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모아서, 그렇지. 그대로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잠깐만, 잠깐만, 천천히! 어려워어. 천천히 좀!’
‘하하, 알았어, 알았어. 자, 다시 천천히.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으으. 발 밟아버릴 것 같아. 무서워.’
‘넌 나보다 운동신경도 좋으니까 금방 배울 거야.’
가벼운 박자에 맞춰서 스텝을 움직이는 도로시의 머릿속에는 기억 하나가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한 겹, 또 한 겹, 새로이 덮일 때마다 행복 하나와 그리움 하나와 안타까운 분노 같은 마음들이 마구잡이로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것이 눈가로 모여들어 뜨거워졌을 때,
“도로시님.”
카인이 도로시를 불렀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유달리 가까워서일까. 퍼뜩 놀라 올려다본 금색 눈동자가 능청스레 휘는 반면, 도로시는 점차 미소를 잃어갔다. 울기 직전까지 내려앉아버린 그녀를 부드럽게 리드한 카인은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여린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도로시가 먼저 편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듯 그는 마냥 변함없이 태연한 미소만 드리웠다.
그렇게 하나, 둘, 셋, 사뿐히 턴을 돌고 다시 마주한 도로시는 어느덧 천연덕스럽게 그를 따라 웃고 있었다. 어중간한 허공만 응시하던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어디든 내놓아도 손색없는 군주가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군주는 지금 순간에 딱 맞는 제 역할을 잊지 않고 수행하기 위해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었다.
“아까 드린 말씀은 정말 빈 말이 아니에요.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시죠.”
“모두, 그러니까 현재 아예 의식이 없는 프레이까지 모두 살려내실 수 있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요.”
그들 사이에 잠시 잔잔한 선율만이 흘렀다. 그동안 무언가를 고심하던 도로시에게 이번에는 카인이 먼저 선뜻 이야기를 꺼냈다.
“3일 주시면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틀이요.”
그러나 도로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카인이 무어라 더 설득시키려 다시금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딱 잘라 조건을 정리해버렸다.
“벌써 오늘 하루가 끝났잖아요?”
자신이 말해놓고서도 영 민망했는지 입을 더 꾹 다물어버리며 엄한 표정을 지어보인 도로시는 슬그머니 카인의 눈치를 보았다. 돌아올 반응을 기다리면서도 그들은 유영하듯 사뿐사뿐 홀을 가로질렀다.
“그렇군요.”
이윽고 흘러나온 대답은 쾌활하기 그지없어서 도로시는 순간이나마 긴장했던 가슴을 속으로만 쓸어내려야 했다. 납득했다는 수긍을 듣고서도 은연중 믿지 못해 빤히 올려다보는 도로시를 리프와 피예로의 곁에 되돌려 놓은 카인은 손등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떼었다. 집요하리만치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맞선 도로시를 향해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제법 과장스러운 퇴장 인사와 함께 방긋 웃었다.
“그럼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도로시님.”
그리곤 그대로 몸을 돌려 각양각색 달콤한 케이크가 가득한 쟁반 하나, 역시 초콜릿이 가득한 쟁반 하나를 들었다. 그러다 퍼뜩 쿠키가 가득한 쟁반을 보더니 휙 고개만 돌려 피예로를 향해 눈짓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며 피예로 역시 묵묵히 도로시와 리프에게 허리 숙여 인사해보이고선 카인이 가리킨 쟁반과 달콤한 과실주를 병 채로 챙겨 뒤를 따랐다.
그들이 떠난 파티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떠들썩하게 계속되었고, 도로시는 이따금 떠오르는 불편한 기억을 애써 모른 척 하며 제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
“부상병들은 여기까지입니다.”
카인은 자그마한 주머니에 팔 한쪽도 모자라서 어깨까지 밀어 넣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피예로는 착잡하나마 그가 알려달라고 했던 부상병들의 정보를 차근차근 읊던 참이었다. 그마저도 끝이 나서 이제는 또 무슨 말을 해야 이 요상하게 민망한 적막을 무시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그러나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프레이라는 분은 어떤 분인가요?”
카인이 주머니에서 커다란 솥을 꺼내고 있었다. 놀랍게도 솥은 무슨 젤리처럼 자유자재로 모양이 변형되어 자그마한 주머니 입구에서도 잘도 빠져나왔고, 카인이 옆에 그것을 내려놓자 쿵, 묵직한 소음을 냈다. 피예로는 저 주머니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애써 모른 척 하며 가져온 과실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복잡한 머릿속에서 간단한 계산을 끝마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쪽나라를 다스리는 마녀이십니다. 서쪽나라는 예전부터 더운 지방인데다가 그 근방을 주축으로 마수가 자주 출몰하는 탓에 프레이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투의 화신이라 불리실 정도로 강해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쪽나라를 지탱하는 힘의 근간인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루실 수 있고, 만들어내실 수도 있습니다.”
“흐음, 흠.”
주머니에서 필요한 기구들을 전부 꺼냈는지 카인 역시 케이크 한 조각을 세 입 만에 죄다 밀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기가 보았던 것들을 떠올리듯 가만히 허공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케이크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어깨를 으쓱였다.
“기억이 안 나는걸 보니, 저랑 만나 뵌 적은 없나보네요.”
“……그걸 다 기억하십니까?”
