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구구구구궁!
어쩐지 일이 잘 풀렸다.
성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땅덩어리까지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는 장관을 바라보며 엘란츠는 혀를 찼다. 게다가 아래쪽에서는 희미하나마 신나게 웃어젖히는 카인의 웃음소리까지 들리는 걸 보아하니 빠른 대처를 바라긴 힘들 것이었다. 당분간 지속될 장기전을 예상한 그는 안장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꾹 바투 쥐었다.
고삐를 썼더라면 더 편했을 것을, 엘란츠는 한사코 거절했다. 이유는 지극히 당연했다. 블레이언이 환수이기 때문이었다. 별 것 아닌 듯 보일지라도 그가 보인 작은 존중은 블레이언에게 상당한 호감을 산 모양이었다. 엘란츠가 원하는 속도와 고도, 방향이며 각도까지 환수의 왕은 싫은 소리 하나 없이 잠자코 들어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공격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범한 물리적 공격은 통하지 않는 사실을 먼저 알아챈 엘란츠가 귀띔해준 덕분에 모든 공격에 마력을 섞어 평소보다 피로도가 빠른 속도로 높아졌으나 견딜 만 했다.
적어도 성이 하늘을 날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도로시 공은 이미 성 안이네.”
“……버티길 바라야지. 그보다,”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엘란츠가 주변을 신속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환수의 모습을 따라한 얼음 조각들과 그 위에 저처럼 올라탄 거병을 확인한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손에 쥔 롱 소드를 능숙하게 휘둘러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파편을 베어버린 엘란츠가 다시금 허공을 길게 베는가 싶더니, 순간 검신은 찬란한 빛이 확 밝았다가 잦아들면서 바뀐 형태를 자랑했다. 작은 검날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태는 거대한 톱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것들을 하나라도 더 없애야 한다.”
엘란츠가 평범한 검과는 다른 형태로 큰 원을 그리는 모양새로 그것을 휘두르자 사슬처럼 뻗어나간 검날들이 춤을 추듯 주변의 적을 모조리 격파하고서야 제자리로 빨려 들어오듯 돌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재생 가능한 적군은 시시각각 창공 가득 포진하여 곳곳에서 서로를 떨어트리기 위한 격추가 벌어졌다.
힐긋 내려다본 지상도 그렇게 여유가 넘치는 상황은 아니었다. 땅이며 숲에 남은 얼음은 족족 거병으로 변했고, 일전에 엘란츠가 토토를 구하면서 격파시켰던 먼치킨 부대 역시 끊임없이 맹공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평범한 공격이 통한다한들 먼치킨의 수가 너무도 많아 난항을 겪기는 매한가지였다. 얼핏 보인 검은 빛의 반짝임을 확인한 엘란츠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땅에 있는 이들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제 코가 석자라고 했던가, 쯧 귀찮은 듯 혀를 차면서도 엘란츠는 저와 함께 싸우는 이들 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 하늘에 뜬 성 주변을 크게 돌아보았다.
자신을 기꺼이 태워준 블레이언, 그리고 광기에 가득 찬 상태로 보이는 모든 것을 죄다 태워버리는 마녀, 다수 개체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도록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는 안드로이드,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 폭풍은 멎었고, 입구는 여전히 커다란 구멍으로 뻥 뚫려있는 상태지만 언제든 다시 막힐 수 있는데다가 지금은 기동성이 더 높아진 문지기가 지키고 서 있다.
못할 것도 없으나 극단적인 방법들만 떠올라 심란하던 엘란츠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꽂혔다.
“그러니까 하늘은 맡길게! 엘!”
검격이 부딪치는 소리, 활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용기를 쥐어짜내는 기합 소리와 절명을 맞은 신음 소리가 뒤엉킨 전장의 한복판에서 원망스럽게도 누군가의 목소리는 잘만 들려서 엘란츠는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찌푸린 표정을 고수한 그는 괜스레 성질을 부리는 것처럼 변형된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물론 그럴 때마다 잔뜩 벼른 검날들은 허공을 춤추는 족족 목표물을 깨끗하게 정리하며 잔해만을 남겼다.
끝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자잘한 격전을 무수히 치르는 와중에도 에메랄드 성은 착실히 위로, 계속해서 상승하며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환수인 블레이언도 구름층에 다다르면 시야확보는 물론이오, 힘겨워질 것은 당연했다. 슬슬 무슨 수든 시동을 걸어야겠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지려는데, 그들 옆으로 엔진소리가 단숨에 가까워졌다. 보크였다.
“이보다 더 위로 가면 위험하다. 시야확보가 어렵고, 기온이 낮아져 기동성이 떨어진다. 대책을 강구해야한다. 서쪽마녀는 현재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다.”
“또 이성을 잃었군.”
“군단장이 성으로 혼자 진입했을 때부터. 이미 우리 개체 5%가 서쪽마녀에게 당했다.”
“그래도 이번엔 적은 편이군.”
“적군을 확인하는 즉시 서쪽마녀가 있는 방향으로 몰아갔다가 미처 도망치지 못한 개체다.”
