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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멸망 AS왔습니다
작가 : 깔루아
작품등록일 : 20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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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04. 도로시
작성일 : 20-09-09     조회 : 295     추천 : 0     분량 : 5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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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해가 뜨는 것을 보며 출정했던 군대는 퇴로마저 틀어 막힌 채로 전력의 절반 정도가 궤멸했다. 나머지 절반의 전력까지 모조리 전멸할 뻔했으나 기적처럼 나타난 두 이방인의 도움으로 눈 깜짝할 새에 남쪽 나라로 돌아왔다. 거기다 이방인은 돌아오자마자 부상병들을 감쪽같이 치료해주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루 만에 벌어졌다는 게 믿기 힘들었지만, 믿어야 했다.

 

 “…그래야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어.”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스스로 되새김질하며 도로시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모처럼 차려입은 제 모습이 생소하게만 느껴졌으나 이런 여유도 오랜만이었기에 그녀는 어색하나마 천천히 미소를 연습해보았다. 그런 도로시의 뒤로 황금빛과 옅은 쪽빛이 아름드리 어우러진 드레스를 차려입은 리프가 조심조심 다가와 브러시를 들었다. 그리고는 도로시가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브루넷 머리칼을 정성스레 빗어주며 추가로 보고받은 내용을 정리해주었다.

 

 “그가 내어준 포션 두 병으로 벌써 웬만한 부상병들은 완치되었어요. 중상을 입은 병사들을 포함해 보크와 프레이는 부상이 너무 심해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더군요.”

 “……담보, 라고 했다죠?”

 “네. 전부 소소한 담보라더군요.”

 

 거울을 통해 씁쓸한 미소를 주고받은 그녀들의 귓가에 정중하기 그지없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리프는 그 노크 소리만으로도 이미 문 밖의 인물을 예상한 듯 한숨과 함께 미소해버리곤 도로시 대신 대답했다.

 

 “들어와요, 피예로.”

 “실례하겠습니다.”

 

 정령의 정복은 새하얀 색에다가 하늘거리는 재질로 만들어진 터라 정령이 가질 수 있는 신비감을 더욱 증폭시키게 충분했다. 짙은 녹색의 긴 머리칼을 섬세하게 땋아 사이사이에 자그마한 들꽃까지 꽂은 피예로는 말끔하게 정돈한 외관과는 달리, 잔뜩 피로해진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쭈뼛쭈뼛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심지어 문을 닫기 직전에는 주변까지 이리저리 살펴보며 전에 없던 경계심까지 드러내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누군가에게 쫓기는 행색이었다.

 

 “피예로?”

 “……죄송합니다. 파티 전에 미리 말씀드려야할 것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카인이군요.”

 

 피예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리프 그리고 도로시보다도 더 착잡했다. 호기심에 이은 의문 위로 한층 짙은 농도의 혼란은 쉬이 번졌고, 물이 들었다. 그러나 모르는 채로 찝찝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도로시는 짧은 심호흡만으로 애써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히곤 몸을 돌려 피예로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꾹 다문 입 안에서부터 진작 정리된 이야기는 막상 쉽사리 나오지 못했다. 피예로 역시 목울대를 꿀꺽 울리며 긴장을 내리눌러서야 천천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

 

 “흐흠~ 흠~ 흥흐응~”

 

 카인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손수 피예로의 머리를 장식해주고 남은 들꽃을 손끝으로 살살 매만져보는가 싶더니 가느다란 줄기를 오밀조밀 엮어 자그마한 반지를 만들어냈다.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이라도 하는 양 자그마한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운 그는 마지막으로 제 차림을 점검했다.

 카인이 입은 어두운 크림색 수트는 급한 대로 빌린 옷이라기엔 썩 잘 어울리는데다가 사이즈도 딱 맞았다. 심지어 단 한 번도 입지 않고 걸어놓기만 한 새 옷 같은 느낌이 들어 카인은 괜스레 옷을 만지는 손길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졌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벌써 어둑해진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쟁 중이라는 현실이 잊힐 리만치 아름다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은 마냥 신비로워서 카인은 저도 모르게 나른한 미소를 걸었다.

