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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멸망 AS왔습니다
작가 : 깔루아
작품등록일 : 20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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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02. 피예로
작성일 : 20-09-06     조회 : 270     추천 : 0     분량 : 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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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예로는 본시 나무의 정령이었다.

 동, 서, 남, 북, 그리고 중앙의 에메랄드 시까지 하여, 서로가 서로를 돕는 독특한 형태의 나라에서도 절대 간섭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따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정령의 숲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손을 대거나 간섭할 수 없는 곳이었기에 고목과 샘, 풀 한 포기도 평범하지 않았다. 모두가 오래 살아온 정령들이었다. 그들은 오래 살아온 생명력을 기반으로 지식을 연구하거나 토론하는 것을 업으로 살아왔다. 물론 그들은 숲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가끔 나타나는 돌연변이의 출현으로 나간다한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고 피예로 역시 숲 밖으로 나갔다 돌아온 돌연변이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의 숲은 오즈의 계획에 의해 불태워졌다. 발화지는 다름 아닌 숲의 한가운데, 이 세계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지고의 나무에서부터 불길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불길을 피해 겨우 도망친 정령들을 자비 없이 학살하며 오즈는 뻔뻔하리만치 정령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은, 오즈는 정령들에게만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령에 이어서 안드로이드와 환수, 더 나아가 오래토록 인망이 높았던 서쪽마녀와 남쪽마녀, 하물며 도로시까지 적으로 삼았다. 지식의 양이 방대할 뿐, 군대를 조직할 만한 공격력이 없던 정령들에게는 이보다 큰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벌써 3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들의 끝이 보이는 전쟁이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도로시님은 어디서 쉬시나요?”

 

 이 자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피예로는 그리 생각했었다.

 

 “……그런 것은 어찌 물으십니까?”

 “모든 방을 부상병들에게 양보하신 것 같아서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옷이며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 새카만 남자, 카인은 유일하게 밝은 눈동자를 휘고 태연스레 웃었다. 응접실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에 긴장할 법도 하건만, 도로시와 알현할 때조차 그는 한결같은 여유가 가득했다. 무엇보다 퇴각조차 절망스러웠던 전시상황에서, 그들은 별 일 아니라는 양 검격 한 번, 손짓 한 번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쉽사리 빠져나왔다. 눈앞에 드리워진 시야가 시뻘건 화마로 물든 에메랄드 성이 아닌 남루하나마 따뜻한 남쪽 성으로 바뀌는 순간, 피예로는 환희와 절망이 동시에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실낱같던 희망이 온전한 욕심으로 뒤바뀌었다.

 아직 그들의 힘을 완전히 보지 못했으나, 그들의 목적부터 분명히 알아야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피예로에게 흔치 않은 부탁을 맡긴 리프의 그런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는 정령의 대표로서 수뇌부에 자진한 책사로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맞습니다. 안채까지 전부 부상병을 포함한 군대가 편히 쉬며 정비할 수 있도록 리프님과 도로시님께서 배려해주셨습니다.”

 “아까 보아하니, 상당히 피해가 커 보였는데요. 힐러는 충분한가요?”

 “충분치 않습니다. 특히나 큰 전력이나 다름없는 수뇌부 역시 큰 타격을 입어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생각보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는군요.”

 “감추어도 소용이 없을 때는 그냥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방법입니다.”

 

 카인은 짐짓 놀란 양 오호, 두 눈썹을 위로 살짝 올렸다가 이내 수긍하며 끄덕였다. 피예로는 앞서 걷던 걸음을 멈춰 몸을 돌렸다. 치료에 열을 올리는 나머지 방마다 활짝 열어놓은 문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남자는 피예로와 눈이 마주쳤지만 놀란 기색조차 없이 싱긋 웃기만 했다.

 그는 순순히 대답해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회피하거나 무력으로 제압할 것인가.

 피예로는 저도 모르게 꾹 쥔 손안에서 맺히는 식은땀을 애써 모른 체 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쭙겠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무엇이 목적입니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도록 뒤처리 해드리려고 왔지요.”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꿀꺽. 피예로는 저도 모르게 바짝 타는 목을 울렸다.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건드리는 것만 같아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물었다. 물어야만 했다.

 

 “저희에게 원하시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이 역겁처럼 느껴지려는데, 남자의 입술은 선뜻 움직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였던 미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웃음이 얼굴 가득 번졌다. 만약 그가 호감형의 미색이 아니었더라면, 피예로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긴장? 공포? 혹은 도리어 경외가 일었을 수도 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피예로에게 남자는 여전히 천진한 미소를 한가득 드리워 보이면서 대답해주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요.”

 

 머리가 다 아찔해지는 엄청난 대답을 돌려줘놓고선, 남자의 목소리는 간식을 기다리는 아이마냥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일순, 찰나, 어찌되었든 시간이라 불리는 그런 부류의 것이 완전히 멈춘 것만 같았다. 그래서 피예로는 숨 쉬는 일조차 잊고 멍해져버렸다. 마치 카인이라는 남자에게 홀려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에서 홀로 태어나 오랜 세월과 지식 속에서 자라난 정령은 처음으로 느껴본 생소한 감각에 전신을 떨었다. 혼란으로 넘쳐나는 감정들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눈물마저 흘러버린 듯 깜박이지도 못한 눈가며, 상기된 볼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범을 피하려다가 이리를 만난 격이라고 했던가. 오즈를 징벌하여 멸망을 막은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피예로가 투석기가진 지식 체계 안에서는 감히 그를 예상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무엇일까. 무엇인데 이리도 당당하게 자신이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그것도 아주 간단한 일을 후다닥 해치워버리듯이,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줄 수 있기에. 당신은 과연 희망일까, 혹은 재앙일까.

