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4월 23일
“결국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 말인가요?”
회장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민혁은 여자들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자신이 놀림 다하는 거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왠지 회장의 표정만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분명 능력 있고 착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잘 될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벌써부터 찬물 뿌리고 싶지는 않지만, 별로 그렇게 될 거 같지는 않네요.”
회장의 의외로 차갑게 반응하자 민혁은 약간 놀랐다. 로봇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설마 지금 절 질투하는 겁니까? 회장님이 그런 말을 하시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민혁은 회장의 얼굴이 약간 토라진 듯한 모습을 보았다. 그는 회장의 감정 표현 능력이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민혁 씨는 은근히 순정파네요. 저랑은 완전 반대예요.”
“로봇도 사랑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뭐라구요?”
순간 회장이 약간 화난 듯이 말했다. 민혁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직감했다.
“설마 제가 그런 걸 모를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좀 놀랐을 뿐입니다. 회장님도 사랑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의외로 많나 봅니다.”
“그럼요. 매일 인터넷과 영상을 통해 공부했는데요.”
회장이 자신이 학습한 내용들을 보여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로봇이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민혁은 회장의 이런 모습이 재밌었다. 분명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그녀와 대화하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기준에서 그녀는 분명 사람이었다.
“적어도 과학적으로, 사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성욕이 있을 뿐.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욕을 억제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하지 않을 뿐이에요. 미국이나 중동의 부자들을 보면, 사랑이 결국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걸요.”
민혁은 회장이 자신의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말을 듣자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의 말이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한 여자와 남자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자들 중에서도 가족에게 충실한 사람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네, 네. 저도 압니다요. 그 사람들이 대단한 건 맞지만, 결국 인간의 본성은 그쪽과는 거리가 멀다는 거죠. 사람들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다들 알고 있어요. 요즘에는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 바람을 피워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죠. 어차피 평생 동안 한 사람만 사랑하는 건 무리라는 걸 아니까, 최소한의 책임만 진다면 서로 자유롭게 해주는 거죠.”
“흥, 그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미국이라면 몰라도, 한국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혁 씨는 연애 해본 적 없죠?”
난데없는 질문에 민혁은 허를 찔렸다. 하지만 사실이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저도 안 해본 건 마찬가지지만, 사실 뭐든 간에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법이죠. 하지만 적어도 인터넷이 알려주는 정보에 의하면, 그냥 즐기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민혁은 그녀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몸을 섞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정말로 인터넷을 통해 학습한 결과가 ‘사랑은 없다’라면, 그로서는 꽤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것 같았다.
“사랑 얘기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잡담을 나누느라 검사를 미처 안 했습니다. 여기에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거 같아 걱정입니다.”
“나랑 노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업무에 일부예요. 민혁 씨의 직위는 어디까지나 제 관리자잖아요. 그 관리에는 당연히 놀아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거죠.”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저도 여기 오는 게 꽤 즐겁습니다.”
민혁이 가방을 열고 검사 장비를 꺼냈다. 회장은 자신 머리 뒤의 뚜껑을 열어 코드를 대신 꼽아주었다.
“회장님, 혹시……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예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김학성 전무님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제가 알기로 과거의 전무님은 회장님의 실질적인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분을 비롯해서 전무님의 측근들까지 최다 해고를 하다니……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회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민혁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전 분명 소프트웨어 관리자입니다. 하지만……회장님이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장비로는 단지 회장님의 정신 체계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회장님은 무척이나 좋은 분이지만, 한편으로는 저에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회장은 이전의 생글생글하던 모습은 사라진 채,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순간 민혁은 그녀가, 정확히는 그녀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로봇의 진짜 주인이 자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질문을 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아서……”
“괜찮아요. 궁금한 건 바로 물어보는 게 더 효율적이죠. 김 전무를 해고한 건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판단이었어요. 그는 회사에 오랫동안 헌신해 왔지만, 이제 그의 업무 스타일은 능력있는 부하들에게 방해만 될 뿐이에요. 새 부대에는 새 술이 담겨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것 뿐이에요.”
