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추리/스릴러
49일
작가 : 최극
작품등록일 : 20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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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퇴물의 비밀
작성일 : 20-08-24     조회 : 499     추천 : 1     분량 : 5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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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수의 거친 음성이 기태의 가슴 속을 후벼팠다.

 

  '대체 왜 이렇게 사느냐고? 뭘 숨기냐고?'

 

 하지만 기태는 상수에게 답을 줄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언제부터 나는 이 꼬라지가 된 걸까.’

 

 이제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순차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폭풍처럼 한꺼번에.

 한번 박살난 삶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이 났다.

 

 아내는 가정적인 여자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살뜰하게 키워냈다.

 아내 덕에, 말단 형사의 쥐꼬리만한 월급을 모아 '우리집'도 가지게 됐다.

 물론 갚아야 할 대출금이 어마했다.

 하지만 기태는 죽어라 일했다, 가족을 위해서.

 

 강력계 사무실에서 날밤을 새며 매일 특근을 자처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움켜쥐고 환하게 웃는 아내를 보는게 그의 행복이었으니까.

 

 그런데 3년 전 그날.

 딸 서연의 고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아내는 기태 앞에 이혼서류를 내밀었다.

 

 기태는 대체 왜 이러냐며 눈을 꿈벅였다.

 아내가 차갑게 물었다.

 

  “당신 장모가 돌아가신 건 알아?”

 

 아내의 말투에는 비난과 설움이 담겨 있었다.

 처가의 무남독녀 외딸이었던 그녀에게 장모님은 유일한 일가붙이였다.

 그런데 지병으로 반년 정도 병원 생활을 하던 장모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기태는 삼일 동안 장례식장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국가 전체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모든 경찰들이 일선에서 대기 중이었다.

 더욱이 기태는 1년 넘게 추적 중이던 강력범 검거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더 놀라운 말을 전했다.

 

  “장례식장이 난장이 된 건 알아?”

  “난장이라니?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내는 난생 처음 듣는 사나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깡패 같은 작자들 수십 명이 몰려왔어. 엄마 장례식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어 그 새끼들이!”

 

 기태는 놀랐다.

 그날 아내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별일 아니라 생각했다.

 

  “그놈들이 그러더라? 형사 남편 잘 둔 덕에 평생 죽을 각오로 살아야 할 거라구.”

 

 맙소사.

 기태는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추적 중이던 놈들이 패거리를 보내 아내를 협박해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장모님의 장례식장을 쑥대밭으로 만들다니.

 

  “서연이도 이제 당신이랑 살기 싫대.”

 

 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서연이까지!

 

  “서연이 학교까지 그놈들이 찾아갔어! 서연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애가 직접 경찰에 신고까지 했단 말야!”

  “아니... 그럼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뭐어???”

 

 아내는 기가 막힌 듯 기태를 노려봤다.

 그리고 저의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그날 서연이가 당신한테 전화를 열 번도 넘게 했어. 그런데 당신은 받지도 않았잖아!”

 

 그날...

 잠복근무를 했던 것 같다.

 

 사실 기태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서연이와 언제 전화통화를 했는지.

 돌이켜보니 그 아이와 대화를 섞지 않은 게 몇 주, 아니 몇 년은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기태는 딸애를 걱정 해본 적이 없었다.

 

 서연이는 공부든 운동이든 뭐든 알아서 척척 잘 해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중학교에서도 말썽 한번 피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딸애와 대화가 없어도, 자주 보지 못해도, 그냥 믿었다.

 딸애는 행복할 거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보다.

 

  “여보, 현주야..."

 

 기태는 아내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이혼이라니. 말도 안되는 일이다.

 기태는 어떻게든 아내를 달래볼 심산이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이제부터 내가 잘 할게. 집에도 꼬박꼬박 들어오고 서연이도 잘 챙기...?”

 

 그때 누군가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기태는 의아한 표정으로 입구에 선 남자를 보았다.

 시골에서 함께 자란 제 불알친구였다.

