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만 안 휘둘렀지, 흡사 전투나 다름없는 회의가 끝났다.
방으로 돌아온 카인은 쉴 틈도 없이 빈 솥을 다시금 차례로 채우기 시작했다. 엘란츠 또한 방에서 창문이 제일 넓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인과 똑같이 생긴, 색만 다른 주머니에 든 것들을 하나씩 늘어놓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온 피예로까지 슬그머니 카인의 옆에 서며, 그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구경이라기엔 신중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어서 가라고 쫓아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전투 도중에 사용할 수 있는 응급 포션을 만들어둘까 하는데요.”
“…….”
그래서 무엇을 만들려는지 알려주던 카인은 문득 마주친 눈동자에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신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정령의 눈에 어두운 것들이 한가득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이 세계를 위해 고심하는 현자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만큼 순수한 걱정과 슬픔, 우울 같은 감정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카인을 위한 마음이었다. 그렇기에 더욱이 모를 수 없어서 카인은 손에 쥐고 있던 재료를 솥 안으로 대충 툭 던져 넣고서는 피예로를 마주 보고 생긋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네, 알아요. 감사합니다.”
“…….”
정령은 울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로 생기 넘치는 금색 눈동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이상하게도 뾰족한 수가 없어 막힐 때쯤이면 어김없이 카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임무는 당연히 그들의 몫이 되었다. 그쯤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설명을 믿지 못하면서도 믿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한 거래였다.
“…정말, 가져가실 생각이시군요.”
“네. 그러려고 온 거니까요.”
피예로는 적막 속에서 저를 노리며 더욱 날카로워진 시선을 느꼈다. 소름이 식은땀처럼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꼿꼿이 세운 허리와 어깨가 뻐근해지리만치 시선은 끈덕지게 피예로를 옭아매었다. 그럼에도 피예로는 그에게 물어야만 했다. 묻고 싶었다. 그래서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덜덜거리면서 목소리를 내었다. 다행스럽게도 볼썽사나운 신음은 나오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역시…, 도로시님을…….”
“카인.”
언제 다가온 것일까, 피예로는 눈 깜짝할 새에 카인의 뒤에서 나타난 엘란츠와 멍하니 눈을 마주했다. 붉은 눈동자는 프레이보다도 붉었고, 찬란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시선이 스치기만 해도 느껴지던 두려움이 어째서인지 경외로 바뀌어 아득해지려는 순간, 엘란츠가 허리를 숙였다.
카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갑자기 뒤에서부터 그것도 위에서부터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지만,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바로 지척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소스라치기는커녕 엘란츠가 뒤에 있거나 말거나 태평했다. 오히려 편안한 것 같아보였다. 그런 그들의 사이로, 정확히는 카인의 무릎 위로 자그마한 주머니가 툭 던져졌다. 그러면서 살짝 벌어진 입구에서 새끼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되는 큼지막한 산딸기가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산딸기!”
“과자 같은 것 말고 차라리 과일을 먹어.”
“역시 우리 엘밖에 없다니까~”
“…다시 뺏기 전에 조용히 먹기나 해라.”
“응~”
신이 나서 냉큼 산딸기 서너 개를 입에 쏙쏙 집어넣으며 행복해하는 카인을 본 체도 하지 않은 엘란츠는 다시 마주친 피예로를 바라보며 무심히 눈짓했다. 붉은 눈동자가 가리키는 방향은 두말 할 것 없이 방문이었다.
“쉬고 싶으니 나가.”
그거로도 부족해서 찍 소리조차 힘든 축객령까지 떨어지고야 말았다. 잠시 자리를 뭉개며 버텨보려는 피예로의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핑계가 떠올랐지만, 엘란츠는 부담스러우리만치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압박을 주었다. 잠깐의 찰나조차 허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탓에 피예로는 괜스레 미적거릴 수도 없었다. 꾸물거리면서 계속 카인을 힐끔거리는 그에게 엘란츠는 퍽 귀찮은 기색으로 적당한 구실거리마저 차단해버리고 말았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
“……실례하겠습니다.”
“부디.”
피예로가 완전히 방을 나서고 문이 닫혔지만, 엘란츠는 여전히 선 채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침묵이 흐른 후, 잘 들리지도 않는 발걸음이 비척비척 멀어져서야 엘란츠는 창가에 늘어놓았던 제 자리가 아니라 깨끗이 정돈되어있는 침대로 향했다. 한 손으로 이불 끄트머리를 잡아 확 잡아끌자 제법 묵직할 법한 이불은 얇은 새틴처럼 팔랑거리면서 그의 손에 쉬이 이끌렸다. 바닥에 닿지 않게 대충 품에 안아들고서 엘란츠는 어느새 산딸기를 죄다 입 안으로 쑤셔 넣어 오물거리는 일에 집중한 카인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다 먹었나?”
“…….”
