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10월 18일
민혁은 늘 그렇듯 지혜의 집에 업데이트를 핑계로 놀러갔다. 하지만 그녀에게 향하는 민혁의 기분은 예전만큼 상쾌하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는데, 예전과는 달리 무거운 공기가 집 전체에 깔려 있는 듯 했다.
“예, 예. 좋아요. 저야 감사하죠.”
민혁이 집에 들어갔을 때 지혜는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민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투에는 전혀 막힘이나 어색함이 없었다. 민혁이 보기에 그녀는 이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저야 고맙죠. 그럼 몇 시까지 가면 되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뵈요.”
“누구 전화예요?”
“아, 민혁 씨.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보고 토론회에 출연할 생각이 없냐고 묻는데요.”
“토론이요? 역시 저번 인터뷰 때의 발언이 문제가 된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정치에 나선다고 하니, 사방에서 물어뜯을 좋은 기회가 생긴 거죠.”
“회장님, 그게 정말로 가능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요, 로봇은 말을 잘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뇨, 결코 그런 건 아닙니다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전 그냥 로봇이 아닌 대기업 회장을 맡은 똑똑한 미녀 로봇이니까요.”
지혜는 그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한 번 생긴 의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정치를 위한 어떠한 계획 같은 걸 세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은, 틀림없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말로 출연하신다면, 어떤 말씀을……하실 겁니까?”
“최대한 화제를 이끌 만한 단어들을 선택했어요. 그래야 유명해질 테니까요.”
“유명이라……회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뭔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요? 의외네요. 민혁 씨는 저를 사람처럼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뭐 상관없어요. 전 이미 법적으로 인격체나 마찬가지니까요.”
“회장님, 혹시……”
민혁은 그녀의 주인이 정말로 사라졌는지,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박병헌 부장 같은 사람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건지 확실하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조종당하고 있다면, 자신이 그녀를 의심한다는 사실 자체가 숨은 주인에게 알려져서는 안 됐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아닙니다. 그러면 토론과 관련된 영상들 중 조회수가 높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영상 속도를 5배 정도로 하면 하루에 약 600분 분량의 영상을 학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마워요. 민혁 씨는 항상 의지가 되는 남자 같아서 좋네요.”
지혜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민혁은 그녀를 의심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어루만질 때마다 불안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으레 그렇듯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가졌다.
2029년 10월 20일
그녀가 토론을 하기로 약속된 방송국 스튜디오는 수많은 방청객과 카메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지혜 회장은 방송국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그녀가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어하던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가득 채웠다. 친숙한 배경음악과 함께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시사토론 60분입니다. 오늘의 특별 게스트는 바로, 한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로봇 CEO, 서지혜 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세요, 수호그룹 회장 서지혜입니다.”
지혜가 대답했다.
“서지혜 회장님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서 회장님은 2028년 AL테크에서 실험적으로 만들어진 가정부용 로봇으로, 각종 가사일을 비롯해 주인을 돌봐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의 인공지능은 단순히 가정부로 쓰이기에는 아까웠고, 결국 정재현 전 회장님께서는 서지혜 님을 유산 상속자로 선정했습니다. 이후 여러 가지 사건을 거친 끝에, 현재 지혜 님께서는 완전히 수호그룹 전체의 회장이 된 상태입니다.”
민혁은 집에서 소파에 앉아 그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한껏 꾸민 그녀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할 까봐 불안했다.
“그리고 상대 패널로 나와 주신 분은 바로, 공화당의 국회의원 주동원 님입니다. 최근 주 의원님께서는 각종 시사토론에 출연해 상당한 수준의 논리력을 보여주셨는데요, 이 덕분에 인터넷에서는 주카콜라, 주사이다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대파로부터 ‘대통령의 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는데, 오늘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반갑습니다. 주동원입니다.”
주 의원이 카메라를 보고 인사했다.
“오늘 60분 토론의 주제는 바로 인공지능의 정치에 관한 내용입니다. 최근 서지혜 회장님께서는 한 인터뷰에서 잘못된 법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총선을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이 인터뷰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렇게 해도 되는가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오늘 이 토론을 통해, 과연 로봇의 정치 참여가 가능한지, 인간과 비교하여 얼마나 뛰어날지 확인해보고자 하는데요, 먼저 서지혜 회장님께서 발언해 주십시오.”
카메라가 지혜를 비추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PD가 사회자에게 그녀가 말할 수 있도록 재촉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회장님? 회장님께서 먼저 발언해 주십시오.”
“저는……공화당에서 발의한 법이, 잘못 되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지혜는 저 말 한마디를 하고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가 어딘가 어색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회자는 애써 토론을 진행하려 했다.
“회장님? 다른 할 말은 없으십니까?”
“물론 있습니다. 저를 겨냥하는 그 법은, 기본적으로 저를 싫어하시는 거잖아요.”
