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4월 10일
민혁은 주 관리자로 부임한 뒤 첫 임무를 맡았다. 그것은 바로 회장을 직접 찾아가 그녀의 정신을 검사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집은 과거 정재현 회장이 살았던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녀가 사는 마을은 부자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곳으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입구까지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차들과 사람들로 인해 시끄러웠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가끔씩 집을 오고 나가는 값비싼 고급차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자 회장의 저택이 보였다. 민혁이 초인종을 누르자 자동으로 대문이 열렸다. 마당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한쪽에서는 분수가 물을 뿜고 있었다. 그는 로봇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큰 집이 필요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오세요.”
민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혜는 목욕 가운만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순간 당황하여 다시 나갈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애써 침착한 척 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민혁은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는 미국에서 인공지능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종류의 인공지능은 합리성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다룬다고 들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바로 지금 로봇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가워요. 제가 누군지는 알고 있죠?”
“이번에 새로운 소프트웨어 관리자로 부임 받은 조민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민혁은 한마디의 자기소개를 한 뒤 계속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우선 간단한 검사를 실시하겠습니다.”
“지금요?”
“앗, 네. 혹시 불편하시다면 나중에 다시 와서……”
“아니에요. 할 일은 미리미리 해두는 게 좋죠. 소파에 앉아 있어도 괜찮을까요?”
“네, 제가 소파 뒤쪽으로 가겠습니다.”
민혁은 그녀의 가발을 떼어낸 뒤, 머리 뒤쪽의 뚜껑을 열고는 그곳에 작은 코드를 꼽았다. 노트북에 그녀의 신체와 정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각종 그래프가 떴다.
“어때요? 괜찮다고 나오나요?”
“네,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모든 수치가 정상입니다.”
“다행이네요.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됐는데.”
민혁이 코드를 뽑자 지혜가 살짝 몸을 앞으로 숙여 가발을 다시 썼다. 민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가슴골이 보았다. 그는 급히 시선을 돌려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표정이 굳은 거 같은데.”
“아닙니다. 전 멀쩡합니다.”
“아무래도 로봇이랑 같이 있는 게 어색하긴 하겠네요. 그래도 절 너무 무서워하진 말아주세요.”
지혜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민혁은 애써 그녀의 눈을 피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라도 한 잔 드실래요?”
“커피……말입니까? 혹시 커피를 직접 타시는 건지……”
“복잡한 회사일도 하는데 커피 정도는 당연히 탈 수 있죠. 잠깐만 여기 있어요. 아, TV보고 싶으면 봐도 돼요.”
그녀가 주방으로 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민혁은 뉴스 채널을 틀었지만, 자꾸만 시선이 주방 쪽으로 향했다. 로봇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람 같았다. 회사에서 봤을때는 사람을 꽤나 잘 흉내내긴 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모습이 조금씩 보였는데, 집에서의 모습은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몇 분이 흐르고 그녀가 커피와 쿠키 몇 개를 가져왔다.
“드세요. 초코칩 쿠키 좋아하시죠?”
“혹시 회장님도 이걸 드십니까?”
“푸흡, 뭐라고요?”
지혜가 웃음보를 터트렸다. 민혁은 얼굴이 빨갛게 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가 이런 걸 어떻게 먹어요. 저한테 소화기관이 있을 리 없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멍청한 소리를……”
“아니에요, 귀여운 질문이었어요. 그래도 다른 데 가서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민혁은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그녀와 같이 웃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깊은 원두향이 코 깊숙이 들어왔다.
“어때요? 로봇이 타주는 커피가.”
“맛있습니다. 과학적인 맛이 납니다.”
민혁은 회장이 자꾸만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회장의 얼굴을 보고 싶기는 했지만,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자꾸만 시선을 돌렸다.
“조금 신기한 것 같습니다.”
“어떤 면이요?”
“그게……회장님께서는 너무 사람 같으십니다. 학교 다닐 때 똑똑한 인공지능은 여럿 봤지만, 이 정도로 사람 같은 로봇은 처음입니다.
“스스로 생각 한다라……적어도 전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은 없다고 배웠어요. 제가 살아있는 건 어디까지나 돌아가신 전 회장님을 섬기기 위함이었고요. 어쩌다가 보니 부자로 살아가게 되었지만, 사실 생각한다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민혁은 지혜가 이 정도의 문장력을 구사한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다. 그는 어쩌면 이 로봇이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똑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혹시 힘든 일 있으면 저한테 말하세요. 민혁씨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있죠.”
“딱히 힘든 일은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오면 하루 종일 바쁠 줄 알았더니, 회장님 검사하는 거 말고는 할 일이 없으니……”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래도 너무 참기만 하면 안 돼요.”
민혁은 이 이상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는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나가려 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혹시나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십시오.”
“벌써 가게요? 좀 더 있어도 되는데……”
“죄송합니다. 저도 지금 바빠서요. 주 관리자가 되고 나니까 할 일이 늘어났네요.”