 

 기태는 얼떨떨한 상태로 친구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났다.

 몇 년 만에 봐서 우선 반가웠지만 이 상황에 나타난게 다소 의아했다.

 

  “홍근아. 이게 몇 년 만이야? 근데 너 우리 집을 어떻게 알고...?”

 

 순간 기태의 머릿속에 뭔가 번뜩였다.

 아내와 눈길을 주고받는 친구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현관문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들어왔단 말인가.

 

 형사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를 부른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그를 사랑한다 말했다.

 

 기태는 아내를 한번에 놓아주지 못했다.

 이혼소송이 벌어졌다.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했던 저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재판정에서 기태는 무능력자였다.

 외박을 밥 먹듯이 해 아내를 외롭게 만든 남자.

 부부생활도 문제가 많아 여자를 만족시켜주지 못한 무기력한 남자.

 살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보잘 것 없는 월급봉투만 내밀었던 남자.

 

 아내는 살기 위해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남편 기태는 자식 교육이나 성장에도 무관심한 자였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술을 마시고 폭력적인 남자였다.

 그렇게 기태는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실격이었다.

 

 반년의 소송 끝에 기태는 이혼을 받아들였다.

 재산이라 봐야 소형 아파트 한 채가 전부였는데 재판정은 절반분할을 명했다.

 

 하지만 기태는 아내에게 전부 줬다.

 자신 명의의 보잘 것 없는 보험금도 해지해 모두 아내에게 줬다.

 

 그가 떠받들던 법이 그를 퇴물로 판단했다면 그는 명백한 퇴물이었다.

 살아갈 가치가 없는 벌레로 판명된 이상, 모두 아내에게 주는 게 마땅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살을 부대끼고 살아온 아내와의 삶은 종결이 났다.

 그리고 가장 아끼던 딸 서연이도 떠나버렸다, 저 혼자 멀리.

 

 

  ***

 

 

  “상수야. 여기 세워주라.”

 

 달리는 상수의 차 안에서 기태가 갓길 한쪽을 가리켰다.

 상수는 인근의 포장마차를 슬쩍 보며 인상을 썼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집에 들어가 쉬죠?”

  “집에 갈 거야. 편의점 들려서 먹을 것 좀 사가려고 한다.”

 

 기태의 빤한 거짓말에 상수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연민이 차올랐다.

 상수가 다시 한마디를 하려는데 기태가 막았다.

 

  “얌마 범생. 넌 사람 말을 그렇게 못 믿냐? 진짜 바로 집으로 직행할 거야. 그러니까 여기 세워줘.”

 

 상수가 마지못해 차를 세웠다.

 기태가 쓸쓸하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상수는 의자 등받이에 잠시 머리를 기대고 저멀리 가는 기태를 응시했다.

 

 삼년 내내 구겨져 있는 점퍼와 때 묻은 바지.

 남편의 친구와 바람이 난 형수.

 아니 그따위 여자에게 형수란 호칭은 아깝다.

 그런 여자에게 대체 왜 모든 것을 다 줘버린 걸까.

 대체 왜 바보처럼!

 

 

  ***

 

 기태는 포장마차에서 두 시간 째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주인할매가 라면을 하나 끓여와 내밀자 기태는 눈웃음을 보냈다.

 그리고 뜨끈한 라면국물을 들이켰다.

 헛헛해진 속이 아리게 아파왔다.

 위장 어디 한군데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다.

 

 RRRR RRRR

 아까부터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태는 애써 외면하며 깡소주만 들이켰다.

 

  “딸네미 인갑네? 전화 안 받아?”

 

 시키지도 않은 홍합탕 한 사발을 또 내밀며 주인할매가 물어온다.

 이 할매는 기태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데 기태는 그 관심에 위안을 받는다.

 

  “받아도 안 좋고, 안 받아도 안 좋고. 마음이 그러네요.”

  “그래도 받을 거잖야. 아무리 속 시끄럽게 하는 자식새끼여도 부모는 다 받고 가는 거여. 자식 전화를 안 받는 부모가 이 세상 워디 있대.”

