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이 떠올랐다.
엘란츠는 그 별을 올려다보며 기다란 장검에 흥건한 피를 툭 털어냈다. 바짝 오른 날이 깨끗해지다 못해 달빛을 받아 새하얀 검신을 드러냈다. 눈으로만 검신을 슬쩍 훑은 엘란츠는 그대로 검을 갈무리하여 밀어 넣었다. 환수, 토토는 입가에 묻은 혈흔을 푸르르 털어내더니 엘란츠에게 다가와 머리를 드밀면서 친근하게 비벼댔다. 사뭇 칭찬해달라는 표현을 내려다보던 그는 기꺼이 손을 뻗어 말랑말랑한 귀 사이며, 북슬북슬한 뒤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는 동시에 치료했던 부위가 다시 터져 심해지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엘란츠가 토토를 감싸며 자신이 도맡아 싸웠다지만, 무릇 전투의 기본은 상대보다 빠르게 약점을 찾아내어 찌르는 것이 정석이자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습격하려했던 먼치킨 수색대 역시 그 기실을 잘 알았기에 그들의 공격은 무조건 토토만을 향해 있었다. 덕분에 엘란츠는 토토의 주변 위주로 쓸어버리면 되었기에 경계 범위가 많이 줄어들 수 있는 반면, 토토 또한 부득이하게 아주 근거리에서 달려드는 검격에 맞서야만 했다.
게다가 특히 신체 자체가 작은 먼치킨의 특성상, 땅굴을 파서 아래에서부터 공격하거나 몸을 굴려 습격하는 공격이 많은지라 토토는 자연히 급소인 배와 얼굴을 맞지 않기 위해 바닥을 박차면서 튀어 오르기도 하고, 울창한 나무 꼭대기 높이를 넘지 않도록 야트막하니 날아올라야만 했다. 그리하여 상처가 덧나거나 새로운 상처가 늘지는 않았으나, 기력과 마력이 배로 들어 지쳐버렸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가서 쉬도록 하지.”
바로 쓰러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전투 현장을 되돌아본 엘란츠는 저보다 토토를 염려하듯 걱정스레 쓰다듬어주었다. 그 위로에 어린 환수는 가볍게 그르릉거리며 손에 머리를 비비곤, 이제는 멀어져 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성이 있을 방향을 슬쩍 돌아보았다가 그 반대 방향으로 먼저 앞장서 걸었다.
늑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엘란츠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다란 하늘에 별이 가득하여 펼쳐진 장관 위로 희미한 오로라가 드리워졌다.
“…아름답군.”
“그 전엔 더 아름다웠어.”
툭 튀어나와버린 엘란츠의 감상에 덧붙여진 목소리는 마냥 아이처럼 천진하지만은 않았다. 엘란츠는 놀란 기색도 없이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피식 웃어버렸다.
“이제야 좀 괜찮아진 건가.”
“밤은 우리들의 시간이거든.”
“그렇다고 무리하지 마라. 내일이 힘들어질 테니.”
본시 태생부터 야행성인 환수들은 낮보다 밤에 두 배의 마력을 보충할 수 있었는데, 여태 낑낑거리기만 했던 토토도 이제야 겨우 회복된 마력을 이용하여 전음을 실행한 모양이었다. 물론 환수의 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강하면 강할수록, 기본적인 마력 활용량이 늘어나 항시 전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토토는 아직 그에 비할 바는 아닌 듯 혹은 낮에 있던 전투가 유독 힘들었던 듯, 전음을 통해 겨우 들린 목소리가 퍽 지쳐있었다. 그럼에도 토토는 엘란츠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에 픽 코웃음을 치는가 싶더니 새치름하게 코를 바짝 들어 휘영청 밝은 달빛을 따라 한결 가벼워진 걸음을 총총총 바삐 옮겼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도 엘란츠는 버거워하는 기색 없이 토토를 따라 땅 밟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은 전투로 낭자했던 피 냄새가 더는 느껴지지 않는 곳까지 멀어져있었다. 그럼에도 토토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뜀을 뛸 정도가 되자, 엘란츠는 문득 제 주머니에 챙겨두었을 특수한 아이템에 대해서 떠올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토토를 발견한 시점에 바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을, 상태가 예상보다 훨씬 좋지 않은 탓에 미뤄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회복력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엘란츠는 조금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열쇠가 있다.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 걸려있지. 다만,”
“쓸 수 없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단호한 대답에 그는 고운 눈썹을 살풋 찡그리며 한 걸음정도 뒤에 있던 보폭을 좁혀 바로 옆까지 가까워진 토토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샛노란 눈동자는 생기로 번들거렸지만, 고통으로 일렁이기는 처음 만났을 때와 별 다를 바 없었다. 토토는 미미하게 회복되는 마력을 믿고서 무작정 이동 속도를 올리는 것이 분명했다.
엘란츠는 더 캐묻지 않고서 묵묵히 그를 앞질러 내딛은 공간 위로 검집을 꽂아 박았다. 그 주변으로 하얗게 일렁이는 빛이 순식간에 그들을 감싸는 원이 되어 퍼져나갔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토토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걸음을 겨우 멈추었다. 그러더니 곧장 눈앞의 엘란츠를 향해 으르렁 송곳니를 드러냈다. 엘란츠가 바닥에 꽂은 검을 통해 저를 가뿐히 짓누르고도 남을 본능적 압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환수들끼리 제 힘을 과시하여 정해놓은 영역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즉, 검에 봉인된 환수의 영역에 토토가 침범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갑작스러운 대치상태를 만들어놓고도 정작 본인은 뻔뻔하리만치 토토를 향해 얼른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했다.