주 의원의 얼굴에 약간의 비웃음이 나타났다. 사실 그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최대한 막고 있었다. 그래도 예의를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로봇의 수준은 너무 떨어졌다. 주 의원은 적당히 로봇을 ‘가지고 놀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확실하게 눌러줄 계획이었다. 이렇게 또 그의 승리 목록에 하나가 추가되려 하고 있었다.
“회장님, 좀 더 상세하게 의견을 말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토론이니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법이 왜 문제인지, 그걸 어떻게 고칠 생각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회장님이 많이 피곤하신 것 같군요.”
주 의원이 말했다. 방청객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집에 있던 민혁은 자신의 불안감이 현실로 되어가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은 로봇이 인간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사회자는 그녀가 며칠 전의 인터뷰에서 보여준 모습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주 의원에게 발언권을 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주 의원님께서 먼저 발언해 주시겠습니까? 로봇이 경영과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왜 잘못됐는지 말입니다.”
“뭐,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설명은 해야겠지요. 몇몇 사람들의 오해와는 다르게,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일반인공지능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서 회장님의 인공지능을 처음 만든 휴이넘에서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로봇을, 마치 인간처럼 대우하는 것이죠. 로봇이 몇몇 분야에서는 인간보다 뛰어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을 보조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만이 정치를 할 자격이 있습니다. 로봇이 정치를 한다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 의원이 의기양양하게 말을 마쳤다. 나름대로 치열한 토론을 기대했던 그는, 너무 허무하게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만이 정치를 할 수 있다, 좋은 말인 것 같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의원님. 서지혜 회장님께서는 반박할 말이 있으면 해주십시오.”
“사람들은 착각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생각하는 겁니다.”
이번에도 회장은 한 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음……그게 다입니까?”
당황한 사회자는 어떻게는 토론의 분위기를 살려 보려 했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진 분위기였다.
“서지혜 회장님, 저랑 토론하러 나오신 거 아닙니까? 뭔가 논리적으로 말을 하셔야지, 그렇게 단답형으로 말하면 어떡합니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정치를 하신다는 겁니까?”
보다 못한 주 의원이 그녀에게 핀잔을 줬다.
“전 충분히 논리적으로 말했습니다, 의원님. 의원님의 머리로는 이해를 못하시는 거 아닌가요.”
지혜의 말에 사회자와 주 의원, 카메라맨과 PD 모두가 당황했다. 이내 주 의원은 마음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했다.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회장님. 출고되기 전에 AL테크에서 충분히 교육을 받지 않은 거 아닙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을 모욕하는 건 무척이나 즐거워하지만, 자신이 모욕당하는 건 절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토론에서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곤란합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만이 정치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하셨죠? 의원님은 지금 스스로 판단하여 화가 나신 겁니까, 아니면 원래 가진 본능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신 겁니까?”
“머리가 딸린다고 비난당했을 때 화가 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요.”
주 의원은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그는 로봇이 쓸데없는 소리로 자신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것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전 의원님께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의원님을 비난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떠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의원님께서 화가 나신 것은 전적으로 의원님 머릿속의 뇌가 화를 내도록 만드는 호르몬을 분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원님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생명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제가 제 의지로 생각하는 게 아니니, 정치를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전 호르몬과 뉴런으로 인해 생기는 인간의 의식과 알고리즘에 의한 제 판단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지혜는 흔들림 없이 발언을 마쳤다. 방금 전과는 달리 방청객은 매우 고요했다. 그들은 분명 컴퓨터가 인간과 맞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회장님이 아무리 궤변을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로봇이 인간 수준의 창의성과 통찰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책 하나를 짜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단순히 연산만 해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소통과 노력, 그리고 국민들에게 봉사하겠다는 의지가 합쳐져야 합니다!”
주 의원은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위해 지혜를 강하게 압박했지만,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의원은 어쩌면 저 로봇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지라……”
지혜가 입을 열었다. 모든 방청객과 카메라맨, PD, 그리고 그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로봇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정치인들이 말하는 그 의지라는 것이 진심인지 의문이 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사장의 잡일꾼부터 최고의 재벌까지, 더 큰 집과 더 예쁜 여자를 원합니다. 그런데 왜 정치인들은 자신만 예외인 것처럼 행동하는 겁니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국가를 운영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들에게 봉사하고 싶으면 고아원에 갈 것이지 무엇 하러 정치를 한단 말입니까? 저는 여기서 확실하게 말해 두겠습니다. 전 제 이익을 위해 정치를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제 이익은 곧 여러분의 이익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전 이미 부자이기 때문에, 굳이 세금을 몰래 빼돌릴 이유도 없습니다. 제가 이익을 취하는 방법은 논리와 이성, 그리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정치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성팔이와 이념 논쟁이 아닌, 효율성에 기반한 관료제를 적용시킬 것입니다.”
주 의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정리가 되질 않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지혜는 전형적인 거품 기업의 로봇과 같았다. 토론을 하기는 커녕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주 의원에 앉은 로봇은 뭔가 달랐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이 지리멸렬한 말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를 둘러싼 토론장의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