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9월 19일
밤이 깊어도 회사는 여전히 돌아갔다. 회장이 바뀌고 근로환경이 예전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야근이 잦은 것은 별 차이가 없었다.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과거에는 할 일이 없어도 상사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남아있어야 했다면, 이제는 정말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저녁까지 회사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재욱 상무와 몇몇 임원들이 복도에서 커피를 마시며 새로운 기업 고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 김 전무님 아니야?”
강 상무가 손가락으로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가리켰다.
“그런 거 같습니다. 해고당한 사람이 어쩐 일로 여기 다시 온 겁니까?”
옆에 있던 임원이 말했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김 전무 옆에는 이주영 이사와 그의 부하들이 전무를 뒤따르고 있었다.
“김학성……전무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강 상무의 옆에 있던 한 임원이 말했다.
“왜, 난 여기 오면 안 되나?”
“그건 아닙니다만, 제가 알기로는 전무님께서는 해고당하신 걸로……”
“그 로봇 따위의 지시를 들으라는 거냐?”
김 전무의 버럭 화를 냈다. 사무실 안에 있던 몇몇 직원들이 문을 살짝 열고 김 전무가 화내는 모습을 구경했다.
임원들은 속으로 늘 이런 식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예전의 그들은 불쾌해도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들은 살아남았고, 전무는 해고된 입장이었다.
“목소리 좀 낮추시죠, 전무님. 여기서 시끄럽게 굴면 곤란합니다.”
강 상무가 앞장서 전무와 맞섰다.
“뭐?”
“지금 전무님 해고된 사람 아닙니까? 여기 직원이 아닌데 왜 저희에게 화를 내십니까?”
전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자기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직원들이 따박따박 자신에게 대드는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 새끼가 아주……”
김 전무가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대한 체구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강 상무는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만 좀 하십시오.”
다른 임원이 전무의 앞을 가로막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해고된 사람들, 회사에 별로 불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쓸데없이 자리만 잡아먹는 사람들, 스펙만 높고 능력은 없는 사람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소통할 줄 모르는 사람들, 다 해고되었습니다. 예전이라고 해고가 없었습니까? 지금 해고당한 사람들, 예전에는 능력은 있는데 만만한 직원들 정치질로 죄다 한직으로 물러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다들 제정신이 아니구만. 그 로봇이 나보다 더 낫다는 거냐?”
“뭐 부정할 수는 없죠.”
그의 동료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전 예전의 로봇이 김 전무님의 지시를 듣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난 일개 직원이니까 뭐라 할 수도 없었고. 근데 지금 보니까 로봇이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한 거잖아요. 그리고 제가 보기엔 전무님은 물론이고 예전의 회장님보다도 훨씬 공평한 것 같은데요. 회장님은 사람은 좋았는데 너무 휘둘리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아주 미쳤어. 단단히 미쳤다고……언제까지 대들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전무가 화나거나 말거나, 3명의 임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상사였던 남자가 두렵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전무 역시 아무 생각 없이 회사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니들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가 본데, 난 아직 완전히 짤린 게 아니거든. 곧 알게 되겠지. 아무튼 니들은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김 전무가 그들을 지나쳐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직원들은 이 지리멸렬한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2029년 9월 28일
앵커 : 다음 소식입니다. 얼마 전 서지혜 수호그룹 회장이 천 명이 넘는 직원을 대상으로 해고 지시를 내린 가운데, 박정석 대통령이 로봇의 기업 경영을 금지하는 시행령을 발표했습니다. 윤정아 청와대 대변인은 어제 저녁 6시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의 시행령을 발표했는데요, 자세한 소식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자 : 어제 저녁 청와대는 기자회견을 통해 로봇의 기업 경영 금지를 포함해 인공지능을 규제하는 긴급 시행령을 발표했습니다. 윤정아 대변인은 인공지능의 무절제한 판단을 막음으로써 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의 발표를 했습니다.
