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추리/스릴러
49일
작가 : 최극
작품등록일 : 20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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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우아한 미망인
작성일 : 20-08-13     조회 : 498     추천 : 1     분량 : 5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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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에서 현관까지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을 오르며 기태는 자꾸 주변을 힐끔거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만큼 대단한 사람들이 현관문턱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 틈에 낀 기태는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든 채로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안은 약간 어두웠다.

 문상을 온 조문객을 배려한 듯 은은한 조명만 한두개 켜져 있었다.

 조문객들은 안방을 드나들며 조문을 하고 있었다.

 

 기태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숙연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자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문상객들 사이에서 대충 걸친 자신의 점퍼차림도 신경이 쓰였다.

 

 

  ‘병원에서 조문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이거 참 난감하구만.’

 

 

 돈 의원의 유가족들은 전염병 방지를 위해 병원의 장례식장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피살자의 평소 유언에 따라 조문을 일절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집에까지 찾아오는 조문객을 차마 돌려보낼 수는 없었는지 마스크를 쓴 문상객만 받아 조문을 진행하고 있었다.

 

 

 드르륵. 미닫이 안방문이 열렸다.

 갑자기 문상객이 안방쪽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안에서 가냘픈 상복 차림의 여자가 나와 서있었다.

 

 

  '저 여자군.'

 

 

 문상객 뒤에 선 기태는 긴장된 표정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숨이 막힐만큼 대단히 고혹적인 미인이었다.

 

 미망인 최혜영.

 전직 국호의원인 돈종률 의원의 아내.

 40대 후반의 그녀는 15년 전까지 대한민국의 탑 여배우 중 하나였다.

 

 최혜영은 여전히 창창한 미모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풍스럽고 품위 있게 조문객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문객 맨 뒤에서 선 기태와 눈이 마주쳤다.

 

 혜영은 몰려있는 조문객들에게 묵례로 양해를 구하고 기태에게 스르르 다가왔다.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그녀와 마주한 기태의 얼굴에서 연신 땀이 흘렀다.

 다소 마르긴 했지만 검은 옷으로 양장한 그녀의 미모는 그야말로 한눈을 팔 수 없을만큼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입에서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따스하면서도 허스키했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가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2층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태도 고양이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

 

 

 2층 응접실에 앉은 기태는 맞은 편의 우아한 미망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혜영은 슬픈 표정으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기태를 응시했다.

 

 

  ‘정말 대단한 미인이군.’

 

 

 아까부터 기태의 머릿속에는 이 한 생각만 떠오르고 있었다.

 

 피살자 돈 의원과 혜영은 일 년에 한두 번쯤은 신문지상에 대서특필 되었다.

 부부는 노블레스오블리주의 표상이었고, 선행을 드러내지 않고 실천하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실제 그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어떻게든 부부의 선행을 파헤쳐 기사를 실어왔고 그 와중에도 최혜영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거나 카메라를 피하며 소리없는 봉사활동을 해왔다.

 

 기태는 무릎에 공손이 올린 제 두손을 꼼지작거렸다.

 아까부터 땀이 차오른 두 손바닥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조용하고 품위있는 이 여자는 묘하게도 상대방을 긴장시키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남편의 죽음에 대해 적절히 슬픔을 유지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미망인의 모습에, 기태는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반감이나 두려움도 표현하지 않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배우여서 그런지 내공이 상당하군.’

 

 

 어색해진 기태가 먼저 시선을 돌리는 사이.

 도우미 여자가 냉차를 내왔다.

 

 

  “드시죠.”

 

 

 혜영의 권유에 기태가 냉차를 마시며 벽면을 응시했다.

 아까부터 벽에 걸린 대형 액자가 그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제 딸입니다.”

 

 

 혜영도 사진을 응시하며 기태에게 말했다.

 상대방의 행동을 세심하게 살필 줄 아는 꽤 센스 있는 미망인이었다.

 

 기태는 액자 속 사진을 잠시 응시했다.

 레프팅 보트에 탄 채, 패들(노)을 높이 들고 환호하는 아가씨와 혜영의 모습은 생동감이 넘치고 있었다.

 

 

  “멋진 포즈군요. 어디서 찍은 겁니까?”

  “정선에서요. 딸과 함께 놀러갔다가 찍은 거예요. 딸애가 레프팅을 좋아하거든요.”

  “아 그렇군요.”

 

 

 기태는 다시 냉차를 들이켜면서 맞은편 방문을 응시했다.

