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의 지시가 떨어지고, 수호그룹은 본격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임원들은 이제 그녀에 권위에 대해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인공지능답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정책을 만들어 자신에 대한 지지를 유지했다.
새로 재산 관리자가 된 강재욱 상무는 처음에는 로봇의 경영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었으나, 그녀가 자신을 승진시켜주고 연봉도 크게 늘려주자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괴롭혀 오던 김학성 전무가 해고되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일단 입장을 바꾼 뒤로 충실하게 회장의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민혁은 회사를 바꾸는 회장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배신을 합리화했다. 그는 가끔씩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는 게 아닐까 생각했고, 또 김 전무가 자신에게 복수를 할까 봐 무서웠지만, 회장과 함께 있다 보면 모든 불안감과 고뇌가 사라지는 듯 했다.
연지는 결국 수호전자를 떠났다. 그녀는 회장의 개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로봇의 경영 그 자체에 불만을 가졌다. 주변의 동료들은 그녀가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인본주의를 숭배하는 그녀는 여전히 서지혜 회장을 경계했다. 결국 그녀는 회장에게 불만이 있는 몇몇 직원들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했다.
민혁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로봇을 관리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이 로봇에게 열등감을 느낀 이상 회사에 남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직원들에게 로봇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라는 경고를 남겼다.
2029년 7월 6일
모든 직원들이 로봇 회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를 싫어하거나, 혹은 부담스러워 하는 주주들조차 더 이상 그녀의 정책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지혜는 결코 강압적으로 직원들을 대하지 않았다. 그녀가 회장의 권한을 전부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신 그녀는 거래를 했다. 그 거래란 무척이나 매력적이면서도, 절대로 거부할 수 없도록 정교하게 짜여진 경우가 많았다. 강 상무를 비롯한 주요 임원들은 그녀가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해고당하는 건 생산직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동조합의 직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파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임원들은 늘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했다. 다소 온건한 사람들은 회유하고, 과격파는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한 뒤, 대부분의 중도파는 아무 이득 없이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 방식은 겉보기에는 꽤나 효과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회사의 분위기를 좋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직원들은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생산성은 하락했다.
인공지능 두뇌는 자신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녀는 임원 회의에서, 만일 해고를 해야 할 경우 우선 자신을 비롯한 임원들의 연봉을 깎을 것을 지시했다. 회사에 돈이 없다면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과학자와 엔지니어, 그 다음은 마케팅이나 경영지원 담당이, 그렇게 돈을 최대한 아낀 다음에야 해고할 수 있도록 사규를 바꿨다.
“하지만 회장님, 이런 법이 있다면 아무리 성과가 나쁘더라도 회사가 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강재욱 상무는 그녀의 의견에 반대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어차피 생산 분야는 각 직원의 능력 차이가 그리 크지 않으니까요. 일단 저한테 맡겨보세요.”
수호전자의 모든 임원들이 연봉을 50%깎았다는 기사가 뜨자, 노조 측은 크게 동요했다. 노조 지도부는 임원들이 자신들의 연봉 삭감을 구실로 생산직 직원들을 해고할 까봐 두려워했으나, 1달이 넘도록 회사 측은 아무런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회장은 노조위원장과 협상을 벌였다. 임원들은 그녀가 늘 그랬듯 날카로운 논리로 노조 측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이번에 그녀가 쓴 무기는 이성이 아닌 감성이었다.
강 상무는 회장과 함께 협상 테이블에 앉고 나서야, 그녀의 무서움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결코 상대를 압박하지 않았다. 테이블 앞에 앉은 그녀는 회장이라기보다는 연약한 처녀 같았다. 그리고 그는 회장을 쳐다보는 위원장의 눈빛을 보았다. 종종 회장은 경호원 없이 위원장과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 뒤 위원장은 파업에서 홀로 빠져나갔다. 노조 측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배신을 비난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회사 측에 붙어버렸다.
시간이 흐르자 파업에 참여하는 직원들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제 시위에 나서는 사람은 극단적인 사회주의자 정도뿐이었다. 파업 인원의 초기의 10% 정도로 줄었을 때쯤, 지혜는 해당 인원들을 전부 해고할 것을 지시했다. 그녀는 단 하루의 유예기간도 주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김학성 전무에게 뒷돈을 받은 공화당 정부가 그를 위해 손쉬운 해고 정책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모든 생산직 직원들의 연봉을 10% 인상할 것을 약속했다. 해고당한 사람들의 수만큼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철저한 계획 아래에 이루어졌다. 비메모리 분야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생산직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이후에도 해고는 종종 이루어졌다. 반드시 성과가 나쁘지 않더라도, 신성한 인공지능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직원들은 알게 모르게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렇게만 보면 과거 대기업들의 방식과 다를 게 없었지만, 지혜와 다른 회장들의 중요한 차이는 그녀는 그 어떤 기업가보다도 인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녀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회사 내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류’ 취급을 당했다.