블레이언은 알 만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크는 그런 블레이언에게서 시선을 조금 더 올려 엘란츠를 바라보았다. 회색 눈동자의 정 가운데, 동공이 평범한 생명체와는 약간 다르게 좁혀들고, 넓어지기를 반복하고서야 그는 본제를 꺼냈다.
“분명 검은 마법사는 검사에게 하늘을 맡긴다고 했다. 대책이 있나.”
이 혼란 그 자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그걸 들은 것도 대단하건만, 그 한 마디에도 희망을 걸고 엘란츠를 찾아온 보크의 의지는 그보다 더 절실해보였다. 엘란츠는 짐짓 입을 꾹 다물고서 보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가 그의 뒤에서 달려드는 거병의 검을 휘어지는 작은 검날을 휘둘러 부숴놓았다. 물론 돌아오는 검날에 의해서 거병 자체도 산산조각을 만들어 놓은 그는 저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보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있기야 있지. 자칫하다 우수수 죽을 수도 있는 대책.”
“…….”
블레이언과 보크의 시선이 동시에 꽂히면서 따가울 법도 하건만, 엘란츠는 심드렁하니 또 조금 더 높아진 에메랄드 성의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쓰러트리고 박살을 냈어도 입구를 봉쇄하듯 포진한 거병은 여전히 건재했다. 엘란츠 혼자만 들어가는 거라면 문제가 아니지만, 이성을 잃었다는 프레이와 눈앞의 보크도 함께 들어간다면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문제의 답을 엘란츠에게서 찾는 것이었다.
“입구를 부쉈던 것처럼 한순간 길을 뚫을 수 있다. 아까 한 번 써먹었던 방법을 강도만 더 높이는 것이니, 지키고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더 경계하고 있을 거다. 그 말인 즉, 나는 쉽게 들어갈 수 있지만 너와 다른 녀석은 목숨을 걸지 않는 한 무리지.”
“하겠다.”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보크는 간결한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즉시 주변으로 몰려드는 거병을 향해 마력포를 쏘았다. 둔탁한 폭음과 파편이 날아들어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서쪽마녀에게 전해주고 오겠다. 기다려라.”
아무리 표정이 없다한들 다급하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보크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계획 진행에 대해 그 어느 대답도 하지 않은 엘란츠를 향해 부득불 기다리라며 이야기하고서 다급하게 불길이 치솟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블레이언만이 엘란츠가 입구를 뚫었던 당시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지라 생생한 기억을 떠올린 듯 전신을 잔뜩 경직시켰다. 안장 하나로 이어져있는 탓에 고스란히 느껴졌으나 엘란츠는 그다지 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검을 바투 고쳐 쥐었다. 그러자 직전과 비슷하게 하얀 빛이 스멀스멀 흘러나온 검신이 다시금 꾸물꾸물 모양을 바꾸어 거대한 랜스의 형태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한 거병 서넛이 동시에 그들을 향해 사방을 포진하고 달려든 것이다.
쾅!
그리고 엘란츠는 새삼스레 놀란 기색도 없이 아직 빛무리가 가시지 않은 랜스를 크게 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진공과 굉음, 그리고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증기 폭풍이 그들을 뒤덮었다.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것을 물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엘란츠는 찰나나마 드리워진 고요함을 만끽했다. 누군가가 달려들거나, 누군가에게 달려드는 전장에서 감히 느껴볼 수 없는 드문 경험인지라 블레이언도 딱히 갑갑하다는 투정을 얹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사이를 틈타 엘란츠를 찾는 방객은 애초부터 한 사람으로 정해져있었다.
[‘신의 긍지’가 ‘구원자의 눈’ 사용을 요청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요청을 승인합니다. 싱크 완료(싱크로율 100%).]
예상대로 떠오른 알림창과 문구를 확인한 즉시 요청을 바로 승인한 엘란츠의 왼쪽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석류알처럼 빨간 그의 눈동자에 어지러이 금빛이 퍼져나가는가 싶더니 선연한 금색으로 물들어 반짝였다. 진작 싱크가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란츠는 잠자코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자, 이윽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그의 안부를 물었다.
‘거기 상황은 어때?’
‘네 녀석이 얼른 무슨 수라도 쓰지 않으면 성채로 날려버릴 거다.’
보크에게 대충 이야기했던 계획을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내뱉으니 속이 다 시원해서 엘란츠는 피식 비릿한 미소를 입 꼬리에 걸었다. 엘란츠의 성정을 일찍이 눈치 챘을 상대방, 카인 역시 설핏 웃음을 머금은 것도 같았다. 이어서 들려오는 지령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신호하면 그걸 써.’
[싱크를 종료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울컥 치솟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연결을 끊어버린 엘란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그의 왼쪽 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새빨간 살기로 번뜩였다. 단순히 적군을 향한 투지라기보다는 지상에 있는 누군가에 대한 사사로운 빡침에 훨씬 가까웠다.
“……하아.”
속에서부터 우러나온 한숨에서 드러난 짜증은 심히 범상치 않아서 블레이언은 잔뜩 긴장하여 입구 방향을 노려보던 것도 잊고 제 위에 올라탄 엘란츠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엘란츠는 잔뜩 피로한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려 마른세수를 거듭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