 

 “엘이 너무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염려라기엔 무색하리만치 단순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카인은 살짝 열린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선율을 따라 방을 나섰다.

 임시로 꾸몄다던 파티 홀은 제법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이미 한 차례 공격받은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 벽 중앙이 둥그렇게 뻥 뚫린 부위는 적당한 이끼와 들꽃을 심어 꾸며놓았고, 하늘하늘한 커튼을 달아 바깥을 적당히 가려주었다. 특히 바람이 산들산들 불 때마다 커튼이 흔들려서 별로 수놓은 밤하늘이 언뜻 비치는 경관이 꽤 운치 있었다. 거기다 카펫으로 감출 수 없을 만큼 푹 꺼진 바닥에도 군데군데 들꽃을 심어놓거나 작은 연못처럼 물과 이끼를 심어두어서 마치 오래된 성곽의 느낌을 그대로 구현한 홀을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홀을 둘러보는 카인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감상하기보다 누군가를 찾는 듯 사람들의 얼굴을 바삐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던 인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요란스런 팡파레 소리와 함께 파티 홀 위쪽과 연결된 계단에서 나타났다.

 브루넷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돈하여 반짝이는 보석의 머리장식으로 우아하게 틀어 올린 도로시는 제 머리색보다 조금 더 연한 갈색 눈동자로 파티 홀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러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차근차근 계단을 내려와 상석에 자리를 잡기까지 매우 자연스러웠다. 오로지 자신에게로 고정된 시선 하나하나에 눈을 마주하며 미소해주는 모습은 익숙한 느낌마저 자아냈다. 심지어 카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조차 그녀는 의연히 더 밝은 미소를 선사해주었다.

 분명 카인의 행적을 빠짐없이 보고받고서 으레 가질 법한 두려움, 경외, 절박함이 하나 없이 그저 맑고 순수한 미소였다. 한 나라의 군주가 감사를 표현하는 정도, 딱 그 정도의 것이었다.

 이윽고 파티 시작을 위해 잔을 든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도로시는 바람에 따라 커튼이 흔들릴 때마다 보이는 별 가득한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별이 되어 올라가신 분들께 바칩니다.”

 

 너른 홀에 그녀의 목소리만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 어느 누구도 쉬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침묵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 이, 도로시를 따라 밤하늘을 바라보는 이, 허공을 노려보는 이 각양각색으로 저들의 슬픔을 삼켰다.

 

 “우리는.”

 

 도로시는 잔을 들지 않은 손을 움직여 제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검이었다. 드레스 자락에 감춰졌던 검집으로부터 뽑아낸 검은 그녀가 죽일 듯이 노려보았던 에메랄드 성과 똑같은 빛을 뿜어냈다.

 

 “오즈에게서 이 세계를 구할 것입니다.”

 

 설핏 울음이 섞인 목소리는 낭랑하게 울려 퍼졌고, 위를 향해 뻗은 검의 끝은 하늘로 치솟았으며, 굳건한 어깨 너머 등 뒤에서부터 커다랗게 퍼져 나온 초록빛 날개는 더없이 따스한 마음처럼 아름드리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런 도로시를 따라 군중들은 환호했다. 그 환호성에 다시금 답하는 양 도로시는 그들을 향해 번쩍 들었던 잔을 단숨에 비웠고, 어린 군주를 따라 모두가 똑같이 그녀를 향해 잔을 번쩍 들었다가 비워냈다.

 그 사이에서 카인만이 선명한 빛의 날개에 시선이 고정되어 흥미로운 눈을 빛낼 따름이었다.

 

 “오즈마입니다. 오즈가 더 강해지기 전에 도로시님께서 가져 오신 힘이죠.”

 

 언제 다가왔는지 피예로가 카인의 옆에서 짤막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카인은 느긋하게 잔을 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금빛 눈동자가 깜박이며 그녀 등 뒤로 펼쳐진 날개 모양을 덧그리나 싶더니 사뭇 감탄을 드러냈다.

 

 “절대 명령권이군요.”