 조금 열린 방문 틈으로 핑크색 커튼이 하늘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딸의 방인 것 같았다.

 

 기태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혜영은 천천히 본론을 물었다.

 

 

  “형사님께서 제게 궁금하신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예 뭐. 형식적인 조사입니다. 가족들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절차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네.”

 

 

 혜영은 잠시 침묵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가늘고 하얀 그녀의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을 치면 딱 어울릴 것처럼 유연하고 아름다웠다.

 기태는 자꾸 그녀에게 시선을 팔리는 자신을 의식하며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어젯밤 10시에서 11시경, 부인께서는 뭘 하셨습니까?”

  “외출 했습니다.”

  “어디로요?”

  “별장으로요.”

 

 

 냉차를 막 마시려던 기태가 켁, 소리와 함께, 찻잔을 내려놓았다.

 밤 11시는, 피살자의 1차 부검결과 나온 사망추정시각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이 미모의 미망인이 거기를 갔단 말인가?

 

 순간 별장침실에 있던 검고 화려한 여자의 스타킹이 떠올랐다.

 그럼 그 스타킹의 주인이 이 미망인?

 

 기태의 머릿속이 산란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스타킹만 신은 채 침대에 누운 그녀를 머릿속에 떠올렸던 것이다.

 

 그때였다. 퇴폐적인 상상에 얼굴이 붉어진 기태와 혜영의 눈이 또 마주쳤다.

 기태의 목울대가 꿀렁이고 귓바퀴가 새빨개졌다.

 하지만 최혜영은 담담히 미소를 머금은 채 차를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

 

  “의원님께서 새 골프클럽을 가져오라고 전화를 주셨어요. 김 기사는 어제 제사 때문에 시골로 내려갔고. 어쩔 수 없이 제가 가지고 가게 된 겁니다.”

  “클럽... 이요?”

 

 

 기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클럽이 뭘까?

 혜영은 그런 기태를 향해 소탈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골프채요. 골프공을 치는 골프채를 클럽이라고 합니다.”

  “아하. 그걸 또 클럽이라고 하는군요. 이름이 참 다양한가 봅니다. 낮에는 드라이버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골프클럽은 번호가 매겨져 있고 나무와 쇠를 재질로 사용할 때마다 각각 이름이 다릅니다.”

 

 

 오. 그런 거구만.

 기태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만하게 굴었던 골드골프장 관리인 마스터 장과 달리, 혜영은 어떤 오만이나 편견도 없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이래서 저 밖에 사람들이 몰려와 천사라고 입을 모았군. 그 어떤 위압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소탈하고 매력적인 미망인이야.’

 

  “의원님은 오늘 낮에 일본 의원분들과 라운딩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어요. 요즘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마찰이 좀 있잖아요. 의원이셨던 시절에 외교법안을 주로 담당하셨기 때문에 의원을 그만두신 후에도 계속 도움을 주고 계셨어요.”

  “아. 예. 그렇군요. 저 그런데... 외람된 말씀이지만 오늘 낮에 저희 쪽에서 확인한 CCTV에는 부인께서 골드골프장에 오신 기록이 없습니다만?”

  “당연히 그렇겠죠. 저는 결국 가지 못했으니까요.”

  “예? 아니 왜요?”

  “딸애가 전화를 했어요. 학교에서 사고를 당했다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

 

 

 기태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사고요?”

  “네. 학교도서관 공사장에서 넘어졌다고 했어요. 그래서 차를 돌려 딸애를 데리러 갔습니다.”

  “그렇군요.”

 

 

 기태가 두터운 검지로 관자놀이 부분을 긁적이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

 기태의 이런 행동은 아귀가 맞지 않는 어깃장이 발견되었을 때 하는 루틴이었다.

 

 뭔가 덜그덕리는 느낌. 뇌에서 본능적으로 경고하는 그 순간.

 멈춰봐. 뭔가 이상해. 라는.

 기태는 지금 직감적으로 살인과 사고 사이에 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범생인 상수가 들으면 또 화를 버럭 내겠지만.

 

 

  “따님은 그럼 지금 어디에?”

  “병원에 있습니다.”

  “저런. 공사장에서 많이 다친 겁니까?”

  “큰 부상은 아니지만 주치의가 입원을 권했어요. 그래서 지금 상중에 함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

 

 

 이제껏 꽤 침착하게 자신을 응대했던 혜영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저토록 아프게 숨을 내쉴 수 있을까.

