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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밥상
작가 : 필방주
작품등록일 : 20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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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온 몸으로 느끼는 맛!]
작성일 : 20-08-01     조회 : 716     추천 : 1     분량 : 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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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은 아직 밤의 적요 속에 빠져 있었다.

 

 오직 한 남자, 임금인 정조의 수라상을 책임지고 있는 대령숙수 강진구만이 왕의 건강과 입맛을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모름지기 왕의 수라상이라는 것은 그 재료의 공수부터가 남달라야했다. 푸르스름한 박명이 경강(한강) 위의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강물 위로 허옇게 물안개가 너울대고, 칠흑의 물속에서 공기 방울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순간, 은빛 비늘의 힘찬 숭어 떼들이 거대한 파도마냥 덮쳐왔다. 어부들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이어 펄떡이는 숭어 떼가 수면 위로 건져 올려졌다. 그물은 제법 무겁고, 숭어를 낚은 어부들은 만면에 희색이 돌았다.

 

 “숭어가 풍년이라 임금께서 항아들하고 내시들 월급을 또 올려주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아, 임금이 인정 많아 우리도 한 몫 챙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암!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한 마디씩 거들며 어부들은 신명나게 그물을 걷어 올렸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 간다고 했던가. 인정 많은 정조의 어진 그늘은 조선의 외진 구석, 무명의 어부들에게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한편, 파주 숲 속에서는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 “으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거세게 말을 달리고 있었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산을 깨웠다. 엉덩이에 화살이 꽂힌 채로 돌진하는 멧돼지 무리가 사냥꾼들의 코앞을 내달렸다. 거칠게 질주하는 멧돼지 떼가 언덕을 넘어서자, 거짓말처럼 눈앞으로 시퍼런 강물이 펼쳐졌다.

 

 강물은 순식간에 거대한 포말을 일으키는 제주의 바다로 이어졌다. 수십의 인부들이 망경루 앞뜰에서 왕에게 진상할 금귤과 유감, 동정귤과 새파란 청귤을 분류하고 있었다. 기백의 나무궤짝에는 일등품의 귤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바다 위 회색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싸게 싸게 움직여! 얼음이 녹으면 말짱 도루묵이니!”

 

 왕실의 얼음 창고인 내빙고 앞은 수레에 실린 커다란 얼음덩이를 분주히 옮기는 사내들로 요란했다. 풀어헤친 상체에서 땀이 흐르고, 사내들의 몸에서는 허옇게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기묘한 모양의 발골용 칼들이 한 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궐내 사축서에서 웃통을 벗어던진 채 암소를 도축 중인 왕실 푸줏간 백정들도 바빴다. 피와 땀으로 뒤범벅된 채 가히 예술적으로 거대한 소를 해체하는 사내들의 눈빛이 형형했다. 그들에게서 원시의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줄을 서거라!”

 

 내시부 내관인 도설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상품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인파들이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속속들이 당도하고, 멧돼지를 어깨에 멘 사내를 필두로 팔도의 진상품 수레들이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직 박명의 끄트머리인 묘시였다!

 

 둥둥둥! 궐내에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쾌한 도마질 소리가 선행하며, 거대한 수라간의 문이 열렸다. 장정들이 어깨에 음식 재료를 둘러 맨 채 활기차게 수라간으로 들어갔다. 숙수들과 팽부, 남자 요리사들을 보조하는 궁녀들로 수라간 안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강숙수는 그들을 예의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하며 호령했다.

 

 “음식을 들고 날 때는 반드시 기척을 내야하며, 움직이기 전에는 항상 뒤를 조심하고, 숙수들은 다 듣게 큰 소리로 말을 하라!“

 

 왕실의 최고 요리사인 대령숙수 강진구의 고함소리에 수라간 안에는 일순 긴장이 흘렀다. 불꽃이 튀고, 기름이 끓어오르고, 제각각 모양이 다른 조리용 칼들이 흔들거렸다. 강숙수의 눈치를 살피며 하급 사령 하나가 펄떡이는 숭어를 들고 늦을 새라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생치 살은 부드러우니 수저로 파내어 곱게 다지고!”

