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9월 7일
시간은 흘러 어느샌가 가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한국의 지도자가 살고 있는 푸른 기와의 집에는 그날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다. 하지만 건물 내부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거웠다. 공화당 정부 최대의 협력자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공화당의 의원들은 최대한 현행법과의 충돌을 피해 학성을 돕고자 했지만,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단순히 로봇에 대한 믿음뿐만이 아니라, 돈이 많다고 방송에서 으스대던 김학성과 그의 돈을 받아 멋대로 정책을 바꾸던 공화당이 위기를 겪는 모습을 보기 위해 서지혜를 응원했다. 로봇을 바지사장으로 세워 이익을 챙기려던 김 전무가 오히려 로봇에게 뒤통수를 맞고 회사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수호그룹의 직원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 역시 환호했다. 남이 고통 받는 것을 즐기는 정치인들이었지만, 자신들이 예전에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조롱당하게 되자 공화당은 패닉에 빠졌다.
공화당은 과거에 학성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지원금을 받았다. 그 덕분에 공화당은 가장 어두운 시기에 홍보 활동에 충분한 예산을 투입할 수 있었고, 이는 정권 창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박정석 대통령 아래에서 정부와 수호그룹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친구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여론을 통해 지혜를 압박하는 것이 실패하자, 당에서는 검찰과 연계해 서지혜를 비자금 조성 및 사내유보금 횡령 혐의로 잡는 방법을 고려했다. 그러나 검찰은 눈치가 빨랐다. 그들은 사회의 분위기가 점점 더 서지혜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을 알아챘고, 공화당의 부탁을 적당히 들어주는 척 하면서 별다른 수사를 벌이지 않았다. 결국 공화당이 선택한 최후의 수단은 대통령에게 부탁해 새로운 시행령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고로, 각하께서 직접 나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홍정민 공화당 대표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굳이 내가 나서야 하냐는 말이지. 소송 걸어서 복직 신청하면 되는 거 아니야? 보통 억울하게 짤린 사람들 다 그렇게 하잖아.”
박 대통령은 약간 짜증이 났다.
“소송을 걸기엔 너무 늦습니다. 설령 소송에서 이겨 다시 복직한다 해도 회사는 이미 그 로봇이 장악한 뒤일 겁니다. 이건 경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주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주권이라......’
대통령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그가 성공하기까지 김학성 전무의 도움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가 이끄는 공화당 정부 역시 김 전무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노동자들의 해고 요건을 완화하거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속세를 줄인 것 역시 그런 정책들에 속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대통령은 김 전무를 돕는 것이 망설여졌다. 애초에 왜 로봇을 인격체로 인정했던 것은 그가 아니었던가? 대통령이 보기에 김 전무는 기술을 지나치게 과신한 나머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었다. 무엇보다 총선이 1년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논란이 되는 행동을 했다가는 공화당이 가져갈 표가 줄어들 위험이 있었다.
“정말 내가 도움을 주려면, 시행령을 공포하는 수밖에 없어. 사실상 긴급조치나 다를 바 없다고. 아무리 내가 보수 성향 대통령이라 해도 이런 일로 시행령을 만들었다가는 뒷감당이 안 될지도 몰라. 만약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반발 여론이 심해진다면? 자네는 분위기를 바꿀 방도가 있나?”
“여론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합니다. 만약 김 전무가 이대로 해고된다면, 우리에게 앙심을 품고 불법 자금과 관련된 폭로를 할 수도 있습니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그는 공화당 정권 창출의 최대 공신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서로 도우고 살았잖아. 솔직히 김학성 그 친구도 60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은퇴 좀 하면 어때? 쌓아 놓은 돈도 많잖아.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는 거야?”
답답한 것은 홍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처음 김 전무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이제 그만 은퇴해서 인생을 즐기는 게 어떠냐고 말했으나, 김 전무는 듣지 않았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권력욕의 화신과도 같았다. 그러한 욕망이 그를 대기업의 전무 자리로 올려놓았고, 공화당을 여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 욕망은 전무를 점점 더 곤란한 상황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저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수단이 하나 있긴 합니다. 다만 김학성 전무님이 협력해 줄지는 모르겠습니다.”
홍 대표가 말했다.
“당연히 협력해줘야겠지. 우리가 돕는 입장이니까. 그래서 그 계획이 뭔데?”
“김 전무가 해고를 면하는 조건으로 그가 계획했던 해고 역시 취소하는 겁니다. 사실 서지혜 회장이 취임하기 전에, 김 전무는 자신의 주도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해고할 계획이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사원들의 반발도 심했고, 상대적으로 로봇의 경영이 더 나아 보이는 것입니다.”
“음, 김 전무가 그런 짓을 계획했다면 확실히 반발심이 생길 수도 있겠는데. 우선 사원들에게 당근을 주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해고는 나중에 여론이 돌아선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결국 그를 돕기로 결정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것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자 한 것이다.
“그들을 돕겠다. 하지만 이번뿐이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계획이고 뭐고 다 소용없을 줄 알아라.”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대통령은 홍 대표의 전화기 너머에서 김 전무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이랑 같이 일하라니요! 제가 무엇 때문에 로봇의 관리자가 된 줄 모르는 겁니까?”