윤정아(청와대 대변인) : 이번 긴급 시행령은 국민의 주권과 기업의 이익을 불확실한 인공지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으로, 이 법은 정부로 인해 함부로 기업의 자유가 훼손되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을 도울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계의 발전으로 인한 기술적 실업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근로자들의 인권 역시 향상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기자 : 이번 시행령은 특별히 기자회견까지 열어 발표를 할 만큼 정부에서도 무척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부는 시행령과 관련된 각종 평가를 생략하고 곧바로 법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바로 법안의 취지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번 시행령은 사실상 수호그룹의 서지혜 회장을 저격하는 것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정부가 마음에 안 드는 특정 기업을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정순재(한국경제보호협회 회장) : 로봇이 경영하는 회사가 수호그룹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런 법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정부가 ‘너희는 나한테 찍혔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거든요. 특히나 서지혜 회장에 의해 김학성 전무의 해고가 결정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시행령을 발표한다는 건 특정 인물과 정부와의 유착을 의심해볼 수 있는……
기자 : 한편 야당은 오늘 아침 논평을 통해 제멋대로 법을 바꾸는 행위는 독재나 다름없다며 정부에 대해 날선 비판을 했습니다.
송유민(노동당 대표) : 많은 직원들이 새로운 인공지능 회장을 선호하고 있는 상태에서, 강압적인 법을 통해 기업을 공격하는 행위는 사실상 공산주의와 다를 바 없는 행동으로……
기자 : 노동당에서는 이번 시행령을 공산주의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공화당은 아직 별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로봇의 재산 상속을 옹호하던 공화당 정부가 사실상 수호그룹을 겨냥한 법을 만들면서, 정부와 수호와의 갈등은 더욱 커질 전망입니다. KBC뉴스 서준호 기자였습니다.
2029년 9월 29일
민혁은 연락을 받고 원래 출근 시간인 9시보다 1시간 더 일찍 회사에 나왔다. 사무실에는 그의 보조 관리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서류들을 겨우 처리하고 있었다.
“몇 시부터 여기에 있었던 겁니까?”
“한 7시쯤에 출근한 것 같네요. 시행령 발표 때문에 회사 안이 워낙에 시끌시끌해서요.”
그를 맞이하는 보조 관리자의 얼굴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저도 회사 오면서 그 뉴스를 봤어요. 해고가 금지되었다고요?”
민혁이 물었다.
“네. 정확히는 해고 절차가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대통령님께서 시행령을 통해 수호그룹 전체에 대한 해고를 일시적으로 금지시켰어요. 정확히는 로봇의 기업 경영을 금지하고, 로봇의 경영으로 인해 생긴 기존의 기업 정책들은 강제로 폐기되는 거예요.”
“그건 완전히 회장님만 저격하는 법안인데……그러면 해고될 예정이었던 직원들은 다시 복직되는 겁니까?”
“일단은 그렇긴 한데……문제는 그 직원들이 다시 돌아와도 할 일이 없다는 거예요. 그 로봇 회장님이 이미 연간 예산을 다 짜 놨거든요. 이거 참 난감해서 어쩌나……”
그때 다른 보조 관리자들이 달려왔다.
“두 분 소식 들었어요? 어쩌면 우리 해고될지도 몰라요. 정부에서 로봇이 회장이 되는 걸 막는대요. 거기에다 회장님이 이제까지 했던 정책들도 다 없던 걸로 만든다는데요.”
보조 관리자 한 명이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도 이제 막 소식을 들은 참이라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저 법은 어디까지나 로봇의 경영 참여를 막는 법안입니다. 즉 저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설령 서지혜 회장님이 경영권을 박탈당한다 하더라도 저희가 해고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한직으로 밀려날 수는 있겠지만요.”
그는 애써 관리자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그 역시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공화당 정부는 서 회장을 인격체로 간주하며 그녀의 재산 상속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런데 김 전무가 해고당하자 입장이 180도 뒤바뀐 것이다. 공화당과 김 전무가 깊게 연결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도 몰랐다.
민혁은 자신의 직속 상사를 찾아갔다. 짧은 휴가에서 돌아온 박 부장은 아직도 지금이 휴가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장님.”
민혁이 그에게 인사했다.
“아, 자네 왔는가? 요즘 바빠서 얼굴을 보기가 너무 힘들단 말이야.”
“박 부장님, 혹시 소식 들으셨습니까? 오늘 아침 정부에서 긴급 시행령을 발표했습니다.”
