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로맨스판타지
푸른 잎에 능금
작가 : 목탄
작품등록일 : 2020.8.5
  첫회보기
 
3. 연등을 띄운 듯, 마음
작성일 : 20-08-08     조회 : 426     추천 : 1     분량 : 5489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늘 캄캄했던 곳인데, 이리 불빛이 어룽대니 좋구나. 화홍이 빛이 새어나오는 비현각 뜰에서 빙긋 웃는다. 이 높고 쓸쓸한 궁궐에서 마음 둘 곳은 오직 저 곳이다. 너를 그곳에 두었으니, 너도 책처럼 가만히 그 곳을 지키어라. 외롭고 쓸쓸한 나를 지키어라.

 책을 읽던 시동은 사람이 드는 것도 모르고, 서가에 기댄 채 잠들어있다. 눈 밑이 거뭇한 것이 마음고생을 하였구나. 시동이 보던 책을 펼쳐보는 화혼, 고요하던 미간이 꿈틀한다.

 “몰락한 양반이라도 되는 것이냐.”

 이 어려운 책을 감히 읽은 걸 보면, 천한 아이는 아닌가 보구나, 네겐 아주 즐거운 형벌이 되겠다. 화홍이 손을 들어 성가시게 한들대는 머리칼을 뒤로 넘겨준다. 그 기척에 능금이 깨어난다.

 이 고운 사내는 누구인가. 달빛을 뚫고 나타난 신선인가, 아니면 병풍 속에서 나온 귀인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비몽사몽한 눈으로 능금이 화홍을 올려다본다.

 “깼구나.”

 그제야 사내를 알아보고 납작 엎드린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되었다.”

 바들바들 떠는 능금을 화홍이 일으켜 세운다. 칼을 휘두를 때는 언제고 이리 겁쟁이란 말인가.

 “글은 어디서 배웠느냐.”

 “아비에게 배웠습니다.”

 “비현각에 갇혀있는 게 심심하진 않겠구나.”

 “어째서 저를, 살리셨습니까.”

 “내 비늘을 보고도 무섭지 않더냐?”

 어린 홍옥을 씻길 때면 늘 비늘이 돋곤 했다. 처음엔 신기하고 무서웠지만, 나중엔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 비늘 덕에 홍옥은 추위도 타지 않았고 더위도 타지 않았지. 나도 비늘이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었는데.

 “무섭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렸다. 내 비늘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여인은 너 하나였으니까.”

 내 어머니도 두려워하던 비늘을 넌 무서워하지 않았으니까.

 능금이 고개를 갸웃한다. 고작 비늘 때문에 목숨을 건졌단 말인가. 참으로 왕족들은 이상하구나,

 “손은, 괜찮으십니까?”

 화홍이 손바닥을 편다. 붉은 흉터가 아직은 아리고 아프다. 능금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고 작게 입김을 분다.

 아이를 달래듯, 아픈 손을 들고 호호 불어주는 능금 덕에 몇 가닥 남지 않은 경계심이 와르르 무너진다. 남색이라고 해도 좋겠다. 네가 사내라고 해도 좋겠다. 이렇게 간질거릴 바에야 차라리 그러는 게 좋겠다. 화홍이 손을 거둔다.

 “비현각에 있는 책을 모두 읽으면 풀어주마.”

 풀어준다는 말에 능금의 눈이 등잔만큼 휘둥그레진다.

 “정말입니까?”

 “그래.”

 능금이 납작 엎드려 연거푸 절한다. 밤을 세어서라도. 백년이 걸려서라도 다 읽고 말리라. 이곳을 나가 홍옥을 볼 수만 있다면 이깟 책 다 읽고 말리라.

 “진귀한 책과 산해진미가 있는 데도, 네겐 가야 할 곳이 있는가 보구나.”

 다시 가난해져도 좋습니다. 다시 배를 곯아도 좋습니다. 홍옥이 있는 곳이라면 산해진미도 귀한 서책도 다 필요 없습니다.

