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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잎에 능금
작가 : 목탄
작품등록일 : 20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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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빛 스며, 나비
작성일 : 20-08-05     조회 : 652     추천 : 1     분량 : 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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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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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들강아지가 보송하게 돋은 물가에서 능금이 잉어 비늘을 긁는다. 귀해 뵈는 은장도로 야무지게 박박 긁어댄다.

 “오늘도 월척이구나.”

 배를 가르고 내장까지 말끔히 흘려보냈다. 입맛을 다시며 바지춤을 추스르는데 훤칠한 사내가 다가온다.

 “여기 있었네.”

 허름한 복색에도 낯빛만은 훤히 빛나는 홍옥이다. 능금이 활짝 웃으며 손질한 잉어를 번쩍 들어올린다. 저물녘 햇살이 아무렇게나 털어낸 비늘에 튕겨진다.

 “자, 네가 좋아하는 고기!”

 “먼저 먹고 있어. 행궁 갔다 올게.”

 “행궁? 네 차례야?”

 홍옥이 고개를 까딱한다. 능금이 손질한 잉어를 조릿대에 꿰어 건네고는 피 묻은 은장도를 물풀에 슥슥 문댄다.

 “행궁은 내가 간다. 넌 불이나 붙이고 있어.”

 “됐어. 넌 어제도 갔잖아.”

 “물만 닿으면 온몸에 비늘이 돋는 놈이 누구더라?”

 잉어를 든 손이 뜨끔 한다. 저물어가는 공기 속에서 홍옥의 눈동자가 깊어진다.

 “금방 갔다 올게.”

 “응.”

 

 능금이 물 때 낀 바위를 닦고 촘촘하게 엮은 돗자리를 꼼꼼하게 깐다. 찬기가 올라오는 돌에 귀한 몸이 닿아선 안 된다. 놋 목욕통도 광이 나게 닦고, 부드러운 무명도 말끔히 접어 개놓는다.

 홍옥 대신이라지만 연이틀은 무리로구나, 땀으로 흠뻑 젖은 능금이 소매부리로 이마를 닦는다.

 “다 끝났는가?”

 코 밑에 큼직하게 복점이 난 개똥이가 나무다리를 건너온다.

 “거짐 끝나간다.”

 “뭔 땀을 그리 흘린댜? 온천이 따로 없구먼.

 “허해서 그래.”

 나이에 비해 왜소한 몸의 능금을 훑어보던 개똥이가 끌끌 혀를 찬다.

 “홍옥인지 뭔지 그 놈 거둬 먹이느라, 아주 피골이 상접했구먼. 그러니께 내가 내다 버리랬잖여.”

 “모르는 소리 마. 그 놈 덕에 여태 살았으니까.”

 “참말로 말이나 못하면!”

 개똥이가 바지춤에서 뭔가를 꺼내 건넨다. 말라비틀어진 곶감이다.

 “이거 먹고, 대충이라고 씻고 가. 쉰내 나니께 ”

 개똥이가 준 곶감을 덥석 입에 물고 능금이 폴짝 노천탕으로 뛰어든다. 이참에 빨래까지 한 번에 끝내야겠다. 무장무장 흘러가는 물이니, 이 밤의 쉰내도, 아까의 비린내도, 영영 가시지 않을 여인의 향기도 모두 씻겨 내려갔으면 좋겠다.

 “물 앞에서는 나라님도 나도 공평하겠지.”

 틀어 올렸던 머리가 풀어져 길게 넘실댄다. 화려한 치장이 없어도, 고운 옷 한 벌이 없어도 곱디고운 낭자, 흰 저고리가 투명하게 젖고, 가녀린 어깨가 드러난다.

 “깜빡 잠들었네.”

 온돌방에 누워있던 능금이가 부스스 일어난다. 옷을 말린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었다. 개똥이가 뜨뜻하게 잘 지핀 덕에 묵은 피로가 얼추 풀렸다. 온천이 이래서 좋구나. 하품을 베어 물던 능금이가 꾸물꾸물 온돌을 나오는데 탕실 저 편이 자욱하다.

 “누가 벌써 물을 채웠대?”

 새벽 별이 뜰 무렵에야 손님이 들 터인데 어찌 물을 채웠을까. 능금이 탕실 휘장을 젖힌다.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어렴풋이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상념에 젖은 사내는 인기척을 듣지 못하고 너른 목욕통에 무상하게 앉아있다. 뒤에서 다가서던 능금이 피식 웃는다.