무어라 입을 열려다 냉큼 다문 카인은 그저 씩 웃으며 요동치는 제 양 볼을 가리켜보였다. 짤막한 한숨 같은 것을 툭 내려놓은 엘란츠는 카인의 머리 위로 손에 든 것을 그대로 떨어트렸다.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이불이 몸을 짓누르자 반사적인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푹신한 천 안쪽으로 묻혀버렸다. 입에 든 산딸기를 가까스로 삼킨 카인이 몸을 짓누르듯 감싸는 이불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엘란츠는 창가에 늘어트려 놓았던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갑갑한 안쪽에서 겨우 벗어나 숨을 고른 카인은 샐쭉 웃고선 푹신한 이불을 아래에 깔고 엎드리며 늘어졌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엘.”
“입 다물고 잠이나 자라.”
“이거 끓는 것만 보고.”
빨간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저를 흘겨도 카인은 마냥 웃기만 했다. 어깨까지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는 항변을 표하자, 엘란츠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자라.”
“하하하!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손까지 팔랑팔랑 흔들어 보인 카인이 이불 위에서 편한 자세를 찾아 무던히 꾸물거렸다. 이윽고 보는 사람이 다 불편한 새우잠 자세로 웅크린 그의 숨소리가 나붓하니 느려졌다. 턱을 괴곤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엘란츠는 쯧, 혀를 차더니 재차 몸을 일으켰다. 그새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인지 깰 생각을 않는 카인의 머리에 베개가 놓이고, 몸 위에 얇은 담요가 덮였다. 그리고 엘란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절망스러웠던 그 날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도로시는 빠르게 전열을 갖추는 부대를 바라보며 새로이 휘몰아치는 감회에 전신이 떨렸다. 절반 이상이 괴멸하다시피 무너졌던 수뇌부는 완전히 회복되어 당장이라도 전장을 휘어잡을 것만 같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선망하여 모여든 이들 역시 각자 저 마다의 다짐을 새로이 아로새겼다. 가슴이 뛸 수밖에 없는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 장관보다 조금 더 뒤쪽에 카인이 서 있었다. 그는 일전에 프레이를 제압할 때 들고 있던 기다란 흑색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끄트머리 모양이 뾰족한지라 얼핏 보면 장창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여튼 그가 쥔 지팡이 아래에는 마법에 대해 문외한이 보아도 알 수 있는 마법진의 시작점이 있었다. 선의 시작이었다. 리프의 마법과도 비슷해 보였으나 어딘가 다른 신기한 모양을 도로시는 저도 모르게 집중해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
무언가 낯이 익다.
무엇인지 콕 집어 이야기할 수 없는 기괴한 위화감이었다. 도로시는 마법진이 그려진 곳을 바라보며 그 정체를 생각해내려 애썼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마도 이 근방을 크게 한 바퀴 돌았음이 분명한 엘란츠가 손에 쥔 무언가를 냅다 카인에게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악! 짤막한 비명에 이어 아프다며 칭얼대는 엄살이 울려 퍼졌고, 엘란츠는 그런 카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도로시가 있는 중앙부까지 다가왔다. 카인은 지치지 않고 무어라 연신 찡얼거리면서도 엘란츠가 집어던졌던 무언가를 조심조심 잡아들었다. 작은 주머니처럼 보이는 무언가에서 쉴 새 없이 붉은 가루가 떨어졌는데, 카인은 옷소매를 길게 늘려 잡는 거로도 모자라 최대한 묻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트려서 들고는 도로시가 있는 중앙부로 돌아왔다.
“준비 다 됐습니다!”
쾌활한 미소와 함께 가벼운 뜀박질로 가까워진 카인은 모여든 시선이 여간 기뻤는지 손에 든 그것을 덜렁덜렁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붉은 가루는 그들의 주변으로 팔랑팔랑 퍼져나갔다.
“설마 그거…….”
“환수의 심장이군.”
동족을 알아본 블레이언이 눈을 번뜩이면서 발톱을 세웠다. 그가 선 바닥이 움푹 팼고, 그의 주변으로 환수 특유의 마력이 넘실거리며 그렇지 않아도 등등한 살기가 날카로워졌다. 금방이라도 카인의 목이나 심장을 꿰뚫어버릴 듯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태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예, 저와 특별한 인연이지요. 그러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블레이언님께서는 환수의 왕이시니, 아시잖습니까?”
“…….”
“저번처럼 단순히 제 마력을 사용해도 상관없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빨리 지쳐버려서 말이죠.”
그들 주변을 시작으로 천지를 뒤흔들어버릴 기세로 일렁이던 마력이 천천히 시간을 들여 가라앉았다. 여전히 팽팽한 긴장까지는 어찌하지 못했으나 블레이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우뚝 섰다. 그 모습을 짐짓 흐뭇하게 바라보던 카인은 손에 든 환수의 심장을 도로시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 가실까요?”
도로시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지팡이는 환수의 심장을 꿰뚫었고, 검은 빛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