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시는 아침이 밝아오는 시각에도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새로운 하루를 알려야 할 시장이며 도시는 누구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적막으로 금방 깨어질 살얼음판 그 자체였다. 실제로도 얼음 요새가 되어버린 에메랄드 성에서부터 한기가 풀풀 풍겨 나온 탓에 주변은 이미 얼음과 고드름이 가득한 북쪽나라를 연상케 했다. 새마저 지저귀지 않는 도시의 중앙인 에메랄드 성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은 새벽 내 드리워진 아침 안개가 사라지고, 해가 완전히 떠올라 동이 터서부터였다.
우우우우웅――
검은 구체는 에메랄드 성문 바로 앞에서 나타났다. 기묘함 그 자체였다. 검었으나, 빛이 났다. 그 구체는 제멋대로 점점 몸집을 불리는가 싶더니, 곧 그 아래에서부터 지축을 뒤흔드는 강진이 퍼져나갔다. 끝도 없이 뻗어나갈 것만 같던 검은 빛무리는 성채 앞을 가득 채우는 정도가 되어서야 멈추었다. 거주지역 앞까지, 딱 그 정도만 필요하다는 듯이 멈춘 그것은 어렴풋이 색이 바래지는가 싶더니 불투명한 배리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다수의 인영이 쿵, 쿵, 바닥을 박차며 전쟁을 알렸다. 불투명한 배리어 마저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지기 무섭게, 맨 앞 그것도 중앙에 선 선봉장은 검을 높이 들고 에메랄드빛으로 찬란한 날개를 활짝 펼쳤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탈환합니다!”
높이 올려 하나로 묶은 갈색의 머리칼이 스산한 바람결에 따라 흔들렸다. 자신의 등을 굳건히 지키는 이들을 살풋 돌아본 그녀는 다시 앞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즈마에게 고한다!”
펼쳐진 날개는 점점 더 넓게, 높이 크기를 늘려가며 위용을 과시했다. 지금까지 보였던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기실을 일깨우며 이 세계 모든 신민의 뜻이 모인 절대명령권의 힘은 저 스스로 선택한 소녀에 의해 널리 개방되었다.
“이 세계를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축복을!”
“와아아아아!”
“진정한 오즈를 따르라!”
“가짜 오즈를 몰아내자!”
뻗어나간 축복이 닿자 함성은 더욱이 높아졌다. 그리고 앞을 향했다. 이제는 예전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에메랄드 성으로, 얼음 요새로 말이다.
까드드득! 까드드득!
그런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얼어있던 바닥이며 고드름이 저들끼리 엉기며 스스로의 모습을 변형했다. 놀라서 잠시 굳어버린 사이, 거대한 인간 형태의 얼음병사가 만들어졌다. 이전 전투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기에 도로시는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가 금세 먼저 앞을 향해 나아갔다. 나아가면서 에메랄드빛 날개가 두어 번 번쩍였다. 말로 내뱉지 않은 순수한 의지로도 오즈마를 사용할 수 있다는 반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평범한 검격으로 깨지지 않는 얼음 거병에게서 튕겨져 나온 즉시, 검을 잡지 않은 손을 뻗었다.
쐐애액!
그러자 펄럭이며 중심을 잡게 도와주던 에메랄드빛 날개가 활짝 펴지더니 그대로 화살 같은 것을 쏘아냈다. 부러지지 않고 버티는 게 용할 정도였던 검과는 달리 날개의 빛으로 만들어진 화살은 거병을 명중하는 족족 얼음으로 만들어진 신체를 깨부쉈으나, 그들은 평범한 얼음이 아니었다. 오즈의, 아니 오즈가 삼킨 프리아의 힘이란 그러했다.
다시 자체적으로 몸을 수복하는 기현상에 다들 마른침만 삼키며 거병이 휘두르는 공격을 피하느라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는 사이, 단순한 폭풍이라 부르기 힘든 얼음 바람이 몰아쳤다. 자잘한 얼음이 눈처럼 바람에 섞여 휘몰아치느라 상처는 물론,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해 다들 허우적대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내가 불로 저것들을 녹여버리면!”
“안 돼!”
카인은 전장에 그들을 옮겨주자마자 주변의 얼음 위로 손을 올린 채, 눈까지 감아가며 새로운 마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러한지라 그의 마법 시전이 완성될 때까지 리프는 카인 옆에서 모든 방해요소를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프레이가 무작정 떠올린 수에 절대적인 반대를 펼쳤다.
“네 불꽃이 바람에 섞이면 그게 더 문제야! 이게 불 폭풍으로 변하면 우린 자멸할거야!”
“그럼 뭐 어쩌자는 건데!”