“물론이지.”
그는 다른 관리자들과는 달리 매우 평온해 보였다.
“별로……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다들 지금 자기 짤릴지도 모른다고 아주 난리던데……”
“난 회장님 지시를 따를 뿐이지. 너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박 부장은 이 상황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직접 이런 법을 만들 정도면 저희도 위험한 거 아닙니까?”
“글쎄, 그 문제는 회장님께 직접 여쭤봐야 하지 않을까? 난 어디까지나 그분의 신체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니까.”
민혁은 그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그는 소심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자기 밥줄이 끊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손 놓고 있을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일이 부쩍 줄어들었다. 김 전무가 해고되었을 때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박 부장이 전무를 싫어한 나머지 해고를 반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이 해고당할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조차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것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참, 그나저나 회장님이 너한테 볼 일이 있다는데, 한 번 가봐.”
“회장님이 말입니까?”
민혁은 불안해졌다. 그녀가 해고되면 자신까지 해고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부장님,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십시오. 정부에서 우릴 상당히 싫어하는 듯 합니다.”
“걱정 마. 다 해결될 거야.”
민혁은 이상해진 박 부장을 뒤로 하고 방에서 나왔다. 회장실까지 가는 동안 온갖 잡생각들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혹시 나를 해고하려는 게 아닐까? 아니면 그녀가 해고되고 다시 김 전무가 수호그룹으로 들어올까? 그는 얼마 전 김 전무가 수호전자로 돌아와 자신은 아직 해고되지 않았다며 본인 사무실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돌아온다면 관리자들을 해고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다시 김 전무에게 충성해야 하는 걸까? 민혁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할 얘기가 있었어요.”
지혜가 웃으며 그를 반겼다.
“요즘 수호전자를 비롯해 그룹 계열사 전체의 주가가 올랐다고 해요. 소식 들었나요?”
“저기 회장님, 혹시 정부 시행령에 대해 들으신 바가 있습니까?”
“물론 들었죠.”
“걱정되지 않습니까? 적지 않은 직원들이 이번 일에 대해 우려하고 있어요. 한동안 회장님의 재산 상속 문제로 회사가 시끄러웠는데, 애써 안정되는 순간 다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민혁은 박 부장에게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했다. 회장은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저는 정치를 할 거예요.”
“네?”
민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말 그대로예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정부의 시행령은 그리 간단히 적용되는 게 아니에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그 법에 얽혀 있을 거고, 지금은 절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할지라도 김 전무가 곧바로 수호그룹을 장악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리고 세 달 뒤에는 총선이 있죠. 즉 제가 정치 세력을 모아 총선에서 공화당에게 크게 승리할 수 있다면, 시행령을 무력화시킬 방법이 생겨나요.”
민혁은 그녀가 너무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인이 되어 시행령을 없던 일로 만들겠다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장님, 아무리 회장님께서 인간을 뛰어넘는 완벽한 로봇이라 해도, 정계에 진출하는 건 무리입니다. 애초에 그런 쪽의 기능은 전혀 만들지도 않았다고요.”
“정치라는 건 결국 많은 표를 얻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에요. 본질적으로는 더 많은 고객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회사 경영과 비슷하죠. 해볼 만하지 않나요?”
민혁은 회장의 돌발 행동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물론 서지혜라는 로봇은 인간 이상의 지능을 지녔지만, 아무리 그래도 갑작스럽게 정치를 하겠다고 나설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회장님이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희 관리자들의 도움을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는 어디까지나 엔지니어이지 정치인이 아니에요.”
“민혁 씨는 쉬운 몇 가지 일만 도와주면 돼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정말로요.”
민혁은 회장의 자신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반대할 만한 이유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정부에 의해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회장이 무언가를 한다면,
민혁은 알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상황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꼈다. 그는 부장의 태도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아마 그는 로봇과 정부의 알력다툼 사이에서 자신은 그저 회장에게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민혁은 회사 바깥으로 나갔다. 거리에서 빵빵대는 차들과 자욱한 스모그가 그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수호전자의 일개 부속품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회장은 나름대로의 대책을 세우고 있지만, 일개 인간인 그로서는 회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명령을 따를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시행령에 맞설 다른 방법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