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 2월 1일
민혁은 로봇을 처음 만든 개발자들과 연락을 해보려 했다. 서지혜를 만들었던 개발자, 과학자들 중 일부만이 수호그룹에 남아 있었고, 대부분은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거나 각국 정부 소속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동종업계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는 법 덕분에 다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없었고, 그들은 민혁에게 친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알려준 사실은 절망적이었다. 바로 김학성 전무가 자기 멋대로 로봇의 정신을 조종하기 위해 본인 외의 다른 사람들이 코드 전체를 검사하는 것을 못하게끔 만든 것이다. 결국 민혁은 처음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민혁이 알아낸 새로운 사실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서지혜 신화’를 더 보완해줄 뿐이었다. 그 신화란 사악한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던 현명한 로봇이 자유를 찾은 뒤, 선한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미래를 선물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녀를 뒤에서 조종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박병헌 부장이었다. 그는 캐슬과 함께 로봇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민혁은 우선 캐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라면 무언가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데이빗 캐슬입니다. 말씀하세요.”
전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저 조민혁입니다. 한국 뉴스를 보셨다면 알고 있겠지만, 김 전무님이 해고당했습니다. 로봇의 주인이 로봇한테 해고당한 겁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파벌에 속해 있던 수천 명의 직원들까지 같이 해고당했습니다.”
“그건 좀 의외네요.”
그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로봇이 주인에게 반역을 저지를 가능성이 얼마나 됩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별다른 오류가 발생하지 않은 이상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캐슬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민혁은 그의 말을 믿어도 될지 알지 못했다. 그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기 보다는 그 문제와 직접 맞서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진실이 무엇인지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당신이 코드를 조작한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전 김 전무님이 시키는 일만 했을 뿐입니다. 그분을 유일한 주인으로 만들었을 뿐이라고요.”
“그러면 이런 상황이 일어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로봇이 자신의 주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까?”
“그건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도 전체 코드를 확인해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저도 해고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민혁 씨가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겠죠.”
민혁이 보기에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소득 없이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었다.
“서지혜 회장님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는 자신의 주인을 해고하더니, 이제는 정치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당을 세웠는데, 최근의 총선에서 2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아, 그 얘기는 뉴스에서 본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을 숭배하는 정당이 한국에서 유행이라고 하던데요.”
“뉴스를 통해 보이는 것보다 여기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서지혜는 이미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적어도 캐슬 씨가 이런 짓들을 꾸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이 보기에는 대체 누가 로봇을 조종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캐슬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1분 정도 전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민혁 씨, 정말 미안하지만 저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저는 처음에 제대로 된 인공지능 연구를 하기 위해 한국의 수호전자 본사로 갔지만, 그곳에서 제가 했던 일들은 대부분 권력 투쟁과 같이 저와는 맞지 않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런가요……제가 괜히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만 민혁 씨에게 몇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캐슬의 말에 민혁은 끊으려던 전화를 다시 들었다.
“어떤 겁니까?”
“제가 보기에 민혁 씨는 과거의 학성 씨처럼, 로봇을 인간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지혜는 절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컴퓨터와는 본질 자체가 다릅니다. 컴퓨터는 정해진 일을 완벽하게 할 수는 있지만, 정해지지 않은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서지혜가 벌이고 있는 모든 일 역시, 기본적으로는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일이라는 겁니다. 만약 그 누군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민혁 씨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봐야겠죠.”
“현 시점에서 제가 아는 누군가가 로봇을 조종해 이익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필시 박병헌 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 역시 그 사람이 의심이 갑니다만, 그분은 어디까지나 화학자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직접 다룰 만한 능력은 없습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그가 초기 서지혜의 개발자들이 남긴 보안 장치를 뚫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보안 장치라는 건 김 전무님의 지시에 따라 만든 것을 의미합니까?”
“알고 계셨군요.”
“어째서인지 캐슬 씨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 보안 장치를 김 전무님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저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가 회장님의 개발자들에게 일일이 연락해야 했습니다. 저에게 알려주지 않은 건 일부러 그런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그랬던 겁니까?”
“그건 박 부장님의 지시였습니다. 정확히는 그분은 자신이 직접 인수인계를 할 테니, 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나가라고 했죠.”
민혁은 이 문제를 깊게 파고들었다. 어째서 박 부장이 김 전무가 보안코드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을 감추었을까? 설령 그가 단독으로 보안을 해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 누가 이런 짓을 꾸민 건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캐슬 씨가 저라면 누구를 범인으로 삼을 겁니까?”
민혁이 든 전화기 너머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캐슬이 입을 열었다.
