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혁이 가진 문제점 중 하나는 여자와 대화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최고의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연지를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단지 평범한 밥 한 끼면 충분했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연지의 예상대로,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민혁이 여전히 여자 다루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요? 승진하고 나서 업무 외에는 도통 만날 일이 없으니까……”
연지가 물었다.
“사실은 가끔씩 회장님 집에 갑니다. 이런저런 소프트웨어 검사도 하고, 가끔씩 일 얘기도 하죠.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진 않습니다.”
“그 일이 많이 즐겁나 봐요.”
“즐겁다기 보다는 제 임무를 수행하는 거죠. 자부심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민혁 씨는 은근히 표정관리가 안돼요. 평상시에는 항상 무표정인데, 회장님 얘기를 하면 얼굴이 밝아지거든요. 정말 자부심 때문에 가는 거 맞아요?”
연지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웃으면서도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그녀는 민혁이 진심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짜로요? 아니, 잠깐만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회장님이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은 회장님을 딱히 여자로서 생각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네요. 그렇죠?”
“네, 네……”
“그럼 다행이네요. 설마 로봇과 사랑에 빠지나 했거든요.”
“연지 씨는 은근히 회장님에게 부정적인 거 같네요. 아까 회사에서도 그렇고……
연지는 민혁의 속마음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독특한 성향과는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회장님한테 부정적인 건 아니에요. 다만 요즘 자꾸만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전 로봇은 어디까지나 도구라고 생각해요. 자동차나 냉장고같이 말이에요. 로봇은……감정을 못 느끼잖아요. 물론 서지혜 회장님 덕분에 강제 회식이나 단합대회도 없어지고 많은 부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솔직히 전 로봇이 새로운 권력이 되는 게 아닐까 걱정돼요.”
민혁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는 연지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반대로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으니 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수호그룹에서 수십 년 동안 해오던 단합대회도 대부분의 직원들이 싫어하던 건데, 비교적 젊은 사람인 정재현 회장님 때도 이건 안 없어졌잖아요. 차라리 컴퓨터가 경영을 맡는 게 사람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요……민혁 씨는 회장님이 많이 좋은가 보네요.”
연지가 약간 시무룩해진 상태가 되자, 민혁은 그녀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다른 이야기들을 꺼냈다. 다행히도 그녀는 웃음을 되찾았지만, 어색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둘은 바깥으로 나왔다. 민혁은 도심의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잠깐 근처를 산책한 뒤, 그녀를 차에 태웠다. 집에 데려다주는 길 내내 민혁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서로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최대한 서로의 마음을 돌려 말했지만, 결국 친해지기는커녕 생각의 차이만 발견한 것 같았다.
“저기……민혁 씨.”
연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로봇 여자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인간 여자만큼 섬세하지는 못할 거예요. 분명 주기적으로 버그를 뿜어댈 거라고요.”
“제가 로봇이랑 결혼이라도 할 거 같아서 하는 말입니까?”
민혁은 웃었다. 그는 연지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을 멀리하면 어쩔지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여전히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바보같이 로봇이랑 사랑에 빠지진 말란 얘기예요. 민혁 씨 정도면 충분히 능력 있는 남자니까, 주변에서 찾아보라고요.”
어느새 차는 연지의 집 앞까지 도착했다. 그녀의 집은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다. 단지 안은 아이들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했다. 회장이 살던 마을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다음번에는 제가 밥 살게요.”
연지가 손을 흔들었다. 민혁은 그녀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2029년 4월 21일
민혁은 시계를 보며 영화관 앞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연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면서 데이트란 걸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번에 연지와 헤어진 이후로, 곧바로 그녀가 약속을 잡은 것이다. 그는 너무 갑작스럽게 진도가 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신 없을 기회를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 민혁 씨!”
연지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녀는 회사에서 일할 때와는 다르게 청바지와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영화는 아직 시작 안 했죠?”
“상영 시작까지 10분 정도 남았어요. 지금 들어가면 돼요.”
민혁이 티켓을 들고 들어가려는데, 연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어라, 팝콘은 안 먹어요?”
민혁의 돌아보자 그녀는 이미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혹시 영화 볼 때 팝콘 드세요?”
“네, 보통 다들 그러지 않나요?”
“그렇구나……그럼 제가 하나 살게요.”
민혁이 영화관 알바생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헤헤. 근데 이런 건 민혁 씨가 먼저 챙겨줘야죠.”
“그러네요. 미안해요.”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사실 그는 영화를 볼 때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맛에 비해 너무 비싸고, 팝콘을 먹고 나면 배가 불러 영화를 보고 나서 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는 종종 혼자 영화를 보러 가곤 했었고, 그 때의 습관이 그대로 나타났다. 혼자 놀 때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안할 것까지는 없지만, 여자들은 이런 사소한 거에 끌린다고요.”
