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4월 26일
연지와의 사이가 멀어질수록, 반대로 민혁과 회장의 사이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민혁은 저번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렸다. 정확히는 연지와 사이가 멀어지며 생긴 공허함을 지혜를 통해 채우려고 했다.
그는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매우 깍듯이 대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말도 점점 더 편하게 했다. 회장 역시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주기 보다는 마치 그가 친한 친구인 마냥 대했다.
그날따라 민혁은 유독 늦은 밤 회장의 호출을 받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회장은 다리가 드러나는 짧은 바지와 반팔티를 입은 채 그를 맞이했다. 민혁은 그녀가 너무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괜히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있기로 했다.
회장은 민혁에게 술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민혁은 로봇과 술자리를 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한편으로 흥미가 생겼다. 그녀는 두 개의 병을 들고 왔다. 하나는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이 든 병이었고, 하나는 겉에 알 수 없는 언어가 쓰인 파란색 병이었다.
“그건 뭐예요? 공업용 알코올 같은 건가.”
민혁이 파란색 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것도 사실 연료예요. 급히 에너지가 필요할 때는 이걸 마시면 된다고 배웠거든요. 다만 마실 때마다 약간 취한 기분이 든다는 게 문제지만요.”
“취한다고요? 인공지능이란 알면 알수록 신비롭네요. 이렇게 보니 로봇에게도 로봇 나름대로의 문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먼 미래에 인류가 멸종하고 로봇이 세계를 지배하면, 그런 걸 마시면서 놀지 않을까요.”
“제가 굳이 뭐 하러 인류를 멸망시키겠어요. 사람들이 다 죽으면 민혁 씨처럼 저랑 놀아줄 사람들도 없어지는 건데.”
“그러네요. 앞으로도 회장님이랑 놀려면 오래 살아야겠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술과 에너지 충전액을 들이켰다. 와인 반병을 비울 때쯤, 민혁의 얼굴에 서서히 취기가 돌았다.
“민혁 씨는 요즘 뭐하고 지내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관리자 한 명 이랑 사이가 괜찮은 것 같던데, 괜히 저 때문에 안 좋게 끝난 건 아닌가 걱정 돼서요. 잘 돼 가고 있어요?”
“그게……그 사람의 속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절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어쩔 때는 또 무관심하게 대하고. 그렇다고 무작정 고백했다간 오히려 더 사이가 안 좋아질 것 같고. 물론 제가, 아니 정확히는 회장님이 먼저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 사람도 좀 너무해요. 절 안 믿어 주잖아요.”
“여자가 간을 보고 있네요. 그렇지 않나요?”
“그럴지도요. 제가 이제까지 연애를 안 한 건 여자랑 이런 식으로 기싸움 하고 싶지 않아서 였는데, 하필이면 마음에 드는 여자가 간부터 보는 타입이라니……”
“안 한 거예요, 아니면 못 한 거예요?”
“둘 다입니다. 아무튼 지금은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모든 여자가 이렇다면, 정말 제 미래는 암울할 것 같네요……”
“만약 사람이 아닌 상대라면 어떨 거 같아요?”
지혜가 민혁의 손을 살짝 어루만졌다. 순간 그는 몸에 전기가 오는 듯 했다.
“사람이 아닌 상대를 사랑할 수는 없잖아요.”
“굳이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잘 필요는 없죠.”
지혜는 어느샌가 의자에서 일어나 서서히 민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회장님은 회사에서랑은 완전 정 반대로군요. 은근히 자유분방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다.”
민혁은 횡설수설하면서도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지혜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절 불편해 하는 거 아니에요? 누가 보면 제가 억지로 시키는 줄 알겠어요.”
그녀가 웃을수록 민혁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욕구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두려웠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회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민혁은 애써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의외로 냉정한 그의 태도에 회장이 뒤로 물러났다.
“미안해요. 저는 그냥 민혁 씨가 좋을 줄 알고……”
그녀는 민혁 옆에 앉았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기는 싫었던 결국 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찌질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전 이런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회장님도 좋은 사람이지만, 갑자기 이런 일을 하기에는……”
“그렇구나. 제가 민혁 씨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거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는 그냥……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회장님과 친해져도 되는 건지, 로봇을 좋아할 수 있는 건지……”
지혜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혁은 조금 안정이 되었는지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저는 인간의 사랑이란 게 뭔지는 잘 몰라요. 그래도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열심히 배우려고 했고, 지금은 민혁 씨 덕분에 조금은 알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쪽을 깊이 사랑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전 어디까지나 감정 없는 로봇이니까요. 다만 같이 밤을 보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회장님, 솔직히 말해서……회장님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전 로봇을 보고 흥분한 멍청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맞아요. 제 본질은 로봇이에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제 목적이고요. 비록 민혁 씨의 직장 상사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제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 싶어요. 도와줄 수 있나요?”
둘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 민혁은 술기운과 가운 안으로 보이는 그녀의 가슴골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혜와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입술, 그 다음은 입 안. 그리고 그들은 손을 뻗어 서로의 옷을 벗기고 다시 키스를 했다.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매우 따뜻했다.
햇빛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지혜와 민혁은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그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가벼운 키스를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민혁 씨.”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회장님.”
민혁은 여자와 함께 잠에서 깨어나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민혁은 시계를 보고 자신들이 너무 늦게까지 잤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 오늘 출근해야 되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우리를 찾을 텐데.”
“괜찮아요. 전 회장이니까요. 민혁 씨는 아침에 저랑 같이 거래처에 방문하느라 늦었다고 하면 되죠.”
“로봇답지 않게 거짓말도 하네요.”
이번에는 민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요, 거짓말 하는 여자라서 싫어요?”
“아니요, 그런 모습도 좋습니다.”