 카인은 차근차근 피예로에게서 드러난 그 모든 감정을 하나씩 읽어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바로 직전 지나쳤던 방에 들어갔다. 경미하다고는 하나, 몸 곳곳에 자상이며 찰과상이며 심하게는 부러지기까지 한 부상병들이 가득한 방이었다.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며 피 냄새를 꺼려하는 기색 하나 없이 카인은 이제 막 뚜껑을 열어 김이 흘러나오는 솥 안을 들여다보았다. 응당 음식에서 풍겨야 할 고소한 냄새나 향긋함이라곤 전혀 없이 묽은 스프를 가만히 바라보던 카인은 갑작스러운 자신의 출현에 당황한 정령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흐음, 이게 환자식 인가요?”

 “네, 그런데 당신은…….”

 “잠시 실례하죠.”

 

 그의 갑작스런 돌발 행동에 놀라 잠시 굳어있던 피예로가 황급히 뒤따라 들어갔다. 그동안 카인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서 잠시 눈을 감았다. 무어라 들리지도 않는 중얼거림이 잠시 이어지고,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에는 분홍빛이 일렁이는 작은 병이 들려있었다. 그리고는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환자식에 그 약을 죄다 털어 넣어버렸다.

 

 “지금 무슨 짓을!”

 “아아…, 어떻게 만든 스프인데…….”

 

 오래 이어진 전쟁의 폐해 중 하나는 단연 식량부족이었다. 아무리 남쪽나라라는 지형적 특수성으로 언제나 비옥한 토지 덕분에 지금껏 식량난을 모르고 살았던 남쪽 나라라 한들, 전쟁으로 인해 땅이 메마르고 농사지을 일꾼들이 군대로 동원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도 식량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니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어떻게든 쥐어짜낸 식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원이었고, 카인은 그 중요한 자원에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냅다 뿌려버린 대역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처 회복에 도움이 되는 포션이에요. 상처에 직접 발라도 좋고, 먹어도 좋죠. 일단 속는 셈 치고 드셔보세요.”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카인님.”

 “제 능력검증을 겸한 소소한 담보라고 해두시죠.”

 

 경악과 황망함 섞인 시선들을 한껏 즐기기라도 하는 양 카인은 마냥 생글생글 웃은 채, 솥 안을 국자로 한 번 휘이 저어버리기까지 했다. 그 부분만 다시 건져낼 수도 없거니와 군사 수뇌부 중 한 명인 피예로의 시선에 어느덧 호기심이 물들기도 하여, 눈치만 보던 정령은 천천히 나무 그릇에 스프를 담아 병사에게 건네주었다.

 한쪽 팔이 부러지고 얼굴 곳곳에 크고 작은 잔상처가 많은 병사는 영 의심을 거두지 못해 카인을 바라보고 그 뒤에 선 피예로에게 눈짓으로 묻는가 싶더니 곧 에라, 모르겠다, 중얼거리며 스프를 쭉 들이켰다. 건더기라고 할 것도 없는 자잘한 내용물을 눈까지 질끈 감은 채로 쭉 들이키던 그는 이윽고 심심한 반응을 보였다.

 

 “…음, 뭐, 맛은 우리가 다 아는 맹숭맹숭한 스프 그대로요. 좀 달짝지근해졌다만.”

 

 다들 그가 남쪽나라로 데려올 때처럼 빛이 번쩍번쩍한 변화를 기대했던 모양인지, 마른 침까지 꿀꺽 삼키던 그들의 시선이 다시금 방긋방긋 잘만 웃고 있는 카인에게로 꽂혔다. 카인은 여전히 태연한 호박색 눈동자로 스프를 마신 병사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글댈 뿐이었다. 그 때, 한 박자 늦은 감상 하나가 추가되었다.

 

 “근데 뭔가 속 아픈 것도 싹 가시면서 두통도 없어지고 머리가 맑게 깨는 것이…….”

 

 그 말을 시작으로 병사에게는 빛이 번쩍번쩍한 변화보다 더한 기적이 일어났다. 병사의 볼에 길게 나 있던 생채기가 저 혼자서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맙소사, 자네 얼굴 상처가 지금 낫고 있는 겐가?”

 “팔, 팔 한 번 움직여봐!”

 “헉, 진짜 움직이잖아! 하나도 안 아프오!”

 “나, 나 그 스프 좀 얼른 주게.”

 “저도요! 저도!”

 “잠깐! 밀면 안 드려요! 밀지 말고 한 명씩!”

 

 병사를 지켜보든 모든 이의 얼굴이 경악 이어서 환희로 물들었다.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멈추고, 속살이 채워지며, 완전히 아물어 혈색까지 도는 그 오랜 과정이 순식간에 흘러갔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 믿기 힘든 광경에 피예로는 다시금 숨 쉬는 방법을 잊은 듯 멍해져 입만 뻐끔거렸다. 그리고는 황망한 시선을 옮겨 카인을 바라보았다.

 

 “일단 이 정도 담보면 어떠신지?”

 

 마주한 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신비로웠다.

 

 

작가의 말
 

 스프에 15초 데운 모닝빵 찍어먹으면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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