 “꼭 다 읽겠습니다.”

 “너무 빨리 읽지는 말거라, 내가 슬퍼질 지도 모르니.”

 화홍이 손이 능금의 이마를 스친다. 널 가둔 게 내 실수일지도 모르겠다. 이리 연연해할 줄 알았다면, 연등을 띄우듯 두고 올 것을 그랬구나.

 비현각 문을 나서는 화홍을 능금이 따른다.

 “물속에서 보면 예뻐요.”

 뜬금없는 능금의 말에 화홍이 돌아선다.

 “비늘 말이에요. 무지개보다 예쁘고, 자개보다 예뻐요. 반짝반짝, 정말 예쁩니다.”

 “목숨 값치고는 아부가 과하구나.”

 “정말인데,”

 화홍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진다. 네가 책을 읽는 동안만, 시름을 잊어야겠다. 네가 책을 읽는 동안만 내가 널 꿈꿔야겠다.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자고 있어? 팔자 한번 좋구나!”

 곤히 자고 있는 능금을 소란이 흔들어 깨운다. 늦도록 책을 읽을 탓이다. 능금이 하품을 베어 물고 일어나 앉는다.

 “배고프다.”

 “일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밖에 있을 때는 꼬박꼬박 고기반찬을 먹었는데, 어째 여기선 시래기 국에 보리밥이 전부다. 이러다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굶어죽는 게 아닐까.

 “오늘도 시래기 국이냐?”

 “시래기 국이 어때서! 너 아직 배가 덜 고프구나.”

 “내가 사가 있을 땐 좀 귀한 몸이었거든, 이렇게 풀떼기만 먹는 풀벌레는 아니었다고,”

 “그래서 그리 거지꼴이었구나.”

 능금의 허풍에 소란이 깔깔댄다.

 “나가자, 오늘은 맛있는 거 먹을 수 있어.”

 “정말?”

 “궁 밖으로 심부름 가는 날이거든.”

 소란을 따라 한들한들 궁을 나서는 능금,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인데 식탐을 이기지는 못한다. 보채는 능금에게 갱엿 하나를 물려놓고, 소란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물건을 흥정한다.

 “이 노리개 어때?”

 “곱네.”

 “이건?”

 “곱네.”

 “성의 없게 대답할 거면, 궁에 가서 시래기나 먹던가.”

 노리개가 다 같은 노리개지, 뭘 그리 까다롭게 군단 말인가. 난감한 표정을 짓던 능금이 푸른 술이 달린 옥빛 노리개를 가리킨다.

 “선녀들이 꽂은 비녀처럼 영롱한 것이 참으로 곱구나.”

 “그치, 나도 이게 더 예쁜 것 같더라.”

 “누가 쓸 건데 이리 정성이야?”

 “동궁전 궁녀들이지. 혹시 알아, 노리개가 예뻐서 승은을 입을지.”

 “그럼, 너도 사.”

 “나 같이 천한 비자는, 소용없어. 그저 밥이나 안 굶으면 다행이지.”

 잘 따라오던 능금이 떡집 앞에 떡하니 멈춰 선다.

 “하나만 사줘.”

 “아까 엿 사줬잖아!”

 “노리개 값도 깎아줬는데, 이깟 떡 하나 못 사주냐.”

 노리개를 팔던 여주인을 구워삶아서 돈 푼이나 남겼다고 이리 위세로구나, 소란이 끌끌 혀를 차며 떡 하나를 물려준다.

 “앞으로는 안 데리고 나온다.”

 “그럼 손해야. 내가 흥정에는 고수거든,”

 “말이나 못하면,”

 장터에서 굴러먹은 게 몇 년인데, 흥정이라면 자신 있다. 능금이 히죽 웃는다. 다음엔 뭘 사달라고 할까.

 “돌대송곳이랑 책 끈을 사야 하는데,”

 “그거라면 지전가게에서 팔 것 아니냐.”