“그러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사내 여론도 전무님한테 안 좋게 돌아간다는데, 도대체 어쩔 셈이십니까?”
홍 대표는 전무를 달래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는 전무의 완고함이 그를 갈수록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했지만, 전무는 여전히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았다.
“줘 봐. 내가 직접 얘기할 게.”
대통령이 홍 대표의 전화기를 자신의 귀에 갖다 댔다.
“접니다, 대통령.”
“아! 대통령님, 제발 저 좀 도와주십시오. 망할 깡통 로봇 때문에 이 무슨 수치입니까.”
“홍 대표의 제안에 따르세요. 일단 해고를 면해야 그 다음 계획을 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은 왕이 아닙니다. 멋대로 굴었다간 저희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잠시 수그릴 줄도 알아야지요. 고개를 너무 빳빳이 들면 바람에 더 빨리 쓰러지는 법입니다.”
대통령의 말에 전무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주영 이사를 비롯한 모든 부하직원들 역시 홍 대표의 제안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이 이상 해줄 수가 없어요. 정 불만이면 당신만의 계획대로 하세요. 그럴 자신이 없으면 일단 내 말대로 하고.”
“……알겠습니다. 각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했습니다. 시행령은 최대한 빨리 발표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전화를 끊었다. 일단 한 고비는 넘겼으나, 이젠 여론과 정치권의 반응이 문제였다.
“홍 대표,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걸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김 전무님을 지키는 게 저희에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홍 대표가 대답했다. 한동안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로봇을 계속 경영자 자리에 놔둔다면, 언젠가는 대통령 직위까지 노릴 것입니다.”
대통령은 국무총리와 각 부처의 장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뒤, 그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그 계획이란 바로 인공지능을 기업 경영에서 강제로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즉 서지혜를 겨냥한 법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획재정부 장관이 그의 결정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대통령님, 그랬다가는 국회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공화당이 제1당이긴 하지만, 과반수를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국회 동의 없이 바로 시행령을 발표할 겁니다. 애초에 국회까지 이 문제를 끌고 가서는 안 되죠.”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지금 이런 짓을 했다간 국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재정부 장관 말이 맞습니다. 전 이쪽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정부에서 먼저 로봇의 재산 상속을 자유 운운하며 환영해놓고서는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해버린다면 김 전무를 노골적으로 편애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보건복지부 장관도 거들었다. 대통령 역시 이번 일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결정한 이상 다른 장관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제가 알기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학성 씨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 노동당 집권 시절, 지원금도 끊겨 사무실 월세도 못 내던 시절 기억하십니까? 사회가 우리들을 버렸을 때, 우리 손을 잡아준 건 김학성 씨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받은 돈으로 선거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승리했습니다.”
몇몇 장관들은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의견에 반대했다. 특히 재정부 장관은 늘 대통령의 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대통령님, 알고 계시겠지만 우린 충분히 그에게 보상을 해 주었습니다. 그의 탈세를 눈감아준 건 물론이고, 그가 여직원을 성추행 했을 때도 검찰에 압력을 넣어 수사를 막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이 정도면 돈 받은 값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이 그를 돕는 마지막이 될 겁니다. 이번만 도와주면, 더 이상 그에게 무언가를 주지도, 받지도 않을 겁니다. 그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죠. 그를 돕지 않는다면 절망한 나머지 언론에 자신과 정부와의 유착 관계에 대해 털어놓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번만입니다. 저 역시 국회를 무시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만, 이건 우리가 정권을 되찾은 것에 대한 마지막 대가입니다.”
여전히 재정부 장관은 불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일개 장관으로서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를 비롯한 몇몇 장관들은 시행령을 만드는 일에서 빠지겠다고 알렸다.
일단 방향이 정해지자, 법을 만드는 일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장관들이 예상했던 대로, 시행령에 대한 반발은 매우 극심했다. 노동당 의원들은 눈치가 빨랐다. 그들은 김 전무와 서지혜, 정부 간에 어떠한 관계가 있음을 간파했고, 한때 자신들이 비난했던 로봇 회장의 편을 들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김 전무는 회사에 다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외신마저 대통령의 행동을 지나치게 이기적이라고 비난하자, 정부 내에서도 시행령을 만들어서는 안 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여기에 더해 대통령의 지지율까지 꾸준히 떨어졌다. 김 전무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다. 그것은 자신을 돕느라 비난당한 정부 측 인사들을 위로하고 돕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그들을 신경써주는 것을 잊고 말았다. 심지어 그는 기자회견에서 좋지 않은 쪽으로 주목을 끌었는데, 정부가 자신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로봇은 사람에게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첫 번째 발언은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지지를 받을 수 있었지만, 로봇의 통제에 관한 부분은 그 누구도 옹호해주기 어려웠다. 분명 서지혜가 고 정재현 회장의 재산을 상속받고, 그의 뒤를 이어 회사를 지배할 수 있도록 허가해준 것은 정부였다. 그런데 태도가 갑자기 바꾸어 로봇의 기업 경영을 금지시킨다는 것은 누가 봐도 법치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김 전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적을 늘려나갔다. 보수적인 성향의 정치인들 중에서도 그를 비난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정권을 잡은 쪽이 공화당인 만큼 굳이 그의 뇌물을 받을 필요그는 이제 공화당의 구원자가 아닌 골칫덩이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