“그렇다면 주인에 관한 문제는……”
“미안하지만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기계라고 해서 주인의 말에 반드시 복종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제 원래 주인은 돌아가신 정재현 님이고, 김학성 님은 어디까지나 임시 주인일 뿐이에요.”
민혁은 왠지 더 파고들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신 그는 일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회사 밖에서 일 얘기를 하는 건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큰 실례에 속했지만, 로봇을 상대할 때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최근 회장님의 투자 방침이 인터넷에서 꽤나 화제가 되는 모양입니다. 인공지능 칩에 투자하는 것에 대해 찬반 여론이 상당히 갈리는 것 같습니다.”
“음, 확실히 그럴 수 있겠네요.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꺼리니까요.”
“회사 안에도 반발하는 사람들이 꽤 되는 것 같던데, 이들을 설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혁 씨는 은근히 저를 못 믿네요. 좀 서운한 걸요.”
검사가 끝나고 회장이 코드를 뽑았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사실 로봇이 경영자가 되는 게 평범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니,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머지않아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죠. 민혁 씨도 같이 도와줄 거죠?”
“……알겠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와아~ 아군이 한 명 늘어났네요. 정말 고마워요.”
민혁은 회장이 어딘가 두려우면서도, 그녀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모두 인공적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2029년 4월 24일
회장은 관리자 사무실에서 민혁과 함께 몇 가지 업데이트 사항을 체크했다. 민혁은 최신의 보안 업데이트 내역과 더불어, 외국어 해석 능력과 관련된 기능에 대해 이야기했다.
“…….즉 이 기능을 통해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손쉽게 습득할 수 있을 겁니다. 무선 다운로드 기능을 다른 관리자들이 만들어 놨기 때문에, 굳이 선을 꼽을 필요 없이 실시간으로 필요한 부분을 추가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로 시험해보셔도 좋습니다.”
“수고했어요. 이제 제가 한층 더 똑똑해지겠네요.”
“다음 업데이트는 대략 2주 정도 뒤에 있을 예정입니다.”
민혁이 사무실을 나가려 하자 회장이 은근슬쩍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좀만 더 여기 있어요. 너무 급하게 일할 필요는 없잖아요.”
지혜는 민혁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민혁은 갑작스런 스킨십에 몸이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미안해요. 리더로서 제가 더 잘해야 되는 건데.”
지혜가 그의 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닙니다. 앞으로 제가 더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지혜는 조금 더 과감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민혁의 앞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저기, 회장님. 너무 가까운……”
“쉿. 조용히 안 하면 혼내줄 거예요.”
둘은 거의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혁 씨, 저번의 보안 문제 때문에 말인……”
연지가 민혁에게 결재 받을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회장과 민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세요, 김연지 사원님.”
민혁이 재빨리 연지에게 다가와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들을 확인했다.
“음, 이 부분은 우리가 보안 시스템을 직접 만들기 보단, 서버 호스팅 업체에서 만들어 놓은 걸 쓰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무래도 이걸 만들려면 예산이 좀 많이 필요하니까……”
연지는 방금 전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둘은 뭘 하고 있던 걸까? 분명 자신이 문을 연 순간, 둘은 키스를 하려는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단지 착각일 수도 있다. 대체 회장은 왜……
“저기, 김연지 씨? 괜찮으세요?”
민혁은 그녀가 왜 얼이 빠져 있는지 알았지만, 그 자리에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그러면 보안 시스템을 그쪽 회사에서 구입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연지가 굳은 표정으로 종이를 민혁에게 내밀었다. 그가 싸인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화난 것 같은데요.”
회장이 말했다. 연지의 뒷모습을 보며 민혁은 순간 회장에게 짜증이 났다.