“제가 기억력이 좀 유별나서 한 번 본 사람은 절대로 잊을 수 없거든요.”
그렇다고 한들 따로 이름을 알려주면서 소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는 걸까, 또 다른 의구심이 불쑥 고개를 들어 피예로는 카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카인은 마냥 씩 웃으며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날름 훑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특이하신 분은 어디 계시나요?”
“특이하다면,”
“제가 도로시님, 리프님과 함께 모셔왔던…, 보크님?”
피예로는 짐짓 놀란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으려 일부러 느긋하게 과실주를 머금었다. 유독 목이 타는 기분이 드는 것도 없지 않았다. 카인은 어느새 방 가운데에 놓인 벽난로에 솥을 고정하고 급하게 공수 받은 소량의 재료들을 하나씩 재어 보기 시작했다.
“그 분도 꽤 다치신 모양이었는데요. 게다가 포션으로 나을 분도 아니시고.”
“…카인님의 세계에도 안드로이드가 있습니까?”
피예로는 결국 참다못해 떠오른 질문을 바로 물었다. 카인은 즉각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돌려주는 거로도 모자라 하나를 더 덧붙였다.
“고칠 수도 있지요.”
피예로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도로시와 카인은 춤을 추는 동안 으레 밀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용은 지극히 단순했으리라. 조건이 어려운 만큼 보상은 확실한 거래, 그리고 카인은 그 거래를 받아들였기에 피예로를 시켜 재료를 가져오게 하고 정보를 전해 듣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피예로는 그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대신, 그에 대한 정보도 똑같이 알아낼 참이었다.
분명 계획은 그러했다.
“안드로이드는 현재 중앙 체계가 완전히 파괴되어 그들의 신체를 제조하거나 대체물이 될 만한 것들조차 수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도 오즈 작품이군요.”
“……네.”
무엇이든 다 알고 있다. 카인이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드는 저 기분을 감히 지울 수가 없었다. 변화에 민감한 정령 특유의 감각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또렷하고 선명하며 소름마저 끼쳤다. 카인은 초콜릿 세 개를 한꺼번에 쏙쏙쏙 입 안 가득 물고서 오물거렸다. 그러는 동안 그의 손은 빠르게 솥 안으로 재료를 채워 넣었다. 이윽고 카인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였을 때, 피예로는 참담함에 다물어버렸던 침음을 깨고는 그가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추가적인 정보를 말해주었다.
“환수들 역시 부상이 심각합니다. 평범한 동물들과는 다르기에 정령들이 몸을 치료할 순 있어도 마력에 있어서는 회복이 더딥니다.”
“마력이 없는 환수는 그저 평범한 금수에 불과하죠.”
“맞습니다. 특히 환수들의 군주이신 블레이언 공께서는 왼쪽 눈을 심하게 다치시어 정령 셋이 모여 겨우 지혈한 정도가 전부입니다.”
제 종족의 치부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평가를 스스럼없이 들려주며 피예로는 아래로 공손하게 내렸던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굳이 카인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이미 무력한 기분을 충분히 맛보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극한으로 내몰려 이제는 정말 단어 그대로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눈앞의 카인, 그리고 엘란츠가 그들을 구해줄 수 있다 하였으니 그들은 당장 보이는 동아줄은 무조건 붙들어 쥐어야만 한다. 그런 필사의 심정으로 피예로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리프님께서도 틈틈이 휴식을 취하고는 계시지만 마력 회복이 온전치 않습니다. 프레이님과 도로시님을 도와 후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은 그 분께서 다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리프님의 처방은 진작 말씀드렸어요.”
어느덧 기다란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은 카인이 쿠키를 하나씩 집어 오독오독 깨물어 먹으며 활짝 미소했다. 평소 드리운 미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화사하기 그지없는 모양새가 그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척도인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카인은 빙글거리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였다.
“절대안정. 맘 편하게 주무시라는 처방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어지지 못할 처방이다. 피예로는 듣는 순간 직감하고는 고개부터 저었다. 그리고 그 뜻을 바로 알아들은 카인은 한층 더 즐거운 기색이 되어 두 손을 맞비볐다.
“그럴 줄 알고, 도로시님께도 그 처방을 같이 말씀드렸지요.”
“그건……, 피할 수 없겠군요.”
“그렇죠?”
리프의 아픈 손가락, 아니 약점이라고 해도 되었다. 도로시는 리프에게 있어 그런 존재가 확실했으나 피예로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을 처음 보는 이라면 지극히 평범한 책사와 군주의 관계라고 생각하고도 남았을 텐데, 카인은 고작 두 번의 만남 만에 그들의 관계성에 근접했다. 아직 정확하게 파악한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겨야하나 싶던 무렵, 카인이 피예로가 미리 따라두었던 제 몫의 과실주로 입술을 축였다. 처음은 얕게 한 모금, 그리고 두 번째는 쭈우욱 들이키며 완전히 들이켰다. 정령이 만든 과실주 특유의 아릿함을 나타내듯 그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가 다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그리고는 살짝 입맛을 다셨다.
“자, 그러면 이제…….”
카인은 어느새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허벅지에 편히 올린 양 손가락을 서로 교차하여 맞물린 그는 섬뜩하리만치 집요한 호기심으로 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물었다.
“도로시님과 오즈에 대해 알려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