 “…….”

 

 피예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 잠깐 바라보았을 뿐인데 어떻게 그 힘을 알아냈는지 그로써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피예로는 이제 카인을 제대로 바라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흠, 흐음.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고요. 도로시님이 선택받은 분이셨네요.”

 

 어느새 도로시의 등에서 빛의 날개, 오즈마는 사라져 있었다. 검 또한 원래 들어가 있어야할 검집에 넣어놓은 그녀는 자신에게 인사하러 오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주었다. 계속해서 몰려드는 인사 폭풍이 지겨울 법도 하건만, 도로시는 상시 미소로서 그들을 반기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아로새기듯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는 리프가 더없이 다정한 손길로 도로시를 끊임없이 챙겨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지던 인사 행렬이 끝나 춤이 시작될 무렵, 그제야 도로시는 피예로와 카인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리프가 그런 의중을 일찍이 알아챘는지 얼른 그들이 있는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피로한 기색 하나 없이 도로시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자 카인은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로시님.”

 “지내는 데 불편하신 건 없나요?”

 “아…….”

 

 능청스럽다 못해 뻔뻔하게 눈동자를 데룩 굴린 카인은 피예로를 힐끔 보았다가, 리프를 보았다가, 그리고 다시 도로시를 보며 샐쭉 웃었다. 어느 모로 보나 못 미더운 미소였다.

 

 “없습니다.”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거면 뭐든 괜찮습니다.”

 

 씨익, 그 말만 기다려다는 듯이 얄미운 입술이 얄미운 호선을 얄밉게 그려냈다. 피예로는 정말로 그리 느꼈다. 아마 리프도 그리 느꼈으리라.

 

 “엘이 생각보다 멀리 외출해버려서 말이죠. 중상을 입은 부상자들을 위해 포션을 업그레이드 하려면 심부름꾼이나 잡일이나 밥을 먹여주거나 불면증인 제가 제때 잠을 잘 자도록 노래를 불러주거나, 아무튼 이것저것 저를 뒷바라지 해 줄 몸종이 필요한지라……. 도로시님 정도면 저는 좋습니다.”

 

 청산유수마냥 흘러나오는 말은 얼핏 들으면 그럴싸했으나 점점 그 미미한 효력마저 사라지더니 맨 마지막 말이 끝날 때 즈음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얼굴이 벌게진 리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려던 도로시를 붙들고 연신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되어 눈만 깜박이는 도로시를 급기야 꽉 끌어안고 버티는 리프 곁에서 이유모를 두통에 이마만 감싸던 피예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도와드리죠. 도로시님은 이미 충분히 하실 일이 차고 넘치는 분입니다.”

 “아아. 아쉬워라. 오즈마에 대해서도 해체해볼 수 있었을 텐데. 나중에라도 꼭 시간 내주세요. 도로시님.”

 “절대! 그럴 시간은 없을 겁니다!”

 

 끝끝내 리프가 바락 성을 내게 만든 장본인은 여전히 방싯방싯 잘만 웃곤 또 다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도로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와 춤을 추실 시간은요?”

 

 그와 동시에 파티 홀에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들 아닌 척 하면서도 어느 누가 도로시와 먼저 춤을 출지 눈과 귀가 한데 모여 있는 탓에 인사만 하고 물러날 뿐, 그녀에게 춤을 권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대치상태가 형성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혼돈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카인은 염치는 무슨 눈치도 없이 뻔뻔하게 도로시의 춤을 강탈한 날강도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다 알고 저러는 겁니다.”

 “질이 더 나쁘네요.”

 

 사뿐히 겹쳐진 도로시의 손을 잡고 홀 한 가운데로 매끄럽게 나아가는 카인의 뒤통수에 피예로가 오늘 하루 종일 바로 곁에서 관찰했던 소견을 밝히자, 리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혹은 진작 예상했다는 듯 여하튼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는 양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막 춤을 추기 시작한 한 쌍을 바라보았다. 짜증나기로서니 아름답기는 했다.

 

작가의 말
 

 파티는 자고로 크레페와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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