 

 근육질의 별사옹(고기 담당)은 수꿩의 살을 조심스레 수저로 긁어내 타타타탁! 칼로 다지기 시작했다.

 

 “숭어는 음력 2월 넘어야 흙내 없이 살이 탄탄허고! 숭늉 만들 백비탕은 백번을 끓이고 식히기를 반복해야 하는 법!”

 

 적색(전과 구이 담당)이 계란 물 입힌 숭어전과 양전을 번철 위에 올려 지글지글 부쳤다. 백비탕의 물을 끓이고 있던 탕수색(물 끓임 담당)은 아궁이 앞에 앉아 벌겋게 익은 얼굴로 불을 떼고 있었다. 물이 다 끓자, 탕수색은 촤악! 찬물을 부어 아궁이의 불을 끄고는 다시 물을 식혔다.

 

 “흰 수라는 미질이 좋은 것이어야 하고, 적두(팥)는 소화를 잘 시키는 것이라 꼭 두 가지를 같이 수라상에 올려야 한다!“

 

 스릉! 반공(밥 담당)은 거대한 가마솥 뚜껑을 열어 반지르르 윤기가 도는 희디 흰 쌀밥을 검사했다. 반공이 찰진 흰수라와 붉은 팥수라를 주발에 나눠 담자, 적색은 노릇하게 구워진 은어를 번철 위에서 한 번 더 뒤집었다. 치익! 은어가 기름에 구어지자, 그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리를 끝낸 음식들로 요리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수라상을 준비하자, 강숙수는 그들을 한 번 더 독려했다.

 

 “직접 맛보고 판단하라!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을 맺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숙수 어르신!”

 

 이윽고 완성된 요리들이 쟁첩에 담겨져 하나씩 상 위로 올랐다. 새빨갛게 옻칠한 사각반 위에는 알록달록한 색채의 각종 음식들이 차려졌다. 흰밥과 팥밥, 젓국조치에 뱀장어를 찐 만증탕, 노릇한 은어구이와 민어자반, 연초록의 미나리승검초무침에 알맞게 삭아 반지르르한 대구알젖, 싱싱한 전복 회와 수란이 차려진 화려한 왕의 밥상이 완성되었다. 강숙수는 황홀한 표정으로 수라상을 쳐다보았다.

 

 “젖수시옵소서!”

 

 설리내관이 덜어낸 음식을 조용히 맛보고 기미관이 물러서자, 사모관대를 한 사옹원의 총 책임자인 도제조 김재순이 임금 정조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상을 한 번 둘러본 정조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휘건을 들어 입을 한 번 닦았다. 그러나, 수라상 어디에도 늘 즐기던 고기반찬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놓고 반찬투정을 할 수는 없었다.

 

 “어흠!” 정조는 가까이 있는 나물반찬 위주로 식사를 끝내고, 숭늉을 들이켰다. 저만치 떨어져 앉은 강숙수는 조심스레 왕의 안색을 살폈다. 정조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잘 만들어 특별히 관직을 높여주고 양반까지 된 강숙수는 늘 임금이 고마웠다. 중인인 자신을 양반으로 승격시켜줘서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매사 공명정대하고, 배려가 깊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입맛은 상당히 예민하여, 좋아하는 것을 내놓고 즐겼고, 먹는 것의 기쁨을 아는 임금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정조와 그의 입맛을 잘 헤아리는 강숙수는 친밀한 관계가 되어갔고, 왕은 때로 늦은 밤 다과상을 앞에 두고 강숙수를 친구마냥 허물없이 대해주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깊은 신의와 정은 안동 김씨들에 의해 박살이 나버렸다.

 

 1800년 6월, 완연한 여름밤이었다. 바쁜 정사로 늦은 저녁을 받던 정조는 애체를 끼고 한 손에 책을 든 채 석수라를 마주했다. 과로한 임금을 위해 강숙수는 평소 정조가 즐기던 갈비를 손수 구워내 상에 올렸다. 간만의 육고기 반찬에 정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곁에 앉은 안동 김씨인 사옹원 도제조 김재순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긴장이 서려있었다.