 “아, 그렇겠다.”

 아비를 도와 풀어진 책 끈을 고치고, 보판을 씌우던 게 도움이 되나보네. 먹지도 못 할 책을 왜 그리 애지중지하냐며 짜증을 내었건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이것저것 사고 나니 벌써 한 짐이다. 날랑날랑 주머니 하나를 들고 가는 소란 뒤를 보따리, 보따리 든 능금이 따라간다. 먹을 것은 미끼고, 짐꾼이 필요했구나. 능금이 볼멘소리를 한다.

 “장터에 왔는데, 국밥 한 그릇 안 사주는 게냐?”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네!”

 “엿이랑 떡 밖에 더 먹었냐.”

 “나는 한 입도 안 먹었거든!”

 “그러니까 우리 국밥 한 그릇씩 먹자.”

 “돌아갈 시간이야. 아무데나 짐 놔뒀다가 잃어버리면, 네가 책임질 테냐.”

 “네가 먹을 동안 내가 지키고, 내가 먹을 동안, 네가 지키면 되잖아.”

 한참 자랄 나이에 시래기만 주구장창 먹어대니, 헛헛하긴 하겠구나, 능금의 애걸복걸에 소란이 결국 넘어간다.

 “그럼, 잘 지켜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충직한 개처럼 보따리 앞을 지키고 있는 능금이, 쪽빛 저고리도 예쁘지만은, 희고 고운 얼굴에 봄바람을 맞아 발그레 물든 뺨이 뭇 처자들의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우리 마님이 주라신다.”

 덩달아 얼굴이 물든 몸종이 약과를 내민다.

 “종일 굶었는데, 이제야 배를 채우는 구만요.”

 능금이 마님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다.

 “뉘 집 아이냐?”

 “궁에 사는 시동입니다.”

 “시동으로 쓰기엔 아까운 얼굴이구나.”

 사심 가득한 얼굴로 마님이 자리를 뜬다. 잘난 놈은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지, 짐을 지키는 능금에게 이 처자, 저 처자 먹을 것을 쥐어준다.

 “자, 이제 네가 먹을 차례다.”

 시원하게 트림을 해대며 소란이 국밥집을 나온다.

 “난 됐다.”

 능금이 두 손 가득 먹거리를 내밀며 생글댄다.

 “지키라는 짐은 안 지키고 먹을 것을 사온 게냐?”

 “잘 생긴 게 죄다.”

 “무슨 말이야?”

 “너는 천 년 동안 서있어도 모를 거다.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이 상황을,”

 “실없는 소리 말고, 없어진 거 없지? 그럼 가자. 늦었다고 혼나겠다.”

 보따리를 주렁주렁 매단 능금이 소란을 따른다.

 “마마님들한테 물건 좀 전해주고 갈게. 너 혼자 갈 수 있지?”

 “그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넓은 궁궐에서 동궁은 어찌 찾고, 비현각은 또 어찌 찾는단 말인가.

 “오늘 책 읽기는 글렀네.”

 먹을 것에 끌려 저잣거리에 간 내가 잘못이다. 이참에 도망을 칠 것을 그랬나. 그랬다면 죄 없는 소란이 죽어나갔겠지. 저하를 벤 내가 도망을 친 들, 어찌 목숨을 부지할 것이냐. 책이나 읽는 게 상책이다. 그럼 약조하신 대로 내보내주시겠지.

 궁 나들이는 처음인지라, 여기가 저기고, 저기가 여기다. 길을 묻자니, 지체 놓은 벼슬아치이고, 하소연을 하자니, 종종대는 궁녀들이다. 게다가 오늘 따라 병사들은 어찌 이리 많은지, 지은 죄도 없이 찔려서 숨는다. 엉뚱한 일에 연류 되어선 안 되겠지. 잠잠해지면 돌아가자 정처 없이 헤매던 능금이 정자에 들어선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발에서 불이 난다. 좀 쉬어가야겠다.”