“말했다시피 저 역시 로봇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과거 휴이넘에서 일했을 적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기본적으로 AL테크에서 만든 가정부용 로봇이 복종해야 하는 명령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로봇은 보통 ‘일반복종’ 상태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기본적인 노력’만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커피를 타달라는 부탁이나 물건을 옮기라는 지시는 누가 명령하든 상관없이 웬만해서는 수행하는 것이죠. 반면 ‘절대복종’ 상태는 오직 주인을 상대할 때만 유지되는데, 절대복종 상태에서는 로봇이 어떤 명령을 받을 시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회장님은 지금 절대복종 상태에 있다는 겁니까?”
민혁이 물었다.
“행동을 보아서는 그렇습니다. 그녀가 이제까지 당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한 행동은, 절대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임무를 위해 그녀 나름대로 논리적인 방법을 생각해낸 결과입니다.”
“절대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임무라면……제가 알기로는 김 전무님의 지시 외에는 없을 겁니다. 일단 이 이사님과 몇몇 보좌관들이 주인의 대리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김 전무님의 뜻에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서부터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 입니다.”
전화를 끊은 뒤 민혁은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가 보조 관리자의 직위를 받은 뒤 김 전무는 지혜에게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직원들을 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며칠 뒤 지혜는 오히려 전무를 비롯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역으로 해고했다. 전무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
‘정말로 전무의 명령을 어긴 걸까?’
민혁은 생각했다. 그는 전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물론 그가 내리는 이런저런 명령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그는 보조 관리자였을 때부터 단지 A/S기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민혁이 생각하기에 해답의 열쇠는 그 지점에 있었다.
2030년 2월 5일
김학성 전무는 정부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뉴스에 전진당과 공화당의 거래 사실이 나오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시민들은 전진당과 공화당의 협약을 칭찬했다. 사람들은 쓸모 없는 늙은이 하나를 버리는 대신 기업의 발전과 국가 안보를 동시에 잡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김 전무는 공화당 본청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을 말리는 당원들을 뿌리치고는 홍정민 대표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몇몇 의원들과 함께 앞으로의 당의 행방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홍 의원이 시큰둥하게 인사했다.
“대표님, 정말로 전진당 놈들과 거래를 한 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우리 입장’이라고요? 그 ‘우리’ 안에 저는 없는 겁니까? 그 시행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아무렇지 않게 법을 없던 셈 치자는 겁니까?”
김 전무는 너무나도 태연한 홍 대표의 태도 덕에 더더욱 화가 났다. 과거 노동당 정권이 나라를 지배하는 동안, 공화당이 안정적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던 것은 순전히 그의 기부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배신은 전무에게 있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전무님이 우리 당을 위해 애써준 것은 알고 있지만, 모든 정책이 전무님을 중심으로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겁니다. 대통령님은 예전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대북 압박정책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의안을 통과시키려면 전진당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를 버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어야죠!”
김 전무는 그들에게 매달렸지만, 홍 대표는 끄떡없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입장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리는 게 아니라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만 거리를 두자는 겁니다. 애초에 전무님이 무리해서 죽은 전 회장의 재산을 얻으려다가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 로봇도 애초에 수호그룹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죠. 최소한 자기 물건 관리를 제대로 한 뒤에 남에게 무언가를 요구해야지요. 지금 제가 도와줬다가 나중에 서지혜 회장에게 피해를 입으면, 그때 전무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전무는 더 이상 그들에게 내놓을 카드가 남아있지 않았다. 홍 대표는 나중에 사태가 진정되면 그를 다시 회사로 돌려놓을 방법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전무는 억울해 하면서도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에게 버림받은 그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졌다. 그는 회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적어도 자신의 전무 자리만큼은 유지되기를 바랐다.
김학성 전무는 필사적으로 회사에 붙어 있으려 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직원들이 아직 회사 안에 남아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재앙은 그의 예상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이게 뭐야……지금 무슨 짓들을 하는 거야!”
김 전무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직원들이 이미 그의 짐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건 내 물건이잖아!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는 거냐.”
“아, 오셨군요. 안 그래도 회사로 부를 참이었습니다. 저기 구석에 바구니에 담긴 것들 보이시죠? 전부 전무님 물건입니다. 사실 처음 해고되었을 때 드렸어야 하는 건데, 저희가 너무 늦었죠?”
김 전무는 이성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노트북에 손을 대는 직원의 멱살을 잡았다.
“놓으시죠, 전무님.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말입니다.”
멱살이 잡힌 직원은 전혀 두렵다는 기색 없이 전무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주위로 건장한 남성 여러 명이 다가오자, 전무는 결국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너희들, 지금 크게 실수하는 거다. 날 내쫓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나?”
“짐 치우는 거 방해하지 마시고 전무님 물건 들고 빨리 가주시죠.”
몇몇 직원들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무는 급히 임원들이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그의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릿속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는 그저 어떻게든 이 회사에 붙어있고자 했다. 회의 도중 난데없이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임원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