙니다. 그 방대한 양의 코드를 확인해볼 만한 능력이 저에겐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하고 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원래 그렇게 무책임한 분이 아닌데, 왜 그런 식으로 가버린 건지……”
“캐슬이 뛰어난 사람인 건 맞지만, 굳이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할 필요는 없어. 말했다시피, 업무 자체는 의외로 단순할 거야. 인수인계를 안 한 것도 그것 때문이겠지.”
관리자들은 자신의 업무를 하러 하나 둘 떠나갔다. 사무실에 둘만 남게 되자 민혁은 속마음을 꺼냈다.
“부장님, 김 전무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 해고됐으니 조만간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넣겠지. 아니면 회장님이 직접 경영에 나선 만큼 별도의 재산 관리자를 설정하지 않을 수도 있고.”
부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도 오랫동안 일했던 분인데……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실감이 안 납니다. 굳이 해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회장님이 판단할 일이겠지. 너도 알고 있겠지만, 김 전무님이 해고되는 걸 반기는 사원들이 꽤 많아. 물론 나는 그분이 떠난다는 게 많이 아쉬워. 만약 내가 회장 위치에 있었다면 그분을 해고하지 않았을 거야. 다만 지금 수호그룹의 리더는 어디까지나 서지혜 회장님이고, 그분은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 결정을 내린 거야. 캐슬 씨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로봇이 직접 경영을 한다는 거에 사람들이 쉽게 익숙해질 것 같지 않습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미 미국에서는 중간 관리자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지.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은행에서 인공지능 평가 시스템을 도입했고. 단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너에게 어색하게 느껴진 거야.”
“부장님은 새로운 회장님을 많이 신뢰하시는 것 같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꽤 유능하지. 너도 몇 번 만나보면 좋은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걸.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난 먼저 올라가 있을 테니까, 너도 주 관리자로서의 업무를 준비해라. 오전 10시에 회의 있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민혁은 박 부장이 어딘가 활기차 보인다고 느꼈다. 직속 상관이 해고되었는데도 별로 슬퍼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지금 민혁은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당분간 그는 남의 일에 신경을 끄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