 정자난간에 턱 하니 발을 올려놓고 능금이 천연덕스레 눕는다. 피곤 앞엔 장사 없다. 산들산들 바람을 벽 삼아, 아직 이울지 않은 햇살을 이불 삼아, 이내 꿈에 빠져든다.

 “두 냥만 깎아주시오.”

 “어째 반이나 깎아!”

 책쾌가 능금이 들고 있던 책을 매몰차게 뺏는다. 능금이 처량맞은 표정으로 책쾌의 팔을 붙든다.

 “조실부모하고, 가진 건 목숨뿐이라, 매품팔이를 하여 근근이 먹고산다오. 그래도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어 통금에 찾아온 것 아니겠소. 두 냥에 주시면, 다음에 매를 맞아, 나머지를 갚으리라.”

 구구절절 사연을 듣는 책쾌의 눈에도 물기가 어린다. 저 어린 것이 매를 맞고, 돈을 벌었구나. 어디 맞을 데가 있다고, 매품을 하였을까.

 “이 놈아, 목숨 보다 귀한 책이 어디 있더냐. 더는 맞지 마라. 두 냥에 줄 터이니.”

 “정말이오!”

 능금이 바짝 엎드려 연거푸 절을 한다.

 “됐다. 가난이 죄더냐. 어서 가.”

 책쾌의 마음이 바뀔까 책을 낚아채서는 쏜살 같이 내달린다.

 “쯧쯧 어린 것이,”

 어둠 속을 사라지는 소년을 책쾌가 안쓰럽게 바라본다.

 “매는 내가 맞았는데, 생색은 왜 네가 내는 것이냐?”

 먼발치에 서있던 홍옥이 그제야 따라 붙으며 투덜댄다.

 “아무렴 어때, 반이나 깎았잖아.”

 “등칠게 없어서 가난한 책쾌를 등쳐?”

 “가난은 무슨, 얼마나 책이 잘 팔리는지, 첩이 두 명이나 된다더만,”

 “잘났다.”

 책벌레 아비를 욕하더니만, 그 딸도 어쩔 수가 없구나. 신선이 공물로 바친 귀한 잉어를 팔아 걸핏하면 책을 사재낀다. 그게 내 공물이지. 네 공물이냐. 덕분에 홀쭉하게 마른 홍옥이 비틀댄다.

 순라꾼의 불빛이 뒤를 쫓는다. 기척을 들은 홍옥이 담 밑으로 능금을 잡아끈다. 그리도 보고 싶은 책을 구했다는 기쁨에 칠락팔락 걷던 능금이 홍옥의 품으로 쓰러진다. 항의를 하기도 전에 입을 막는 홍옥, 그 품에서 어린 새처럼 콩닥콩닥 심장이 뛴다.

 뒤쫓던 조족등이 멀어지고 딱따기 소리도 잦아든다. 숨을 고르던 홍옥이 순라꾼이 사라진 저자를 기웃대며 투덜댄다.

 “너 땜에 제 명에 못 죽는다.”

 “그게 어디 내 탓이더냐, 초경이 지나 도착한 책쾌의 잘못이지.”

 “책쾌야 다음 날 만나도 되는 것 아니냐?”

 “다음 날에도 그 책이 있다는 보장이 있어?”

 “못 말린다.”

 홍옥이 능금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긴다.

 “날 굶긴 값, 다음엔 더 아프게 때릴 거다.”

 “피, 치사해.”

 소중한 책을 가슴에 끌어안고, 능금이 홍옥을 따른다.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건, 책 때문이겠지.

 “순라꾼이 잡아가기 전에 어서 와라.”

 순라꾼이라는 말에 능금이 홍옥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같이 가!”

 홍옥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린다.

녹수 20-08-09 14:33
 
마음과 인연이 양대 넝쿨처럼 얽혔네요
싱그러운면서도 서늘한 이야기의 전개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
목탄 20-08-10 17:43
 
응원 감사드립니다. ^^
 
 

맨위로맨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