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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밥상
작가 : 필방주
작품등록일 : 20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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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젖과 꿀과 술의 맛, 상화병!]
작성일 : 20-08-01     조회 : 383     추천 : 1     분량 : 5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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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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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졸간에 할아버지를 잃고 난 필구는 설이를 업고 간단한 봇짐을 든 채 집을 나섰다. 무작정 한양으로 가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얘기하던 엄청난 인파와 수많은 음식들을 직접 맛보고 싶었다. 설이를 위해서라도 황량한 서북의 철산이 아닌 양반들이 넘쳐나는 한양으로 가야했다. 배가 고픈지 연신 칭얼대는 동생 설이에게 남은 쌀로 끓여 온 맑은 죽물을 떠먹이고는 자신도 요기를 하기 위해 필구는 언덕에 앉았다. 봇짐에서 고구마를 한 알 꺼내 먹고는 마치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그때, 누군가 필구에게 다가섰다. 시체마냥 퀭한 눈에 꼬질꼬질한 행색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필구보다 어려보이는 녀석은 짝다리를 흔들며 시건방을 떨었다.

 

 “딱 본께 애미애비도 없는 땅거지구만.”

 “너 몇 살이냐?”

 

 어이없게 보던 필구가 물었다.

 

 “먹을 만큼 먹었는디?”

 “그래서 몇 살인데?”

 “왜 반말찌꺼리여? 나가 올해 방년 아홉 살인디?”

 “이름은?”

 “천문보. 이름 좋지?”

 “고구마 먹을래?”

 “예, 성님!”

 

 필구가 고구마를 하나 건네자 문보는 납작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멍하니 앉아 바다를 보는 문보에게 필구가 물었다.

 

 “부모님은 안 계시냐?”

 “여까지 와갖고이, 홍경랜가 뭐시긴가 땜시 안 죽었소?”

 

 코를 훌쩍이는 문보를 보며 필구는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문보가 안쓰러웠다.

 

 “난 이 길로 한양으로 갈 건데, 넌 어디 갈 데 있냐?”

 “한양? 여서 한양이 어디라고?! 갔다 칩시다, 뭐 먹고 살 거여?”

 “그건 가서 생각해봐야지.”

 “우리겉은 놈은 할 짓이 딱 하나여. 성님, 나가 하득기 따라 할 수 있겄어?"

 

 문보는 갑자기 필구 앞에서 개다리 춤을 추며 흔한 각설이 타령을 불러 젖혔다. 일자나 한자나 들고나보니 어쩌고저쩌고~ 그런 문보를 보며 필구는 같잖다는 픽 웃었다.

 

 “그래서 되겠냐?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제대로? 뭐 워뜨케?!”

 

 필구는 문득 눈을 가늘게 뜨고, 때로 마당 툇마루에 앉아 흥얼거리던 할아버지의 노래를 떠올렸다.

 

 “수라는 자르르르 쌀밥에 팥밥이 기본이요, 맥수라 보리밥, 잡수라 잡곡밥에 골동반비빔밥이요~ 조반 죽은 우유에 찹쌀 뽀얀 타락죽~ 얼쑤! 녹두, 연근, 율무에 양죽! 떡은 백설기, 석이 밀설기, 깨찰시루에 두텁떡이라! 도미를 으깨 녹말, 찬지름에 숙편에다가 노루포, 사슴포 곁들이여 연사과에 오미자, 구기자 청주 한 잔! 캬~ 달다, 달아!“

 

 필구의 타령을 들으며 문보는 듣는 것만으로도 상상이 되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매~ 그것이 뭔 타령이여?”

 

 “나랏님 수라타령. 우리 할아버지가 부르던 노래야.”

 “미쳐불겄네. 뭔 노래가 그라고 맛이 있당가?! 나도 가르켜 줘, 성님.”

 “그래, 따라해 봐. 절편, 단자, 찹쌀 메밀에 진달래, 장미, 모란, 국화전! 생치, 생합, 전복만두에 숭어, 붕어, 어만두라!”

 “음마, 환장하겄네. 요놈이면 각설이타령하고 붙어 볼 만 허겄네.”

 “정월이면 원단으로 떡국이요, 입춘채. 보름하면 오곡밥에 상원채가 제격이라! 삼월하면 화전이고, 삼짓날엔 오미자국 녹두국수! 오월에는 제호탕을 신하들과 나누고! 칠월 칠석 칠석제엔 규아상에 밀전병!”

 

 설이를 업은 필구와 문보는 일어서서 타령을 읊고 장단을 넣으며, 덩실덩실 길을 나섰다. 필구의 선창을 한 구절, 한 구절 따라 부르며 문보는 조금씩 배고픔을 잊어갔다. 저 멀리 지평선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는 두 녀석들의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어느 한 포구에 다다른 필구와 문보 앞에 덩그러니 나무 궤짝 하나가 보였다. 마치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서양식 나무궤짝이었다. 녀석들은 주변을 살피며 신기한 듯 궤짝 뚜껑을 열어보았다.