 

 “배고픈 줄도 모르다가 상을 받으니 마음이 조급하다.”

 “예, 전하. 기미관은 서둘러 기미를 보라.”

 

  도제조 김재순의 채근에 늙은 기미관이 서둘러 기미를 끝내고 물러나 앉자, 정조는 갈비구이부터 한 점 씹어 삼켰다.

 

 “오늘 가리구이가 참 달구나. 누가 만들었는가?”

 

 정조가 김재순에게 물었다.

 

 “저기 앉은 강숙수가 만들었사옵니다.”

 “내가 육찬이 과해 자중해야 하는데, 강숙수가 자꾸 내 입을 어린아이로 만드는구나.”

 

 정조가 빙긋 웃자, 강숙수는 고개를 조아리며 내심 뿌듯했다. 순간, 컥! 서책 위로 붉은 핏방울이 번져갔다. 쿨럭쿨럭 연신 피를 토하던 정조는 그대로 밥상 위로 엎어졌다. 시뻘건 선혈이 왕의 수라상에 뒤범벅되었다. 잠시 후, 아연한 표정으로 임금을 보던 늙은 기미관 마저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내더니 그대로 눈을 까뒤집었다. 기미관은 마지막 숨을 놓으며 김재순을 노려보았다.

 

  “전하!” “어의를 불러라!”

 

 창경궁 영춘헌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강숙수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정조를 보았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무관들이 들이닥쳤다. 무사 백동수는 쓰러진 임금에게 황급히 다가섰다.

 

 “전하! 정신 차리시옵소서.”

 

 백동수가 정조를 끌어안았다. 그의 눈자위가 붉었다. 피투성이 정조의 입가를 닦아내던 백동수가 좌중을 노려보았다.

 

 “뭣하느냐?! 당장 이 방에 있는 자들과 수라간의 모든 자들을 추포하라!”

 

 장용영 무관들이 영춘헌 안의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백동수는 정신을 잃은 정조를 업고 내의원으로 내달렸다. 백동수의 지시에 무관들은 설리내관부터 왕실의 간식 담당인 생과방 나인들까지 모조리 옥에 가두었다. 특별히 갈비구비를 만든 대령숙수인 강숙수는 모진 문초를 당했다. 궐의 옥사에서 강숙수는 피눈물을 흘렸다. 어느 누가 감히 나의 임금을 죽이려 하는가?! 맛을 보는 혀를 가지고 있음에도 왕의 수라에 독이 든 것을 몰랐던 늙은 기미관인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던 안동김씨 일문의 도제조 김재순인가? 강숙수는 수라 앞에 모여 있던 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되새겨보았다. 자신의 억울함보다는 정조를 죽이려한 무리들에 강숙수는 분노했다.

 

 “강숙수는 나오라.” 사내의 말에 강숙수는 무릎걸음으로 옥문 쪽으로 향했다. 백동수였다. 강숙수는 백동수를 따라 쓰러진 임금의 침전 안으로 몰래 들어섰다. 정조는 끊길 듯 옅은 숨을 내뱉으며 누워있었다. 파리한 얼굴에는 이미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흐흑! 전하,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진구, 자네인가?”

 

 왕의 옥음이 들렸다. 강숙수는 차마 왕에게 다가서지도 못한 채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리 가까이 오게.”

 

 강숙수는 서둘러 왕의 곁으로 다가섰다.

 

 “언젠가는 필시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네만, 생각보다는 빨리 왔어.”

 “전하, 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사도세자의 아들인 나를 조선의 사대부들이 가만 두었겠나? 그 동안 자네 덕에 좋은 음식을 먹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자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조선팔도를 뒤져서라도 이놈이 구해오겠사옵니다.”

 “고맙네, 말만 들어도 배가 불러. 이보게, 진구.”

 “예, 전하.”