그녀가 웃고 있었지만, 말 속에 약간의 가시가 돋아 있었다. 민혁은 자신이 그녀에게 행동 하나하나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약간 불편함을 느꼈지만, 곧바로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는 첫 데이트 때부터 이런 식으로 불편함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러 간 영화는 SF장르였다. 먼 미래 화성에 정착한 사람들이 벌이는 전쟁과 속임수,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화성을 지배하는 거대 기업에 맞서는 시민단체의 일원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단체의 지배층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던 도중 상대 측의 여간부의 꼬임에 넘어가 애인을 버리고 기업 측에 붙어버렸다. 양 진영의 전투는 기업 측의 승리로 끝나고, 영화는 후속작을 암시하며 끝났다.
영화관을 나가며 민혁은 연지가 반도 먹지 않은 팝콘을 버리는 것을 보았다. 한편 그녀는 영화 내용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공이 나빴네. 자기편을 배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애인까지 내버리다니. 솔직히 저런 남자들이 진짜 최악의 타입 아니에요?”
연지는 주인공을 싫어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 다음 편에서 반드시 그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민혁은 사실 속으로는 주인공의 행동이 옳다고 느꼈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은 데이트 중이었으니까.
그들은 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저는 크림파스타로 할게요. 민혁 씨는요?”
“음……안심 스테이크로 하죠. 굽기는 중간으로 해주세요.”
민혁은 밥을 먹는 동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데이트 자리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연지는 은연중에 서지혜 회장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회장님이 별로 마음에 안 드세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뭐랄까……로봇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얼마 전에 회의에서도 갑자기 비메모리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고 하는데……솔직히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랑 경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인사 정책도 직원들의 말을 듣는다고는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제멋대로인 게 많아요. 물론 능력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괜찮겠지만……”
민혁은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할 말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연지는 그의 속마음을 대충 눈치챈 듯 했다.
“민혁 씨는 이런 말 하는게 싫죠? 아무래도 회장님 옆에 가까이 붙어있을 테니……”
“아니요, 최대한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는 게 저한테도 좋죠. 모두가 회장님을 추종한다면 그건 독재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민혁은 그녀의 기분에 어떻게든 맞춰 주느라 스테이크의 맛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밥을 먹고 난 뒤, 민혁은 그녀에게 오락실에 가자고 제안했다.
“어때요? 거기에 가상현실 게임기도 꽤 있을 텐데.
“음……오락실보다는 노래방이 낫지 않아요? 게임은 별로 안 좋아해서……”
“노래방이요? 저 노래는 잘 못하는데……”
민혁은 노래방에 가본 적이 거의 없을 뿐더러, 어쩌다가 한 번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가게 되어도 탬버린만 흔드는 사람이었다. 한동안 노래 같은 걸 안 시키는 회사에서 일한 탓에 잊고 있었지만, 그는 사회생활이란 것에 대해 잘 몰랐다.
“하다 보면 느는 거죠. 어쩔 거예요?”
그는 하는 수 없이 연지의 의견에 따랐다.
“너의 마음을~ 잡고 말겠어~”
연지는 정체불명의 아이돌이 부를 법한 노래를 불렀다. 민혁의 예상대로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노래방을 즐겼으며, 그는 옆에서 열심히 탬버린을 흔들었다.
“어땠어요? 노래방도 생각보다 괜찮지 않아요?”
“그러네요……”
민혁은 힘 없이 대답했다. 고작 몇 시간 만났을 뿐인데 이렇게 진이 빠지다니. 그래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니 차마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노래방을 나와 공원 거리를 걸었다. 아이들이 이곳저곳을 뛰어노는 동안 어머니들은 옆의 벤치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애들 되게 귀엽지 않아요? 나도 나중에 두 명 정도 낳아서 기르고 싶은데.”
연지가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반면 민혁은 다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아이들을요? 요즘 세상에 아이 낳는 건 좀 힘들지 않아요?”
“물론 제가 즐길 게 조금 부족해지기는 하겠지만, 아이들이 커가는 걸 보면 되게 즐거울 것 같아요. 민혁 씨는 만약 결혼하면 아이는 안 낳을 건가요?”
“저도 낳고는 싶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
“그렇구나. 하긴 아이 낳는 것도 돈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도 열심히 살다 보면 조금은 여유가 생기지 않겠어요?”
민혁은 그녀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렇겠죠. 저도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만큼 돈을 열심히 벌어야겠어요.”
“진짜로요? 앞으로가 기대되네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민혁 역시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가 속이 메스꺼웠다. 그는 자신이 한 명의 여자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