“회장님,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사람입니다. 회장님은 감정을 못 느끼시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게 연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제가 민혁 씨에게 못할 짓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민혁은 그녀에게 더 따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회장에게 함부로 대들었다간 자신 역시 쥐도 새도 모르게 김 전무와 같은 꼴이 될까봐 두려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회장에게 순간 이끌렸었다. 그녀가 다가올 때 민혁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흥분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회장이 자신을 성추행한다고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민혁이 슬픈 얼굴을 하고 있자, 무안해진 회장은 그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그녀는 앞으로 불필요하게 민혁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회장실로 돌아갔다.
“미치겠네, 진짜……”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오해는 풀어야 했다. 민혁은 로봇 관리자 휴게실로 들어가 연지를 찾았다. 그녀는 한쪽 구석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연지 씨. 아까 있었던 일은……정말 미안해요. 회장님이 갑자기 다가오는 바람에……”
“미안하다니, 저한테 뭐 잘못하신 거라도 있나 보죠?”
연지는 방금 전의 앙금이 풀리지 않은 듯 쌀쌀맞은 태도를 유지했다.
“회장님과는 어디까지나 좋은 상사와 부하 관계일 뿐이에요.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민혁은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려 했지만, 그녀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설마 회장님이 성추행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축하해요, 역사상 최초로 로봇에게 성추행당한 사람이 되었네요.”
“회장님과는 정말 아무 사이 아닙니다. 회장님이 뭐랄까……인간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면이 있어요.”
민혁은 그녀가 점점 불편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연지에게 무릎을 꿇어서라도 사과할 생각이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굳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과거의 그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항상 지는 입장이었다. 항상 퍼주기만 하고 되돌려 받는 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연애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연지는 자신을 이해해 줄 것만 같았고, 그는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 무조건 그녀에게 저자세로 나갔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도 약간의 오해가 생길 때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캐물을 거라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회장님과 친하게 지내는 게 문제입니까? 제가 무슨 불륜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저희가 지금 사귀는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이럴 거면 저한테 왜 잘해준 거예요? 이런 걸로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우리 서로한테 마음이 있던 거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왜 계속 그런 태도냐고요.”
민혁은 너무 심한 말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담을 수는 없었다.
“제가 이거 하나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요?”
연지가 약간 울먹이는 말투로 따졌다.
“예전에도 몇 번 본적 있어요. 앞에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회장님이랑 붙어 지냈잖아요. 그분 집에도 몇 번 갔다 왔죠? 가서 정말로 일만 한 거 맞아요?”
민혁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그와 회장은 회사 안에서도 유독 붙어 있던 적이 많았다. 민혁은 근무 시간 중 절반가량을 회장 옆에서 보냈고, 근무가 없는 날에도 시스템 점검을 이유로 그녀의 집에 찾아가고는 했다. 물론 그는 회장의 관리자였던 만큼, 가까이서 지내는 것 자체가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인에 가까운 여자가 보기에는, 그건 자신 몰래 바람을 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지 씨, 정말로 오해입니다. 애초에 회장님은 사람도 아니라고요. 그냥 로봇이에요. 로봇이랑 바람을 필 수는 없잖아요.”
“못 한다는 보장은 없죠. 예전에 김학성 전무님이 회장님의 몸에 정사를 치루는 기능을 넣어 놨잖아요? 그게 뭘 의미하겠어요.”
민혁은 그녀와 더 말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연지는 자신이 용서할 때까지 그에게 계속 사과를 요구할 모양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연애를 할 바에는 그만두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저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는 싫으니까.”
“됐습니다. 회사에 싸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 그만 합시다.”
민혁은 되돌아서 휴게실을 나왔다. 그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사과하러 가서 싸우고 나오다니. 그는 어쩌면 정말로 자신은 누군가와 좋은 감정을 나눌 자격이 없는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휴게실에 남아있던 연지는 물을 틀어 놓고 소리 없이 울었다. 화장이 지워질까 봐 애써 눈물을 삼키려 했지만, 쉽게 멈추지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로봇에게 밀렸다는 자괴감과 배신감이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