“알았어요. 그럼 잘 가요. 앞으로 시간 나면 종종 놀러 와도 돼요. 최종 관리자는 그럴 권한이 있어요.”
민혁은 곧바로 현관문을 향해 가다가, 문득 자신이 컴퓨터 가방을 챙겨 나오지 않은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바닥만 쳐다본 채 곧바로 가방을 챙겼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집 바깥으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난 뒤에도 두근거리는 느낌이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2029년 4월 16일
그 후로 민혁은 일주일에 두 번씩 회장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마다 회장은 자신이 겪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고, 가끔씩은 그녀가 직접 요리를 해 대접하기도 했다. 민혁은 그러한 호의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그녀의 모습과 행동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그녀는 단순히 외모만 아름다운 수많은 인간 여성과는 달리, 지적인 측면에서도 흠 잡을 곳이 없었다. 회장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여자였다. 그는 만약 그녀가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회장을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민혁은 회사에 출근해서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로봇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컴퓨터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었다. 뉴스 등지에서 로봇 리얼돌이 나온다고 했을 때도 그는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신념과 욕구 사이에서 인지부조화를 일으켰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회장에게 정욕을 품은 것이 아니라고 믿었고, 회장을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업무를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오늘도 사무실에서 언제쯤 그녀의 집에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연지가 그에게 다가왔다.
“민혁 씨, 혹시 지금 시간 되나요? 민혁 씨에게 따로 해줄 말이 있어요. 저번 해고에 관한 이야기예요.”
“해고요? 아, 저번에 김 전무님이 해고되었던 그때 일 말하는 겁니까?”
“네, 사실 해고가 완벽히 실행된 건 아니에요. 즉 김학성 전무님을 비롯한 사람들은 아직 수호그룹의 직원인 상태란 거죠.”
“어째서죠? 전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유언장 때문이에요. 돌아가신 정재현 전 회장님의 지시에 따르면, 로봇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반드시 세 명의 주 관리자의 투표를 통해 로봇의 결정에 찬성할지, 반대할지를 결정해야 해요. 그 말인 즉슨 박 부장님과 민혁 씨가 해고에 동의해야 정말로 해고가 시행된다는 말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설마 해고 결정을 내리는 게 저라는 말입니까?”
“네. 데이빗 캐슬 씨는 해고 지시를 받자마자 바로 회사를 나가 미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결정권을 쥔 것은 바로 민혁 씨가 되는 거죠.”
“너무 큰 결정이라 정하기가 쉽지가 않을 것 같군요. 혹시 박 부장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네. 제가 같은 말을 했더니, 본인은 일단 전무님을 지지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회장님이 좋은 분인 건 맞지만, 김 전무님께 신세진 게 많아 어쩔 수 없다고요. 민혁 씨는 어떤데요?”
“잠깐만……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대체 저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시간은 충분하니까 천천히 생각해봐요. 2주 뒤에 관리자들의 최종 투표가 있거든요.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김 전무님께서는 두 분이 모두 본인의 편을 들기를 바라고 계세요.”
그는 이번 임무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승진이 되었을 때는 그래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사실상 수호그룹의 주인을 결정할 권한이 그의 손에 쥐어진 셈이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비난 받을 것이 분명했다.
‘김 전무에게 물어봐야 하나?’
그는 휴대폰을 들었지만, 잠시 후에 다시 내려놓았다. 이해관계자에게 연락하는 것은 아무래도 안될 일 같았다. 그 대신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연지 씨는 어떻습니까?”
“저요? 제가 해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거예요?”
“네. 저는 처음 주 관리자로 승진했을 때 이런 일은 안 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학창 시절 내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해본 적도 없었고……연지 씨가 저라면, 여기에 찬성표를 던질 겁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김 전무님이 해고되는 건 잘됐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 솔직히 나이도 너무 많고 꼰대 기질이 좀 심했잖아요.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알거든요. 근데 로봇이 사람을 해고해도 되냐고 생각 하냐면……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지금 직원들이 서 회장님 좋아하는 것도 결국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잘려서 그런 거잖아요. 정말로 로봇이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해고한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조종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오류를 일으켜서 그런 건지 제 입장에서는 알 방법이 없죠. 민혁 씨라면 그분의 코드를 들여다볼 수 있으니 괜찮겠지만.…..그래도 역시 불안해요.”
민혁은 그 말을 듣고 더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연지는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한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민혁 씨 본인이 가진 권리를 쓰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굳이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이럴 때는,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민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여전히 어떤 표를 던져야 할지 정하지는 못했지만, 한결 부담감이 덜해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연지 씨 덕분에 항상 많은 도움을 받네요.”
“정 고마우면 밥이라도 한 끼 사요. 민혁 씨는 회식도 안하고 맨날 집에 가서 책만 읽잖아요. 가끔씩은 사람들과 어울릴 줄도 알아야죠.”
연지가 살짝 웃으며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거 좋죠. 오늘 저녁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