 

 “이양선이 두고 갔나 봐.”

 “성님, 이양선이 뭣이여?”

 “너 양이들 알지? 그 사람들이 타고 온 배를 이양선이라고 부르더라. 양도깨비가 옮는다고 사람들이 그냥 두고 갔나 보네."

 “성님은 그런 건 워디서 주워들은겨?”

 “할아버지가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

 “성님, 이 안에 신기한 게 많은디?”

 

 필구와 문보는 궤짝 안에서 말린 정어리며, 둘둘 만 치즈 덩어리까지 찾아내 맛을 보았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문보는 바닥을 나뒹굴며 깨방정을 떨었다. 그러나, 치즈 한 조각을 입에 넣은 필구는 목구멍 깊숙이 번져오는 진하고 구수한 기름진 우유의 단 맛에 빠져 들었다. 태어나 생전 처음 먹어보는 새로운 맛이었다. 필구는 치즈를 조금 떼어 설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기 설이도 방긋방긋 웃으며 치즈 맛을 즐겼다.

 

 철산에서 한성까지는 천릿길이었다. 풀뿌리며 나무껍질을 끓여 먹고, 마을이 나오면 동냥질을 하며 필구와 문보는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한양에 도착한 필구와 문보는 장터의 거대함에 깜짝 놀랐다. 배가 고픈 녀석들의 시야에 상화병을 팔고 있는 애기 업은 아낙이 눈에 들어왔다. 필구와 문보는 아낙에게 다가갔다.

 

 “아주머니. 내 동생한테 젖 좀 주세요.”

 “내 새끼 먹일 젖도 없는데, 썩 비켜 서.”

 “워매~ 인정머리 참 더럽게 없네.”

 “뭣이 어쩌고 어째?! 쥐똥만한 놈이 입 한 번 더럽네.”

 

 야멸차게 일갈하는 아낙을 보다 필구는 호기롭게 말했다.

 

 “우리가 오늘 여기 있는 떡을 싹 다 팔아주면, 그 땐 밥 한 끼 주시겠어요?”

 “니들이 뭔 재주로? 그래, 어디 한 번 팔아봐라.”

 

 같잖다는 듯 아낙이 픽 웃었다. 필구는 눈을 감고 상화병 냄새를 깊이 들이켰다.

 서리 상, 꽃 화, 떡 병자를 쓰는 ‘상화병’은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하얗다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밀가루가 귀한 고려 때부터 내려온 떡으로 깨에 꿀을 섞은 소를 넣어 누룩으로 발효시켜 한 여름에도 쉬이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필구는 후각으로 상화병 하나를 다 먹은 듯 그 맛에 취해, 해롱대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여보시오, 샌님네들. 탁주만 마실 것이오, 떡을 먹을 것이오? 탁주 맛에 달달한 팥고물 넣은 상화떡 한 입만 먹어 보셔. 이것이 술이냐, 떡이냐, 꿀이냐! 술 한 잔 마셨는데 꿀맛이 나네. 딸꾹! 얼씨구나~”

 “딸꾹! 얼씨구나~”

 

 문보가 옆에서 필구를 따라했다. 술 취한 듯 비틀대며 마치 취권을 연상케 하는 녀석들의 몸짓에 어린 것들이 먼저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하나둘씩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하나 줘 보거라.”

 

 사내의 말에 여기저기서 손님들이 손을 내밀었고, 상화떡은 순식간에 모두 팔려 버렸다. 잠시 후, 아낙은 설이를 품에 안고 젖을 물렸다. 그 옆에서 필구와 문보는 아낙이 준 떡을 게걸스레 먹었다.

 

 “어린놈이 혓바닥이 요물일세. 너 아주 여기 붙어 있어라.”

 “아, 좋지요. 설이하고 우리한테 밥만 주시면 뭐든 할 수 있어요.”

 

 필구와 문보는 떡집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며 밥을 얻어먹었다. 필구는 손뼉을 치며 손님들을 모았고, 문보는 어린 설이를 업고 뒤에서 개다리 춤을 추었다. 녀석들의 머리 위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세월은 흘러 1827년 순조 27년 2월. 나풀나풀 창덕궁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덕궁 희정당 안에는 붉은 곤룡포를 입고 어좌에 앉는 순조가 이마를 부여잡고 있었다. 도열한 문무백관들 사이 비어 있는 오른쪽 맨 앞자리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순조와 대신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듯 몹시 지쳐 있었다. 그 때, 벌컥! 정전의 중앙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섰다. 왕만 출입할 수 있는 중앙문으로 성큼 들어선 이는 대제학 김여순이었다. 김여순은 쏟아지는 빛을 등지고 천천히 걸어와 비어 있는 자리에 와서 섰다.

