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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 벙커
작가 : 강냉구
작품등록일 : 20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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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 02
작성일 : 19-09-02     조회 : 216     추천 : 0     분량 : 3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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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왔네요?”

  체력 증진 센터로 들어선 내게 시끄러운 음악소리 보다 더 먼저 반겨준 남자의 음성이었다. 나는 그런 남자에게 아주 짧은 단어로 대답했다. “아, 네.” 내 말에 그의 표정은 미간을 구겼다. 그러더니 내가 “운동 잘 해요.”라는 형편없는 말을 하고 자신의 갈 길을 찾아갔다. 나는 남자를 쳐다보다 시선을 옮겼다.

  러닝머신 위에 올라탔다. 러닝머신에 딸린 리모컨으로 48번 채널을 틀었다. 폐쇄회로였다. 나는 재미없이 폐쇄회로에서만 채널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채널을 틀었다. 이 벙커 안의 이 체력 증진 센터의 다른 사람들처럼 오래 된 예능프로그램을 틀었다. 깔깔 웃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웃었다. 하지만 우습지는 않았다. 모든 게 나를 위한 한심한 ‘척’이었다.

  사람들은 운동을 하기 위해 태어난 좀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좀비 같은 모습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운동을 해서 어디에 쓰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벙커 안은 젊은 사람보다는 나이 먹은 사람들이 더 많은데…….

  “어…….”

  러닝머신이 갑자기 멈춰버렸다. 무언 가가 러닝머신에 끼어버린 거 같다. 이상했다. 나는 러닝머신에 내려 와 러닝머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끼인 건 없었다. 아주 멀쩡했다. 나는 다시 러닝머신 위에 올라탔다. 장난치기라도 하는 듯이 러닝머신은 아주 멀쩡하게 멈춘 적도 없다는 듯 움직였다. 나는 러닝머신의 속도를 8.5로 올렸고 그 위를 달렸다.

  TV의 검은 화면 위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른 척 여자를 본 적도 없는 척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여자는 아주 조용히 내 뒤를 떠났다. 나는 그대로 몇 분 더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여자는 없었고, 오랜만에 왔냐며 인사를 했던 남자도 없었다. 내 기억 속에 익은 얼굴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체력증진센터를 빠져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내 코 속으로 들어왔다. 난 그게 아주 좋았다. 답답하지 않았다. 먼지 가득 한 내 폐를 아주 깨끗한 티슈로 닦아 내는 기분이었다. 체력증진센터 앞에서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봐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한참을 들이마신 끝에야 나는 체력증진센터를 떠날 수가 있었다.

 

  B-102 안으로 들어온 나는 허물처럼 옷을 벗고는 곧바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로 화장실 안에 들어오자 차가운 공기 때문에 몸서리 쳤다. 땅 속은 춥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벙커 안은 생각 외의 것들이 많았다. 뜨거운 물이 내 몸에 닿았다. 기분이 너무 좋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그런 신음소리 조차도 거슬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사람 하나 없었고,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외로웠다.

  “하…….”

  눈을 감고 작게 숨을 내뱉었다. 두 손을 들어 내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하지만 물기는 닦아지지 않고 내 앞을 가렸다. 얼굴을 닦아내던 두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머리카락이 조금 자란 거 같은데……. 물을 껐다. 추워졌다. 다시 한 번 몸서리 쳤다.

  나는 선반에서 클립퍼를 꺼냈다. 클립퍼는 듣기 좋은 진동소리를 내뱉었고 얼마 자라지 않은 머리카락을 밀어냈다. 밀린 머리카락은 내 몸에 달라붙었다. 클립퍼를 선반 위에 올려두고 물로 내 몸에 붙은 머리카락을 닦아냈다.

  샤워를 끝마친 나는 수건을 꺼내 머리와 얼굴 그리고 몸을 닦아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머리카락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샤워를 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없는 게 편하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외관상으로는 별로였다. 머리카락이 있던 내 얼굴이 낫다. 지금은 아주 많이 부족해 보인다. 나는 거울을 쳐다봤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 서른인데 아무렇지 않게 세월을 보내왔는데 이제 와서 하는 얼굴에 대한 아주 유치한 투정이었다. 나는 그런 내가 우스웠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침대 위에 누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만 자고 싶었다. 하지만 벙커 안에서는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잠을 청하고 싶을 때는 잠이 오지 않았고, 잠에 들고 싶지 않을 때는 미친 듯이 잠이 내게 몰려왔다. 벙커 안에서의 내 일들은 뭐든 반대로 됐다. 내가 했던 유치한 투정보다 더 유치했다.

  “잠 안 잘래.”

  어렸을 때 했던 반대로 말하기였다. 그때도 제대로 된 적은 없었지만 잠을 안 잔다고 하면 잠이 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정신은 사춘기라도 된 듯 나를 반항하기 바빴다.

  나는 침대에서 나왔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고 의자에 앉았다. 요 며칠간 아무것도 안 한 거 같아. 벙커 구조를 알아내야 되는데 D구역 남자들한테 들킨 이후로 D구역으로 가지 못했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너무 아깝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왜 벙커 구조를 알아내려 하는 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그 이유를 지워버린 것만 같았다. 조금 있으면 나는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게 아주 끔찍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는 파일들을 보았다. 파일들이 지워졌다. 아니 지워졌기보단 편집 돼 있었다. 마치 이 컴퓨터를 해킹이라도 하듯 중요한 부분만 지워져있었다. 차라리 다 지워버리지……. 차라리 깔끔하게 컴퓨터를 포맷을 해버리지. 바보 같았다. Z는 나를 더 괴롭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뭐하는 거야?”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컴퓨터 화면 위로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여자를 쳐다봤다.

  “문이 열려있었어.”

  “문이?”

  “응. 그래서 들어왔지. 문단속 좀 하고 다녀.”

  여자가 말했다.

  “뭐 하는 거야? 그 영상은 뭐고? 포르노라도 다운 받은 거야?”

  여자가 물었다. 여자의 말은 아주 우스웠다. 그 정도로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내가 뭐 너 같은 사람도 아니고……. 내가 말이 없자 여자는 내 눈치를 보았다. 딱히…… 그럴 필요 없는데…….

  “너무 비밀 스러운 거라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거지? 난 뭐…… 네 사생활을 존중하는 사람이니까……. 나갈게.”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뭐가 아쉬운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여자를 잡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주 조용히 들어온 여자는 처음처럼 아주 조용히 B-102를 나갔다. 난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여자가 나간 후에도 한참동안 B-102의 현관문을 응시했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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