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로즈 앤 스노우
작가 : 쿠페
작품등록일 :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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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2-31     조회 : 303     추천 : 0     분량 :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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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언어학자라면 그 공간을 그 밖의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들도 결국에는 가장 널리 알려진 단어가 가장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음을 시인하며 폐허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 동의할 만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온갖 잔해들이 가득했다. 앞에 쓰인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잔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확할 덩어리들이 즐비했다. 그러니까 그곳은 잔해들로 이루어진 폐허였다.

  그곳에서 황색 창파오를 입은 남자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남자는 모든 게 다 회색빛으로 내려앉은 공간에서 홀로 깨끗한 채 서 있었다. 남자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 공간은 어두웠을 뿐더러 남자의 얼굴에는 선글라스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눈앞에 있는 돌벽에 다가갔다. 아니, 돌담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까. 어쩌면 기본적인 형태에 집중해서 그냥 돌무더기라고 하는 게 제일 나을지도 모른다.

  잔해의 산에 다가간 황색 남자는 누군가 본다면 그의 정신상태에 대해 무례한 추측을 하게 될 만한 행동을 했다. 남자는 건조한 어조로 돌무더기에 말을 걸었다.

  “괜찮소?”

  그러나 그때 남자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돌무더기가 콜록이는 듯한 웃음소리를 토해낸 것이다.

  “당신도 꽤… 웃긴 구석이… 있네요.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전신을 흉기로 삼는 무투파 암살자 후앙이 벨 마르셀의 지하통로를 찾아냈을 때 그는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폭발소리를 들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수도를 바람처럼 달려 소리의 진원지에 도착한 후앙이 목격한 것은 전시의 폭격지를 방불케 하는 폐허였다. 그것만으로 상황을 짐작해낸 후앙은 잔해 속에 매몰돼 있을 파트너, 마론에게 말을 걸었다.

  “스쿼드가 오고 있소. 조금만 참으시오.”

  사체를 회수하기 위해.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 확실하게 파괴하기 위해. 후앙은 뒷말을 목구멍 속에 밀어 넣었다. 조직의 암살자는 임무 도중 잘못될 경우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한다. 조직으로 이어지는 조그마한 단서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마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배려였지만 때로는 그런 불필요함 자체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마론은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에펠강…으로 갔어요. 서둘러 증원을… 따라 잡을 수….”

  “그만. 지금은 더 말하지 마시오.”

  “후앙 씨.”

  후앙은 파트너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마론의 목소리는 도저히 돌무덤에 생매장되어 있는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마론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력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전 끝까지 프로이고자 했어요.”

  “…….”

  “이상한가요? 돈이 무조건인 청부업자가 이런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 난 존경하오.”

  그 말은 후앙의 진심이었다. 그는 평소 경박하고 철이 없다고 판단했던 어린 동업자에게 진심어린 경의를 느끼고 있었다.

  돌무더기는 기침소리나 신음과도 같은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언제까지고 길게 늘어져 그림자처럼 발끝에 길쭉하게 들러붙어 있을 것 같은 웃음소리였다.

  후앙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는 웃음소리가 완전히 멎을 때까지 돌무덤 앞에 서있었다. 웃음이 멎고 돌무더기에서 인기척이 사라지고서도 그는 잠시 그 앞에 머물렀다. 이윽고 그는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 돌아섰다. 그 얼굴은 선글라스 때문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마론은 블랑코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생각했다. 자기 다음으로 선배의 파트너가 된 사람. 조금 질투했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재밌는 사람이었다.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마론은 블랑코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마론이 C4를 기폭시키자 블랑코는 경이로운 순발력으로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 한 명을 들쳐 메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는 움직임으로 붕괴하는 천장을 빠져나갔다. 블랑코는 마치 낙석이 어디에 떨어질지 미리 아는 것 같았다. 블랑코의 움직임을 떠올리던 마론은 문득 그것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유를 한참 고민하던 마론은 마침내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답을 찾아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도핑한 선배의 움직임과 비슷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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