 “내가 이리 가면 자네나 자네 집안은 멸문을 당할 터, 이 길로 장용사를 따라 가게.”

 “하오나, 전하.”

 “괜찮아. 시키는 대로 하게. 자네 덕에 먹는 즐거움으로 임금 생활을 버텼어. 좋은 세상에서 만나세.”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강숙수는 정성을 다해 임금에게 마지막으로 큰 절을 올렸다. 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두르세!”

 

 장용영 장용대장인 백동수를 따라 강숙수는 서둘러 궐문을 나섰다.

 

 “잘 듣게. 자네 아들 내외는 저자에서 주막을 하는 천씨네 집에 있네. 식구들을 데리고 당장 서북의 철산으로 떠나게. 전하께서 따로 자네를 살피라 하셨지만, 지금부터는 알아서 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숙수는 허겁지겁 천씨의 주막으로 향했다. 뒷방에 숨어 있던 아들 내외가 갓 태어난 손주 필구를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길로 강숙수는 아들 내외와 함께 서북의 철산으로 떠났다.

 

 철산은 외지고 추웠다. 바닷가에 초막을 짓고 없는 듯 숨어 살며 강숙수와 아들 내외는 낚시질과 장작을 내다 팔며 힘든 생활을 연명해갔다. 와중, 아들 형구는 더 이상 이런 삶을 견디기 힘들다며 1811년 겨울, 홍경래의 난에 뛰어들었다. 세상은 흉흉하고, 정조의 아들인 순조는 왕권을 지킬 힘이 없었다. 1812년 아들이 비명횡사하고, 다음 해 손녀 설이를 낳고 며느리마저 죽자 강숙수는 살길이 막연했다. 강숙수는 백태 낀 노인의 눈으로 처량하게 자신을 보는 손자 필구와 갓 난 설이를 마주 보았다.

 

 "저 핏덩이들을 어찌 하누~"

 

 다음 날, 강숙수의 부름에 툇마루로 나간 필구는 개다리소반 앞에 앉았다. 상 위에는 간장종지에 멀건 나물죽이 차려져 있었다. 처마 밑에는 말린 민어인 암치 한 마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필구는 처마 밑에 매달린 암치를 보며 저건 대체 언제 먹을 건가 싶은 눈으로 할아버지의 안색을 살폈다. 강숙수는 필구의 속을 눈치 채고는 한 마디 내뱉었다.

 

 “입에 넣어야 맛이 아니여!”

 “맛을 본 적도 없는데 그 맛을 어찌 안대요?”

 

 어린 필구는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놈아, 이 코를 찌르는 비린내가 나도 안 나? 저놈이 퍼렇게 살아 날고뛰던 때를 상상혀 봐!”

 

 할아버지의 말에 필구는 입이 터져라 나물죽을 한껏 우겨넣고는 기어이 그 맛을 느껴보겠다는 듯 암치를 노려보았다. 쏴아아! 어디선가 파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땅! 강숙수가 수저로 상을 내리쳤다.

 

 “천천히 먹어야 그 안에 밴 갖가지 맛을 알 것 아니냐?! 이 나물죽 한 그릇에도 백가지 맛이 들어있어!”

 

 “아니, 할아버지. 멀건 나물죽에 뭔 백가지 맛이 있어요?!”

 “어허, 그래도 이놈이!” “알았어요, 알았어.”

 

 필구는 또 다시 할아버지의 호령에 나물죽을 음미하듯 천천히 씹어보았다. 어린 손자에게 맛을 가르치듯 강숙수는 한 마디 덧붙였다.

 

 “맛이란 혀로 아는 게 아니여!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지!”

 

 음식 맛을 온 몸으로 느끼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필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한때는 궐에서 임금의 음식을 만드는 높은 자리에 있었다며 툭하면 과거를 그리워하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때로 먼 산을 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가 안쓰러웠다.

 

 죽 한 숟갈을 입에 넣고 눈을 감은 채 맛을 음미하기 시작하던 강숙수는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앞에 온갖 산해진미로 차려진 화려한 왕의 밥상이 떠올랐다. 마치, 수라상을 먹듯 강숙수의 늙은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어렸다.