“그렇다면 쉬어야한다.”
“안 돼. 이때를 놓치면 또 수색대에게 발목이 잡혀. 차라리 지금 최대한 멀리 달려둬야 해.”
“그리고 내일 뻗어버린 너를 들쳐 업는 건 나겠지.”
“……이 정도쯤이야 며칠이든 견딜 수 있어.”
“내가 귀찮다.”
엘란츠는 일언지하로 어린 늑대의 치기를 끊어내고선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구슬을 꺼내어 적당한 거리에 발로 툭툭 자리를 만들었다. 여전히 선 자리에서 으르렁대며 오만상을 찌푸리고만 있는 토토를 향해 그는 제법 무심한 소리만 내뱉었다.
“그럴 기운이 있으면 여기에 땅이나 파라. 모닥불을 피울 정도면 된다.”
발로 대충 그어놓은 표시 근처에 구슬을 툭 던져놓고, 엘란츠는 주변에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러니, 토토도 더는 고집 피울 수만은 없었다. 당장은 그를 무시하고 앞서 가보았자, 내일 정오가 되기 전에 따라잡힐 것이 분명한데다 수색대가 또 쫓아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오즈가 직접 자신을 찾아올 수도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를 미래를 상정해보던 토토는 결국 최대한 검집을 피해 빙 돌아 엘란츠가 표시해놓은 곳을 양 앞발로 성의 없이 툭툭 파기 시작했다.
시작이 어렵지, 나중에는 제 머리가 푹 박힐 만큼 열중하여 땅을 파헤치던 토토는 바로 지척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야 퍼뜩 자신의 처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새 엘란츠는 하룻밤 땔감으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모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무엇이든 나오는 주머니에서 커다란 담요 몇 개를 꺼내 자리를 만들어둔 참이었다. 괜히 머쓱해진 토토가 열심히 들이판 구멍에서 슬금슬금 고개를 빼자, 엘란츠는 가져왔던 나뭇가지를 구덩이 안에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꺼내놓았던 작은 구슬을 손가락으로 간단히 으깨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깨진 구슬의 조각에서 붉은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으나 엘란츠는 딱히 뜨거워하지도 않고서, 그 안으로 불꽃을 던져 넣었다. 그렇게 피운 모닥불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흙투성이가 된 앞발을 열심히 핥아내던 토토에게 펼쳐놓았던 담요 위로 누울 것을 권했다. 이 역시 처음 두어 번은 환자 취급 말라며 거절했으나, 귀찮음이 잔뜩 녹아있는 시선에 늑대는 담요 위로 지친 몸을 뉘어야만 했다.
“마셔둬라.”
“내 주인만큼 날 휘두르는 인간은 너밖에 없을 거야.”
“영광이군.”
픽 웃은 엘란츠는 토토를 치료할 때 먹여주었던 꿀 술을 야트막한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찰랑거리는 정도로 남은 꿀 술을 한 모금에 다 마셔버리고서 엘란츠는 저 역시 느긋하게 담요 위로 몸을 뉘였다. 담요 모서리 부분을 약간 접어 만든 두툼한 베개 위에 머리를 댄 그는 훨씬 더 광활하게 펼쳐진 것만 같은 밤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딱히 별을 헤아리지도 않았고, 순수한 감상에 젖어있지도 않았다. 엘란츠는 그보다 한층 깊은 어떠한 곳을 보듯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마음을 비웠다한들 조급함은 영 버리기 힘겨웠다. 특히나 엘란츠가 강하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으니, 돌아가고 싶다는 귀소 본능은 한층 더 속을 끓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토토는 눈을 지그시 감고선 무던히도 안달이 난 심장 박동을 추스르기 위해 온갖 평온한 기억들을 떠올려야만 했다. 잠시 마비되었던 아픔과 함께 돌아온 이성이 엘란츠의 판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일시에 몰려드는 피로감에 의해 전신이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축축 늘어져 괴로운 몸과는 달리 정신은 매우 말짱하다는 것이었다. 야행성인 탓이 졸리지 않는 것이 제일 난해한 긴급사항이었다. 토토는 짐짓 눈을 질끈 감아보기도 하고, 애써 코에 남은 꿀 술의 향기를 쫓아 취기라도 바랐건만 오히려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것만 같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늑대는 점차 생기가 돌며 말똥말똥해진 노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주변을 살폈다. 정확히는 엘란츠가 잠이 들었는지 확인했다.
“…양이라도 세라.”
새빨간 눈 역시 피로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러자 토토는 오히려 조금 즐거워졌다. 잠도 오지 않고, 몸은 무거워 늘어지고만 있으니, 이보다 더 대화하기 좋은 타이밍은 없으리라. 대꾸도 없이 커다란 눈꺼풀을 깜박이며 저만 바라보고 있는 기대치를 힐긋 살펴본 엘란츠는 피식 웃어버리고서 토토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직전보다 묵직해진 침묵을 엘란츠는 불편해하기는커녕 도리어 즐기는 모양새로 한참동안 환수의 머리며 턱이며 목덜미 그리고 등까지 길게 쓰다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토는 외로움을 곁들인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넌 이곳의 인간이 아니니, 처음부터 이야기해주지.”
“나는 듣는 건 잘 한다. 말하는 건 다른 놈 특기지.”
픽 웃는 엘란츠를 밉지 않게 흘긴 토토는 잠시 답지 않게 말을 골랐다.
“…원래 오즈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근원을 가리키는 말이야.”
“이 세계 그 자체란 뜻인가?”
“그래. 원래대로라면 오즈는 내 반쪽이자 내 주인인 도로시가 될 예정이었어.”
“…….”
“그 날, 별이 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붉은 눈동자가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