리프의 반론에 그대로 손을 내려 주먹까지 쥔 프레이는 어떻게든 발걸음을 움직여 도로시를 찾았다. 오즈마의 힘으로 간신히 얇은 배리어를 생성해 낸 도로시는 유독 이런 마법에 약한 환수들을 최대한 감싸느라 온갖 얼음 파편을 죄다 맞으며 버티는 중이었다. 리프 역시 금빛 배리어를 만들어냈음에도 카인과 자신을 감싸는 정도가 고작이라 지팡이를 쥔 손이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치기도 전에 오즈의 마법 몇 번으로 전세가 역전되어버렸다. 꽉 깨문 어금니가 아릴 법도 하건만 리프는 오로지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려 애를 쓰다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긴 머리칼을 한 갈래로 낮게 묶은 카인은 여전히 눈을 감으면서까지 모든 감각을 자신의 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의 반증으로는 닿기만 해도 어떤 것이든 얼려버렸던 얼음이 그 손에는 그저 얌전한 얼음덩어리처럼 가만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위하는 일임은 틀림없겠지만, 무엇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리프는 계속해서 카인을 힐긋거리며 애만 태웠다. 거기다 얼음 폭풍이 잦아들고, 얼음 거병이 본격적인 공격 태세를 취하면서 리프 또한 지팡이를 쥔 손에 땀을 겹쳐 잡았다. 아무리 정령 못지않은 세월을 살면서 마법을 연구했을지라도, 전투에는 소질이 다소 필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리프는 그 전투 소질이 없는 축에 속했다. 그런들 어떠하리. 지금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쩌적, 쩍. 금이 가기 시작한 탁한 금빛의 배리어를 지그시 노려보던 그녀는 이윽고 자신의 지팡이 끝에 마력을 모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높이 들어 바닥을 내리치려는 순간, 뒤에서부터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지팡이가 땅에 닿지 못하도록 단단히 그 끝을 틀어쥔 카인은 당황으로 굳어버린 리프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짓는가 싶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불러냈다.
“엘! 부탁해!”
콰아아앙!
그 말만을 기다렸을까. 폭풍으로 정신없는 통에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당연지사 카인의 목소리는 널리 퍼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런데도 에메랄드성의 입구였던 방향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도 폭파한 것으로 보이는 잔해가 리프와 카인이 있는 곳까지 굴러왔다. 놀라거나 피할 틈도 없이 리프는 사라졌던 배리어를 즉각 재발동시켰다. 견고한 금빛 배리어가 그들을 둘러 감싸면서 크고 작은 잔해들이 그것에 부딪치는 순간 산산조각나면서 흩어져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뚝 멈추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을 이해하기보다 앞서, 도로시가 고개를 들어 뻥하니 구멍 뚫려버린 입구를 바라보았다. 제 반쪽의 마음을 바로 알아챈 토토가 그녀를 태우고 쏜살같이 그 안쪽을 파고들었다. 반사 행동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침입자가 들어오자마자 급속도로 다시 얼어버리는 얼음에 입구가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당황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리프에게 카인은 여상 산뜻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 대신, 얼음 폭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면서 순식간에 조용해진 사위를 둘러보았다. 남은 것은 얼음 거병, 그리고 알아서 다음 플랜을 수행하기 위해 지면 아래에서부터 튀어나오기 시작한 먼치킨 군대뿐이었다.
“엘이 입구의 마법석을 폭파해서 이제 폭풍은 없을 겁니다. 도로시님께서 들어가셨으니 피해 다니느라 마법을 쓸 여유도 없을 거예요. 얼음 거병은 중심부의 코어만 노리면 되니까 그건 엘이 진작 눈치 챘을 거고, 먼치킨은 땅 드워프와 흡사해서 독만 조심하고 수세로 밀어붙이…….”
“그래서 이 얼음은 언제 녹일 건가요!”
“아, 그게, 이 세계의 마법을 분석했으니까 지금부터 조리에 들어가자면, 10분?”
“5분!”
“도로시님께서 협상을 누구에게 배우셨나 했더니, 리프님이셨군요?”
“시끄러워요! 당신!”