 

 “어떤가, 진구. 참으로 맛있지?”

 

 문득 강숙수의 앞에 정조가 앉아 있었다. 커다란 합에 담긴 골동반(비빔밥)을 한 입 가득 입에 넣고, 각독기(깍두기)까지 와그작! 허물없이 씹어 먹으며 정조는 환하게 웃었다. 임금이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어이, 진구! 이 골동반(비빔밥) 말이야. 참 재미있는 음식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전하.”

 “각색 나물에 볶은 고기가 뒤엉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구 뒤섞여 분별이 없어져 버린 음식이잖아.”

 “탕평채도 비슷하지 않사옵니까?”

 “그거야 영조께서 신하들이 하도 지들끼리 노론이니 소론이니 꼴값을 떠니까, 그거 보기 싫어서 말도 안 되는 걸 갖다 붙여서 만든 음식이고.”

 “전하, 어찌 그리 막말을 하시옵니까? 영조께서는 전하의 할아버지가 아니십니까?”

 “뭐, 어떤가. 돌아서면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이미 돌아가신 양반 흉 좀 본다고 뭐 어쩔 거야?!”

 

 정조의 농담에 강숙수는 킬킬대며 웃었다. 늦은 밤, 출출할 때면 정조가 좋아하는 음식을 간단히 차려 침전에 내어가면, 임금은 내관까지 물린 채 지금처럼 어린아이 같이 농을 하곤 했다. 정조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비빔밥을 보았다.

 

 “이보게, 진구! 곧, 이 골동반 같은 세상이 올 것이야.”

 “그것은 좋은 세상입니까, 전하?”

 “나도 모르지. 우리 같이 한 번 기다려보세.”

 “예, 전하. 좋지요, 좋습니다.”

 

 정조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강숙수는 정조의 손을 뜨겁게 맞잡았다. 쿵! 순간, 강숙수는 그대로 밥상에 고개를 박고 숨을 놓았다. 뜬 눈으로 죽은 강숙수의 눈빛은 여전히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할아버지!”

 

 어린 필구는 죽은 강숙수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필구의 곡소리에 덩달아 아기 설이가 울기 시작했다. 남매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마루에 나와 앉은 필구는 울다 지쳐 잠이 든 설이를 다독이다가 문득 처마 밑에 매달린 암치를 가만히 보았다. 암치는 마치 필구를 약 올리듯 바람에 나불대고 있었다. 필구는 암치를 내려 꾸덕꾸덕한 살점을 뜯어 입에 넣고 눈을 감았다. 쿠르르 쏴! 또 다시 거대한 파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암치의 맛은 놈이 한 때 살아있을 때처럼 펄떡거리며 싱싱한 비린내를 풍겼다. 필구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아, 바로 이 맛이었구나!’

 

 강숙수의 ‘진맛’이 필구의 입 안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필구는 할아버지가 말한 온 몸으로 느끼는 맛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길로 마당으로 나선 어린 필구는 장독대의 된장과 간장, 고추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았다. 된장에서는 콩의 고소함과 콩밭의 햇볕 한 줌, 콩 뿌리의 흙내까지도 전해져왔다. 고추장에서는 단 맛과 함께 한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새빨갛게 익은 고추의 아릿함이 훅 코를 찔렀다. 천일염에서는 바다 깊은 곳의 농밀한 짠 맛이 느껴졌고, 마당 돌담 아래 핀 애기똥풀에서는 쌉싸래한 독한 맛이 전해졌다. 세상 모든 것에는 ‘맛’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바로 그 ‘맛’을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구나. 마당 중앙에 선 채 눈을 감은 어린 필구에게로 수많은 세상 것들의 향기와 맛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참으로 ‘온 몸으로 느끼는 맛’이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필방주입니다. 환난과 고독의 시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소중한 가족, 친지, 형제, 친구와 무엇이든 맛있게 나눠먹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행복이 아닐까...

 거기서부터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맛있게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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