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아스의 사과에 뒤를 돌아보았다.
바라본 아스의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휙-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눈앞에 들어오는 강한 빛에 손이 저절로 얼굴에 향했다.
햇빛? 아니 그나저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겠지?
“아스...?”
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아스는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아가씨.”
“아까… 죄송하다는 게 무슨….”
강한 빛은 그저 단순한 햇빛이 비쳐온 것이 아니었다.
내게 비춰 온 것은 검과 오라였다.
날카로운 검은 오라를 내뿜으며 내 배를 덮쳤다.
푹-
이미 눈치챘을 때는 검을 내 배에 쑤셔 넣은 터라 도망갈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그는 아무 말 없이 검을 비틀었다.
뚝- 뚝-
입과 배에서 떨어지는 피가 바닥을 물들일 때, 아프다는 감정보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그에게 배신당했다는 점이 내게 더 고통스러웠다.
“쨍그랑-“
무슨 접시 깨지는 소리 마냥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욕이라도 해주려던 순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두 남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가야 한다.
배를 움켜잡고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순간 아스를 바라보자 날 따라올 기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왜, 왜, 왜. 왜, 왜.
계단을 오르고 오르며 아스가 날 배신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한때 그를 사랑했던 추억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이제는 아니겠지만.
계단을 끝까지 오르자 눈앞에 보이는 건 낡은 나무문이었다.
끼이이이익-
너무 오랫동안 버려둔 탓인지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거기 다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에 뿌연 먼지라니.
창문이 없어서인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난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침대에 몸을 기댔다.
여기도 안심할 수는 없다.
꼭, 살아야 한다. 가족들과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살아서.
그다음은…?
혼자 살아남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상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미치겠는 건,
내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나의 오랜 친구들과 호위 기사라는 사실이다.
“푸흣, 아하하하하하-”
그냥 웃었다.
모든 것이 허탈하게만 느껴졌다.
웃으니 고통이 안 느껴진다는 착각이 들었다.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바로 몸을 일으켜 벽을 더듬거렸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벽돌 하나가 갑자기 푹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문이 열리자마자 벽을 짚고 안으로 들어갔다.
앞이 안 보였다 보였다 하는 게 불안감을 더 키워나갔다.
“아...으…어….”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게 돌아버릴 것 같았다.
드디어 눈앞에 문이 나왔다.
끼익-
문을 열자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름다운 꽃들과 그 위에 날아다니는 나비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표현 밖에 안 나오는 이 곳에서 모든 아름다움을 눌러버리는 나무 한 그루.
이 나무가 우리 가문을 지키는 ‘신목이다.’
“하…”
우리 가문의 신 같은 존재,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의 행동은 불결한 행동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기댈 곳이 필요했다.
무거워진 눈꺼풀에 눈을 감자 누군가의 인기척 소리가 났다.
더는 내게 도망칠 힘이라 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발소리가 내 앞에서 멈추자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흐릿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결국 아가씨께서는 이번에도 죽지 않으셨군요.”
“그래, 아스. 난 아직 안 죽었어. 그나저나 세상.. 쿨럭..”
‘세상 참 거지 같지.’
이것이 내가 아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나온 기침 한 번에 배 속에서부터 피가 올라와 입으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프진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인 거야?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내 말에 그의 표정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흐릿한 눈이지만 그의 웃긴 표정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부디, 나의 아가씨.”
아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칼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몸에서 기대고 있던 나무에서 따뜻한 열기가 느껴졌다.
무언가 홀리기라도 한 듯 붕 떠오르는 몸에 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스에게 말했다.
“안녕히….”
아스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또 알 수 없는 저 표정.
아스는 언제부터 저런 표정을 짓게 되었던 것일까.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배신당했다.
난 알고 있다. 네메시스가 아닌 난 죽었지만 상관없다.
껍데기는 살아있을 테니까.
[띠링- 미션 실패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