방긋 웃는 얼굴을 쥐어박기라도 할 기세로 리프는 맹렬히 소리쳤다. 그러나 금빛 배리어가 퍼져 나오는 지팡이를 놓칠 새라 자세만큼은 꼿꼿해선 요지부동이었다. 굳었다는 표현이 걸맞을지도 몰랐으나 카인은 구태여 그녀를 놀리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검은 지팡이를 가볍게 한 바퀴 돌렸고, 검은 지팡이는 눈 깜짝할 새에 깃펜 사이즈 정도로 작아져있었다. 카인은 냉큼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얼음 위로 작아진 지팡이의 뾰족한 끝을 갖다 대는가 싶더니, 정말 깃펜이라도 쓰는 것처럼 사각사각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들을 향해 무작정 덤벼드는 얼음 거병과 먼치킨을 혼자서 막아내던 리프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무릇 환수의 왕이라 불리는 블레이언은 도로시조차 감히 기승하지 못했다. 블레이언 본인이 허락했어도 환수가 가진 특유의 기백이 있어 함부로 만지기도 어려운 존재인지라, 그를 치료하기 위해 정령들은 스스로를 축복하여 공포에 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블레이언을 타고서 거병을 아무렇지 않게 한 번의 검격으로 부숴나가는 엘란츠는 가히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순간이, 찰나의 영원을 기록한 명화처럼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하다하다 이젠 하늘을 나는군.”
리프의 코앞까지 훅 가까워져선 근방의 거병을 모조리 쓸어버린 엘란츠가 갑자기 블레이언과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혀를 찼다. 그를 따라 한 박자 늦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리프 또한 기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성벽에 붙어있던 얼음들이 꾸물거리더니 그들이 그렇게 쓰러트렸던 거병으로 재창조되는 거로도 모자라 일부 어떤 것은 환수의 모양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거병은 그것을 타고 하늘을 날기 시작한 것이다.
피로함이 섞인 붉은 눈동자는 더욱이 가늘어져 손에 쥔 안장의 손잡이를 놓아버렸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건만, 엘란츠는 손에 쥔 검을 허공에 한번 휘둘렀고 검은 어느새 활이 되어 있었다. 블레이언은 묻지도 않고 하늘로 솟아올라 거병들이 가장 많은 지점까지 달음박질쳤다. 분명 활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화살도 걸려있지 않은 시위에 빛이 하나, 둘, 모여드는가싶더니, 무언가 터지는 듯 소리가 폭발했다. 그리고 거병은 산산이 가루가 되어 쓰러졌다. 그 모양새는 흡사 엘란츠가 빛을 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그 빛을 향해 홀린 듯이 손을 뻗은 리프의 귓가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천진한 목소리가 꽂혀들었다.
“다 됐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리프는 또 다른 장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제 주인의 키를 훌쩍 넘길 만큼 길었던 지팡이를 다시 쥔 카인이 그 뾰족한 끝을 아까 열심히 끼적거렸던 얼음 위에 콕 찍자, 거기에서부터 검은 빛이 조금씩 일렁거리며 넝쿨처럼 얼음을 타고 성벽 전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뾰족하면서도 거친 표면의 얼음으로 뒤덮여 요새화되었던 성은 단숨에 검은 빛으로 둘러싸이는가 싶더니, 퍽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와장창 산산조각이 되어 검은 빛의 비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 신비로움은 엘란츠가 보여준 광경과는 비슷하면서도 사뭇 달랐다. 거기다 요새처럼 견고한데다가 높기만 한 성 안으로, 도로시와 토토가 먼저 들어간 성 안으로, 드디어 저 빌어먹을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엘란츠가 일격에 뚫어놓은 덕분에 훨씬 넓어진 입구도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래서 리프는 전개했던 배리어를 더욱 견고하게 다잡으며, 당장에라도 뛰어갈 기세로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움직이면 당연히 배리어도 움직이게 되므로 카인의 의견을 확인하기 위함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카인 역시 주섬주섬 어설프나마 뛸 준비를 끝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실현되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구궁!
카인이 전개한 대마법으로 그들이 에메랄드 성 앞에 도착했을 때와 차원이 다른 강진이었다. 무언가 부서지는 듯 혹은 깨지는 듯 가히 짐작하기 힘든 폭음이 진동했다. 공기가 찢기는 착각까지 일으키며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던 리프와 카인은 그들이 선 자리 주변으로 갈라지는 바닥을 피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성채를 따라 깊은 균열이 빠른 속도로 갈라지기 시작한 탓에 그들은 기껏 뚫어놓은 입구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문제는 그것에 놀랄 틈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얼음 요새에서 벗어난 에메랄드 성은 하늘로 떠올랐다. 귀를 찢을 것만 같던 폭음의 정체는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 그리고 갑자기 뒤바뀌어버린 공기의 흐름 때문이 분명했다. 그러나 퍽 안타깝게도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고 해서 당장의 현실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자리에 선 모두가 동일했다.
믿기 힘든 전세역전을 마주하고 침묵에 휩싸인 적막을 깬 것은, 카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박장대소였다.
“하하하하하하!”
어처구니가 없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참이나 배까지 부여잡고 웃던 그는 웃느라 눈가에 고인 물기를 손등으로 대충 훔쳐내며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허공에 뜬 성을 올려다보았다.
“이야아~ 이건 생각도 못 했는걸?”
찰나, 황금빛 눈동자가 이채를 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