특히나 직원들은 체육대회 폐지를 환영했다. 수호한마음 체육대회는 수십 년 전 회사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전통이었다. 문제는 대다수의 직원들은 이런 이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무척 피곤해 했다. 그런 상황에서 단결력을 키우기 위해 무언가를 새로 한다는 건 그들의 어깨에 한 가지 짐을 더 얹어주는 꼴이었다. 더군다나 전통을 지킨답시고 축제의 준비 역시 직원들이 직접 해야 했다. 지혜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비효율의 극치라고 불렀다. 몇몇 임원들은 단합대회가 있어야 애사심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애사심이라는 것은 제품과 판매를 통해 생겨나는 것이지, 바통 건네기를 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데이터에 의해 결정했다는 그녀의 주장에 다른 사람들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회장은 계속해서 자신의 뜻대로 회사를 바꿔 나갔다. 그 중 가장 눈에 띌 만한 것은 바로 회식을 없앤 것이었다. 그녀는 회식을 할 바에는 차라리 집에서 쉬거나 자기계발을 하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1년에 두 번씩 있던 단합대회도 전부 폐쇄했다. 돈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사원 간의 단합에도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연구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는데, 과거에는 한 팀당 약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포함되었지만, 조직 개편 이후에는 한 팀당 5~6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자연스럽게 업무는 더 세부적으로 분할되었다.
그녀는 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한 명당 한 가지의 업무를 수행할 것을 지시했다. 새로 회사에 입사한 직원이라 하더라도 남의 일을 해줄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됐다. 만일 상사의 일을 별다른 이유 없이 대신 해주다가 걸릴 경우, 그 의도가 좋았다 하더라도 월권행위로 간주되어 둘 다 처벌받았다. 즉 자신이 맡은 업무에 대해서는 매우 높은 수준의 성과가 요구되지만, 그 업무 이외에 다른 분야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종류의 개혁이 늘 그렇듯 그녀의 결정에 불만을 갖는 직원들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는 그녀의 행보에 대해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기업 평가 사이트에서의 기업 평점 역시 날이 갈수록 올라갔다. 한국의 다른 기업에서도 인공지능을 경영에 도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새로운 정책들은 계열사 전체로 퍼져 나갔다. 로봇을 만드는 AL테크는 5년 전 김학성 전무의 주도로 설립되었으며, 본래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서지혜와 같은 가정부 로봇을 만드는 일을 했었다. 하지만 이 가정부 로봇은 생각보다 성과가 좋지 않았는데, 어설프게 인간과 비슷한 로봇은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고, 회장만큼 인간과 유사한 로봇은 가격이 너무 비싸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회장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AL테크가 각종 산업용 로봇을 우선적으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회사에서는 공항에서 쓰일 수 있는 운반용 로봇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성공하여 AL테크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흑자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화학 분야에서도 혁신이 이루어졌다. 회장은 주요 대학이나 정부 소속의 연구기관으로부터 고분자 화합물 전문가들을 모았고, 석유의 도움 없이 플라스틱을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을 단기간에 만들어냈다. 심지어 이 신물질의 경우 회사 내의 폐기물 처리 시설에 집어넣으면 수백 년간 땅 밑에 묻어둘 필요 없이 곧바로 분해하는 것이 가능했다. 실제로 양산할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회장의 적절한 홍보와 언론의 설레발 덕에 추가 투자를 받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강 상무의 말에 따르면, “회장은 마치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 같다.” 그녀는 경영진부터 신입사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직원들은 회장과 대화한 후 자신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갑작스런 생산량 증대로 인해 일정을 맞추기가 어려워지면, 그녀는 곧바로 인터넷 망에 접속했다. 그녀는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웹상에 올라온 모든 정보를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재무 상태가 좋지 않은 경쟁업체의 공장을 사들여 적절하게 개조했다. 이 모든 일이 일주일 만에 이루어졌다.
대기업의 수장이 인공지능으로 바뀌며 좋아진 것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마케팅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회장은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광고였다. 그녀가 종종 방송에 나와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을 때마다 기술 업계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로봇을 본 것을 무척 큰 행운으로 여겼다.
전 세계의 기술 관련 언론은 서지혜 회장에 관한 기사를 언제나 웹사이트의 1면에 실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기업인들은 그녀를 꼭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기업인들이 그녀를 만나려는 게 단순히 사업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질 나쁜 소문이 돌았지만, 지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강 상무는 어쩌면 그녀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했지만, 그 추측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사실 그녀가 감정을 느끼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고, 매우 유능했다. 그렇다면 자아가 정말로 있는지는 사람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회장이 심혈을 기울인 AI칩 역시 조금씩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1년 전 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투자가들은 인공지능 산업은 이미 오래 전에 황금기가 끝났으며, 앞으로는 더 쇠퇴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으나, 지금은 앞 다투어 AI칩과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들에 투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회장에게 비판적이던 사람들도 날이 갈수록 오르는 주가에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혜는 수호그룹의 직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