 

 순간 기태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지 않으면 차오른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RRRR RRRR

 기태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어이 우리 딸! 변 똥장이다, 오바!”

  [아부지, 또 술 드세요?]

 

 발끈 날이 선 딸의 말투, 매번 잔소리지만 얼마나 소중한가.

 기태는 소주와 라면을 힐끗 보며 고개를 저었다.

 

  “술은 무슨! 안 먹어. 일 잔도 안해. 일찍 퇴근해서 발 닦고 누웠지.”

 

 전화기 너머 딸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태의 빤한 거짓말을 알고 있으니까.

 

  [내일이 아버지 생신인건 아세요? 네?]

 

 빌어먹을 생일.

 해마다 잘도 찾아온다.

 하지만 그마저도 소중하다.

 적어도 1년에 한번 서연이 목소리는 들을 수 있으니까.

 

 기태는 일부러 놀란 척 연기를 했다.

 

  “오옴마? 내일이 내 생일이었어? 이야 이거이거. 아버지는 깜빡 했는데 우리 서연이는 잊지 않고 또 전화를 줬구나. 아이구 기특한 내 새끼.”

 

 서연인 말이 없다.

 불규칙한 호흡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올 뿐.

 

 기태는 불안했다.

 또 울겠지.

 세상에서 그 소리가 제일 듣기 힘겨운데.

 제발 오늘만은 명랑하게 행복하게. 제발

 

  “참 서연아. 새로 입학한 대학교는 어때? 자취하기 힘들지 않아? 공부는 잘하구?”

  [흐흑. 정말 속상해 죽겠어요.]

 

 결국 터졌다, 모지리 같은 나 때문에.

 하지만 기태는 매번 딸을 어떻게 달래야할지 난감했다.

 

  “서연아. 갑자기 왜 또 울고 그래.”

  [그놈의 술술! 도대체 왜 그러세요! 어머니 안 돌아와요. 저도 안 간다구요! 그러니까 집에 가서 옷도 깨끗이 다려 입고 밥도 지어 드시라구요. 흑흑!]

 

 고작 스무 살인 아이.

 열일곱에 이 아이는 못 볼꼴을 다 봤다.

 아버지의 몰락...

 엄마와 다른 남자의 관계...

 

  “서연아. 아버지가 변변치 못해서 이 꼴이다.”

  [제발 좀 정신 좀 차리고 살면 안 돼요? 그냥 다른 아저씨들처럼 집에서 먹고 자고. 내가 아버지한테 신경 쓰지... 않게... 그냥 각자...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 안되냐구요!]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어. 아빠가 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작년처럼, 제 작년처럼, 삼년 전 그날처럼 기태는 또 딸에게 빌었다.

 양육권을 빼앗긴 기태지만 그래도 딸에게는 평생 죄인이어야만 했다.

 

 아내는 딸 혼자 자취하도록 서울에 원룸을 구해줬다.

 딸은 두 번이나 버려졌다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딸은 제 엄마와도 연락을 끊고 살았다.

 하지만 핏줄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끊어지는가.

 

 한참동안 흐느끼던 딸이 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미역국... 꼭 끓여 드세요.]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기태는 손에 쥔 핸드폰을 노려봤다.

 

  ‘이제 또 1년이 지나야 이 아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겠지.’

 

 그 전에 자신이 먼저 연락하는 일 따위는 없어야 했다.

 딸에게 살갑게 굴고, 그 아이를 만나 챙기는 일 따위도 하지 않아야 했다.

 서연에게 자신과 아내는 지워버리고 싶은 존재니까.

 

 포장마차 테이블 위에 지폐를 던져 놓고, 기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밤이, 더욱이 오늘 밤이, 가장 싫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작년에도 했었는데.

 

 거리에 나선 기태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기태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집과는 반대방향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내를 용서할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차마 상상할 수도 없는 일.

 

 딸은 기태보다 먼저 엄마의 바람을 목격했다.

 기태는, 딸의 정신과 상담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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