 뒤태를 보아하니 홍옥인데, 이 놈, 통이 커도 어지간히 큰 게 아니다. 아무리 물을 좋아하는 놈이라지만, 감히 나라님의 욕탕에 몸을 담가? 것도 내가 죽어라 닦아놓은 목욕통에!

 사내가 걸친 붉은 도포가 흘러 비늘이 돋은 어깨가 드러난다. 영락없는 홍옥이네. 이참에 혼구녕 좀 내줘야겠다. 능금이 살곰살곰 다가가 사내의 등짝을 후려친다.

 “잉어는 잘 먹었냐?”

 순간 잠잠하던 비늘이 화르르 일어서고, 사내의 검은 머리칼이 휘날린다. 강바닥을 걷듯 긴 상념에 잠겨있던 화홍이 스르르 눈을 뜬다. 잘 익은 오디처럼 새카만 눈에 곧게 뻗은 눈썹, 아름다운 용안이 그제야 깨어난다. 사태를 눈치 챈 능금의 낯빛이 하얘진다. 막 돌아서는 능금을 강한 팔이 낚아챈다.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능금, 욕탕의 물이 흘러넘치고 헐겁게 묶은 옷고름이 풀어진다.

 “간도 크구나.”

 조롱하는 듯, 능금의 턱을 감싼 채 화홍이 속삭인다. 어째서 몰랐을까. 저 붉은 도포는 오직 왕가의 것이다. 겁을 먹은 능금이 주춤 물러선다.

 “복색은 사내인데, 몸은 계집이구나.”

 화홍의 붉은 입술이 능금의 목덜미에 와 닿는다. 따뜻하고 거친 숨, 능금이 질끈 눈을 감는다.

 “놓아주십시오,”

  능금의 머리칼을 희롱하던 화홍이 차게 웃는다.

 “감히?”

 몰래 빼든 은장도가 물밑에서 아른댄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다. 욕을 보이느니 그냥 죽자. 능금의 칼을 든 순간 화홍이 막아선다.

 따뜻한 물에 붉은 피가 번져든다.

 “이토록 향긋하구나.”

 붉게 베인 손으로 화홍이 능금을 끌어안는다.

 “다음엔 더 큰 칼로 베어라.”

 

 개다리소반에 푹 고은 잉어 두 사발을 내어놓고 홍옥이 한없이 앉아있다. 먼 하늘에 동이 터온다. 금세 온다던 능금은 또 누구의 일을 봐주느라 돌아오지 않나, 홍옥의 얼굴이 시름에 잠긴다.

 

 초록이 지천인 정자에 두 선비가 마주앉아 술을 기울인다.

 “손은 왜 그래?”

 화홍이 손에 두른 비단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는다.

 “은장도에 베었다.”

 “양갓집 규수라도 범한 거냐?”

 “그러게.”

 “왕손을 베었으니, 벌써 까마귀먹이가 됐으려나?”

 슬쩍 떠보는 부사의 말에 화홍의 얼굴에 쓴 웃음이 떠오른다.

 “까마귀먹이가 되긴 아깝지.”

 “네가 사람을 아까워할 줄 알고, 얼마나 엄청 난 미인이기에?”

 “미인?”

 문득 물에 흠뻑 젖어있던 능금의 가녀린 여체가 떠오른다. 어여쁘긴 하나, 혼이 나갈 만큼은 아니다. 허나 그의 몸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유일한 여인, 그에게 감히 칼을 들이댄 유일한 여인, 너에겐 나의 권력도, 갯버들만큼이나 덧없는 것일 테지.

 “엄청 난 죄인이긴 하지.”

 화홍이 손에 감긴 붕대를 풀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 붉게 아무는 상처는 덧없이 짧던 생명선을 멋대로 잇대놓았다.

 “이 지루한 생을 함부로 늘였으니,”

 

 화홍과 부사가 탄 말이 산길로 접어든다. 병사들이 호위하고 짐을 든 일꾼들이며 나인들이 뒤를 따른다. 입구를 봉쇄한 가마가 말이 끄는 수레에 실려 가는데, 느닷없이 홍옥이 튀어나와 떡하니 가마를 막아선다.

 “못 간다!”

 “이놈이 어디서 행패야!”

 군사들이 곤봉을 내려치거나 말거나,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거나 말거나 홍옥이 가마를 앞에서 버틴다. 오라에 묶인 능금이 가까스로 가마 창을 연다.

 “너 그러다 죽어!,”

 “못가! 못 간다고!”

 “금방 돌아올게.”

 “죽어야 나오는 곳이다. 가지 마라! 가지마!”