 슬픔과 절망과 외로움이 묻어나는 한숨이었다.

 

 기태는 크게 동요했다.

 자신도 모르게 이 여자에게 연민이 일고 가슴이 저렸다.

 동시에 어찌된 일인지 이 여자는 시선을 참 잘 끈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인께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 저 그런데 궁금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네. 뭐든 말씀해주세요.”

  “부인께서도 골프를 치십니까?”

  “아뇨, 저는 전혀 못해요. 의원님이 가르쳐 주셨지만 제가 워낙 둔해서요.”

  “그렇군요.”

 

 

 골프채에 대해서는 능숙하게 답했던 그녀가 정작 골프는 못친다...

 게다가 이 미망인은 자신의 말과는 달리 전혀 아둔해보이지 않았다.

 기태가 다시 한번 관자놀이를 검지로 긁적이며 물었다.

 

 

  “어젯밤 의원님을 만나지 못하셨다면 골프채는 지금 그대로 보관하고 있겠군요. 죄송하지만 어제 의원님께 전해 주려던 골프채를 보여주시겠습니까?”

 

 

 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차 트렁크에 그대로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혜영이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이.

 기태는 계속해서 자신의 눈길을 끌던 복도 끝의 방을 응시했다.

 바람이 불어든 것인지, 아까보다 방문은 더 열려 있었다.

 기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여대생의 방이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응접실 벽에 있던 레프팅 사진이 방안 곳곳에도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사진마다 차림새가 다른 것으로 보아 피살자의 딸은 레프팅이 취미활동인 듯싶었다.

 

 기태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사진들을 면면히 살펴봤다.

 피살자의 딸이 손에 들고 있는 패들에는 ‘돈미란’이라고 새겨진 이름이 보였다.

 

 

  ‘미란. 예쁜 이름이군. 이름처럼 얼굴도 예쁘고 귀염귀염 하고.’

 

 

 흠. 하지만 사진 속 미란은 뭔가 좀 이질적이었다.

 피살자의 미망인인 최혜영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혜영과 함께 찍은 사진 속 그녀는 딸이라기보다는 자매처럼 보였고, 모녀관계라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았다.

 

 

  “저기.”

 

 

 기태가 뒤돌아섰다.

 어느 새 혜영이 들어와 붉은 색 골프가방을 내밀었다.

 기태는 골프가방을 열고 안에 든 골프채를 흘깃 살폈다.

 

 

  “이거 참. 오늘 하루 종일 골프채를 여러 번 봅니다만 뭐가 뭔지 구분이 어렵네요. 제가 워낙 골프에 대해 무식쟁이라서요.”

  “아. 네. 처음에는 다들 골프채가 왜 이렇게 많은가 의아해하세요. 뭐가 궁금하신지요?”

 

 

 역시나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밴 여자였다.

 

 

  “그러니까 이 막대기가.. 아니 그게 아니라 이 골프채는 이게 다 한 세트인가요?”

  “네. 가방 하나가 한 세트예요.”

  “이 안에 모두 몇 개가 들어갑니까?”

  “모두 14개입니다.”

  “그렇군요.”

 

 

 기태가 다시 검지로 관자놀이 부분을 긁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건 안 보이는데...”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 예. 그런 게 있습니다. 이 중 1번 드라이버는 어느 겁니까?”

  “아...”

 

 

 골프에 대해 잘 모른다더니 그래서일까.

 혜영이 잠시 주춤하더니 손에 잡힌 골프채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아마, 이거 같네요.”

 

 

 기태는 혜영이 내민 골프채를 유심히 보았다.

 

 

  “골프채는 회사마다 모양이 다른가요? 제가 본 1번 드라이버랑은 다르군요.”

 

 

 혜영이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뭔가 헛갈리시는 것 같네요. 처음에는 다들 구분을 못하죠. 저도 그랬답니다.”

  “아. 역시 처음이라 그렇겠죠? 실은 제 눈썰미가 젬병입니다. 하핫.”

  “아 네.”

  “그나저나 골프가방 색깔이 참 예쁩니다. 의원님께서 빨강색을 좋아하셨나보군요?”

 

 

 별 의미 없이 묻는 질문처럼 보였지만, 혜영은 기태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태도 그녀의 눈을 대놓고 응시했다.

 사실 지금 던진 질문은 결코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맞은편 우아한 미망인은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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