민혁은 그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그의 품 안에는 회장의 위엄은 온데간데 없는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2029년 4월 28일
대략 3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사실상 고위 임원들은 모두 모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 회의에서 정말로 중요한 사람들은 3명뿐이었다.
한 명은 오랫동안 회사를 위해 헌신해온 최고위 임원이자, 회장 로봇을 만들어 자신의 성욕을 채우고 수호그룹 전체를 집어삼키려 한 사람이었다.
다른 한 명은 사내 정치와는 무관하게 일본에서 로봇 연구에만 집중하던 사람이었지만, 김 전무의 계략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하게 된 사람이었다.
마지막 한 명은 입사한 지 1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맥 덕분에 괜찮은 보직을 얻었으며, 더 나아가 오랫동안 일한 직원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이 세 명의 투표 결과에 따라, 서지혜 회장의 해고 명령을 수행할지 말지가 결정되었다.
“모두 이 자리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투표는 제가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전략기획실의 강재욱 상무가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이주영 이사가 회의의 진행을 맡아야 했으나, 그 역시 회장의 해고 대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 대신 강 상무가 진행을 맡기로 했다.
“어차피 김학성 전무님은 반대표를 던질 테니, 박병헌 부장, 조민혁 사원 두 분이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투표를 할 때마다 굳이 모두가 이렇게 모일 필요는 없지만, 최초의 투표인만큼 다른 임원들도 한 번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회의를 열었습니다. 우선 민혁 씨가 투표를 해 주십시오. 회장님의 결정을 지지하실 생각이십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민혁에게로 쏠렸다. 그는 안절부절 하며 긴장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손을 어루만졌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두 분 다 좋은 사람, 로봇이고 저에게 잘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둘 중 하나를 제 손으로 해고해야 하다니……”
“그렇다면 먼저 박병헌 부장님의 의견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강 상무가 말했다.
“박 부장님, 지금 본인의 결정을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김 전무는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투표에서 민혁은 그와 동등한 한 표를 갖고 있었고, 무리해서 민혁을 압박했다가는 오히려 상대방 쪽으로 돌아설 위험이 있었다. 무엇보다 박 부장이 자신에게 표를 던진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민혁은 어떻게든 위기를 넘긴 자신을 속으로 칭찬했다. 이제 박 부장이 김 전무의 편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민혁에게 있어 회장은 좋은 사람, 아니 로봇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로봇에게 경영을 맡기는 건 무리였다. 다시 김 전무가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지혜와 그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
“전 서지혜 회장님의 결정에 찬성합니다.”
회의실의 모두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박 부장이었다. 강 상무가 다시 한 번 그의 진심을 물었다.
“정말로 김 전무님의 해고에 찬성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김 전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냐?”
“전무님, 전무님께서는 회사를 위해 충분히 열심히 일해 주셨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으니 이제 남은 인생을 즐기는 게 나을 겁니다.”
“그걸 왜 니가 멋대로 결정하냐 이 말이야. 그래서 날 짜르고 저 깡통 로봇을 섬기겠다는 거냐?”
“전 어디까지나 회장님의 판결에 동의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회사 내에 전무님이 나가기를 바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의견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새끼가!”
“정숙해 주십시오. 여긴 싸우는 곳이 아닙니다!”
강 상무가 김 전무를 째려보았다. 전무는 자신의 위상이 불과 몇 달 만에 대폭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혜에 대한 증오심 역시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 누구도 김 전무를 무시하지 못했다. 직원들, 정치인, 심지어 수호그룹의 회장까지도. 그런데 일개 가정부 로봇 따위가 그의 권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렇게 둘의 투표가 결정되었고, 이제 한 명의 결정만이 남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이제 한 표만이 남게 됩니다. 민혁 씨,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저는……”
민혁은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 회의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즉 김 전무와 박 부장이 사전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합의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김 전무는 수호전자의 터줏대감이자 민혁이 어리버리 하던 입사 초기에 그를 자신의 파벌에 넣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준 은인이었다. 서지혜 회장은 만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업무를 통해 가까워졌으며, 심지어 잠자리까지 같이 한 사이였다. 누구를 선택하든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대학생 시절 책에서 직급이 높아지는 것은 아랫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혁은 책의 저자가 배부른 소리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었다.
김 전무는 어떻게든 민혁을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려 했다. 갑작스럽게 박 부장이 자신을 배신한 상태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민혁의 도움이 필요했다. 사실 김 전무는 민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가 아는 정보는 박 부장이 그를 보조 관리자로 추천해 주었고, 이후 데이빗 캐슬이 회장에 의해 해고되자, 갑작스럽게 승진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추천해준 건 박 부장이었을지 몰라도, 실제로 그를 보조 관리자로 승진시킨 건 바로 본인이었다. 민혁은 김 전무에게 나름대로 빚을 진 셈이었다.
“민혁 군, 저 망할 놈이 왜 저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젠 자네가 날 도와줘야 해. 로봇 따위에게 우리가 지배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함부로 그를 협박하지 마십시오, 전무님.”
박 부장이 끼어들었다.
“넌 닥쳐! 배신자 따위가 어딜 감히……저 로봇 년이 너에게 몸을 대주기라도 했던 거냐?”
“전무님이 그런 말 할 처지는 안 될……”
“둘 다 그만 하세요! 다른 임원들 앞에서 이게 무슨 꼴입니까!”
결국 강 상무가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민혁 씨, 가능한 한 빨리 결정해 주십시오. 관리자로서 투표를 하는 것은 강력한 권리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무이기도 합니다.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한쪽 편을 들어야 합니다.”
결국 민혁은 한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의 자신의 마음이 가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저는 회장님의 의견에 찬성하겠습니다. 이번 해고 결정에 찬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