 홍옥의 저고리가 피로 물든다. 나를 살리려고 행궁에 갔던 아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다. 너를 잃고 나는, 나를 잃고 너는 무슨 세월을 보낸단 말이냐. 살이 찢기는 것도 모르고 홍옥이 몽둥이세례를 받는다.

 “무슨 일이냐.”

 군사의 행렬이 지체되자, 화홍이 묻는다.

 “웬 놈이 가마 앞을 가로막고 난동을 부린다고 합니다.”

 “재밌군.”

 “성가시면 죽일까?”

 슬쩍 칼을 빼어들고 부사가 묻는다.

 “둬라.”

 “왜? 마침 심심했던 참인데?”

 “미련하나 쯤은 남겨놔야 산다.”

 “왜 이리 잔인한 게야.”

 “심심풀이로 죽이는 너보단 선하다.”

 화홍의 말에 부사가 이죽거린다.

 “누가 보면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줄 알겠네. 걸핏하면 피바다를 만드는 주제에,”

 화홍의 자비로 목숨을 건진 홍옥이 풀숲에 버려진다.

 

 제비가 낮게 처마를 스치며 날아간다. 청룡포를 입은 화홍이 교태전에 들어선다. 하루하루 봄기운이 다르구나. 덧없이 가는 것이 올 때는 성큼성큼 잘도 오는 구나.

 “많이 좋아졌구나.”

 “어마마마의 은혜 덕분입니다.”

 파리하던 안색에 혈색이 돌고, 피로 물들었던 머리칼에 윤기가 돈다. 댓잎을 스치는 바람처럼 서늘하던 눈빛도 오늘은 봄빛 마냥 따스하다. 그리 용하다는 온천 때문만은 아닌 게로구나.

 “별감과 같이 갔다들었다.”

 “예.”

 “동궁이 곁을 두는 몇 안 되는 사람이지.”

 “허물이 없을 뿐입니다.”

 “젖어미가 같으니 당연한 게지.”

 “유모는 평안하십니까?”

 “별감이 얘기 않더냐?”

 “예”

 “달포를 묵는 동안, 제 어미 얘기조차 없다니 별감도 꽤나 무심한 게로구나.”

 “유유상종이겠지요.”

 세자가 보일 듯 말 듯 웃는다.

 저 무심한 아이에게 누가 봄빛을 주었을까. 네게 봄빛이 든다면, 언젠가 꽃이 피고, 나비가 드는 날도 오겠구나.

 

 붉은 도포를 흩날리며 몰래 숨겨 들어온 술병을 찔끔찔끔 아껴 마시는 데 탐탁지 않은 그림자가 발치에 비친다.

 “제길, 피할 데도 없고,”

 마시던 술병을 내려놓은 채 부사가 누각에 납작 엎드린다.

 “일어나십시오.”

 체구는 작지만 당차 보이는 여인이 별감과 마주선다. 고운 얼굴에 붉은 볼, 낭창낭창한 눈썹, 태생도 예쁘지만, 스스로도 무척 공을 들인 얼굴이다. 너무 완벽해서 숨이 턱 막히네. 꽃이 화려한데, 화병까지 화려하면, 너무 난잡한 거 아닌가. 향원정의 풍류를 망친 원망에 부사의 심사가 배배 꼬인다.

 “몸은 많이 좋아지셨는지요?”

 “예”

 내 몸을 묻는 것인지, 허울뿐인 지아비의 몸을 묻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행궁에서 사람을 데려왔다 들었습니다.”

 “예까지 행차한 연유가 있으시군요.”

 세자빈의 얼굴이 붉어진다.

 “비현각 시동 말씀이십니까?”

 “예.”

 “땡감처럼 푸르딩딩한 게 아직 어린 사내입니다. 글줄이나 읽기에 말동무 삼아 데려온 것뿐입니다.”

 “사내였군요.”

 세자빈의 얼굴에 안도가 퍼진다.

 “염탐이라면 다른 사람을 붙이시지요.”

 부사가 차갑게 대꾸하며 어둠을 향해 몸을 돌린다.

 “제가 공연한 걸 물었나 봅니다.”

 세자빈이 민망한 표정으로 물러난다. 부사가 술병을 들어 입술을 적신다.

 “바람결에도 술 맛이 변하는가.”

 

녹수 20-08-06 12:25
 
어여쁘고 궁금하고 아련한 시작이네요.
읽는 동안 봄 능금 밭을 거니는 듯 능금 나무 사이로 비밀스러운 존재를 쫓는 듯...^0^
잘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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