 

 “어흐흠.”

 

 헛기침을 하며 순조와 대신들이 긴장했다.

 

 “내 요즘 모든 일들이 그전만 같지 않소. 수라는 입에 달지 않아 잘 먹지 못하고, 자궁에 문후할 적이면 반도 못 가 숨이 차니 괴롭기 그지없소.”

 

 영의정이 불쑥 나섰다.

 

 “전하, 머리를 맑게 하는 데는 연자가 최고이니, 내의원에 일러 연자육차를 올리라고...”

 “백약이 소용없소! 내 이참에 물러나 건강이나 챙길까 하오.”

 “물러나신다니요, 전하? 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놀란 좌의정이 말했다.

 

 “다행히 세자가 총명하니, 대리청정을 맡기면 되지 않겠소?”

 순조는 조심스레 김여순의 눈치를 살폈다. 날카로운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김여순은 말이 없었다. 왕의 말에 묵묵부답인 대신들도 일제히 김여순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김여순은 순조의 곁에 선 효명세자를 찬찬히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짙은 눈썹에 오뚝한 콧날, 반듯한 이마와 맑은 눈동자, 열아홉 살의 세자는 잘생긴 얼굴에 풋풋한 미소를 띠고 김여순을 쳐다보았다. 대제학 김여순은 효명세자의 어머니인 순원왕후 김씨의 작은 아버지였다. 정조 때부터 권력을 쥔 안동 김씨들은 순조대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 실세의 한 복판에 대제학 김여순이 있었다. 효명은 작은 외할아버지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 하시지요. 왕가에서 자식이 부친의 노고를 대신하는 것은 경사이옵니다.”

 

  김여순의 말에 실내가 술렁였다. 좌의정이 이내 태도를 바꿔 대제학 김여순을 찬성하고 나섰다.

 

 “이제 전하께서 문왕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으니, 신은 기뻐서 발을 구르고 춤을 출 듯 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종사가 반석위에 올라서게 되었으니 동방에 이 같은 경사는 다시없을 것이옵니다.”

 

 영의정이 비굴하게 웃으며 좌의정을 거들었다. 대신들이 모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자, 순조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 효명세자와 대제학 김여순은 서로를 응시했다.

 

 그 날 밤, 편전 안에서 효명은 서안 위에 한 그릇의 음식을 올렸다. 투박한 옹기에 담긴 백성의 음식인 국밥이었다. 아들과 마주 앉은 순조는 기대에 차, 수저를 들고 국밥 한 숟갈을 떠먹더니 이내 수저를 다시 내렸다.

 

 “그 맛이 아니옵니까, 아버님?”

 

 순조가 쓸쓸히 고개를 내저었다. 한 때 아버지 정조를 따라 미복을 하고 암행을 나갔을 당시, 어느 주막집에서 먹었던 국밥 맛을 왕은 잊을 수 없었다. 평복 차림의 임금과 세자를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고, 아버지 정조는 아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게 굴었다. 국밥 그릇을 휘휘 저어 식힌 후 어린 아들에게 어서 먹어보라며 수저를 쥐어주던 아버지. 주막 툇마루에 앉은 부자는 한 나라의 임금과 왕세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아비와 아들이었다. 처마에서는 비가 뚝뚝 떨어져 내렸고, 주모는 한 쪽에서 부추 전을 부치고 있었다. 나른한 빗소리와 술꾼들의 웃음소리, 고소한 기름 냄새가 주막 안을 휘감았다. 참으로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하여 순조는 때로 정조의 아들임에도 세도가의 그늘 아래 무능한 왕으로 낙인찍힌 자신이 한탄스러울 때면 아버지와 먹던 국밥이 그리웠다. 지나가는 말처럼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그 국밥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 길로 효명은 도성 안의 국밥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효자였다. 순조는 아버지 정조를 빼다 박은 자신의 아들 영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맛이란 것이 단지 한 입 수저 안에 담긴 것이겠느냐?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먹어야 제 맛인 것이지.”

 

 순조의 말에 효명의 얼굴에 잠시간 낙심이 스쳤다.

 

 “영아!”

 “예, 아바마마.”

 “이제 때가 되었다. 저들에게는 내가 허수아비야. 그러니 세자인 니가 대리를 하면 더 살판났다 싶겠지. 허나, 어디 감히!”

 

 서글프던 순조의 눈빛이 일순 형형해졌다.

 

 “나는 네게서 아버님을 본다! 다만, 너는 혼자고 저들은 무리를 이루었으니 지혜롭게 가야 한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효명은 아버지의 준열한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순조는 이내 표정을 바꿔 아쉬운 듯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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