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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잎에 능금
작가 : 목탄
작품등록일 : 20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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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늘을 가르는 연
작성일 : 20-08-24     조회 : 400     추천 : 1     분량 : 5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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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금이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존다. 찬이 좋아져서인가, 뽀얀 피부가 희게 빛나고, 가슴께도 제법 부풀어 올랐다. 나비 한 마리가 꽃인가 싶어 나풀대며 다가왔다가 이내 날아가 버린다.

 아침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던 화홍이 능금을 발견하고는 흔들어 깨운다.

 “어찌 밖에 나와 조는 것이냐.”

 능금이 스르르 눈을 뜬다. 붉은 기가 도는 먹감 빛 눈동자가 저하를 올려다본다.

 “저하, 저 좁은 비현각에 세 사람이 웬 말입니까?”

 “다른 이가 또 들었단 말이냐.”

 “예. 덕분에 저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누가 비현각으로 궁녀를 보냈단 말인가. 중전인가. 세자빈인가 누가 되었건 불길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밖에 나와 졸고 있는 것이냐.”

 “하루만 눈 감아 주십시오. 부채 그림을 그리느라, 손목이 나갔지 뭡니까.”

 붉게 부어오른 손목이 안쓰럽긴 하다.

 “일이 없다면 나와 놀자꾸나.”

 “뭐 재미진 게 있습니까?”

 능금이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다. 졸고 난 너는 더 예쁘구나.

 “있다마다.”

 

 능금이 걱정된 부사가 수리취떡을 소매에 챙겨들고 비현각을 향한다. 능금은 보이지 않고, 못 보던 궁녀가 소란과 티격태격 싸우고 있다.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 게냐. 이곳이 서고인 것을 잊었단 말이냐.”

 부사의 불호령에 두 여인이 잠잠해진다.

 “너는 천한 비자가 아니냐! 네가 함부로 대할 궁인이 아닌데, 어찌 그리 말대답을 하는 것이야.”

 “하지만, 능금이 정리해둔 것인데, 맘대로 바꾸려 하지 않습니까.”

 “너는 궁중의 법도도 모르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오늘따라 별감나리가 이상하다. 그래도 능금과 나에게는 스스럼없이 대해주셨는데, 어찌 이러는 것일까. 소란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너는 앞으로 서고 일을 하지 말거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소란이 주저앉는다.

 비현각 서고를 제 멋대로 정리하던 모순이 그제야 기세 등등 소란을 내려다본다. 그럼 그렇지, 어디 천한 것이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고년 참 쌤통이다.

 “앞으로 서고 일을 잘 부탁하오. 이리 깔별로 정리해두니 보기에 참 좋구려.”

 부사의 미색에 홀린 교태전 궁녀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비현각 도령들은 죄다 다정하시구나. 글을 가까이 하셔서 그런 것인가. 부사의 격려에 힘을 얻은 궁녀가 온갖 방정을 떨며 서고를 누빈다. 그 소란에 품에 두었던 노리개가 툭 떨어진다. 노리개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궁녀가 책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다.

 부사가 혀를 끌끌 차며 서고를 둘러본다. 여기가 무슨 비단 가게인가. 무슨 책을 이리 정리한다는 말인가. 어찌 글을 모르는 궁녀를 서고에 들여보낼 생각을 했을까. 백치가 따로 없구나. 부사가 절래절래 고개를 흔든다. 뭐 저 정도 미색이면 바보여도 상관이 없으려나. 실소를 하던 부사가 모순이 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주워든다. 나비문양이 화려한 노리개다. 궁녀의 물건치고는 지나치구나. 가만,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부사가 주운 노리개를 소맷부리에 숨긴다. 중전의 속내를 이 노리개가 말해줄지도 모르겠구나.

 “그 고운 손이 서고 일에 맞을까 모르겠소.”

 부러 모순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는 부사, 노리개를 훔친 죄가 있어서인지 아주 나긋나긋하다. 손을 뺄 생각도 아니 하고, 모순도 수줍게 웃는다. 더는 보다 못한 소란이 문을 박차고 나간다.

 “참말로 엿 같네.”

 아무리 예쁜 것만 살기 좋은 세상이라지만, 어찌 저리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것이냐. 별감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나쁜 사람이다. 능금을 아낄 때는 언제고, 금세 모순에게 마음을 준단 말인가. 아무리 사내는 같다지만, 별감이 그럴 줄은 몰랐다.

 모퉁이에 서서 훌쩍이는데, 별감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온다.

 “서운하였냐?”

 “저 같이 천것에게 말 걸지 마십시오.”

 “단단히 토라졌구나.”

 부사가 소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불쌍한 것, 공연히 너를 아프게 했구나.

 “소란아, 너를 그리 대한 건 진심이 아니었다.”

 “상관없습니다.”

 “너는 비현각에 속한 게 아니라, 능금에게 속한 것이 아니냐. 궁녀에게 대든들, 능금에게 피해가 갈 뿐이다.”

 부사의 깊은 속을 깨달은 소란이 흐느낀다.

 “이 년은 그것도 모르고,”

 “앞으론 능금을 위해서만 일해라. 비현각 일은 모순에게 맡기고,”

 “그래도 될까요?”

 “그게 저하께서 원하는 일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사가 능금에게 주려고 챙겼던 수리취떡을 소란에게 건넨다. 아무래도 이건 네 몫이었나 보다. 소란이 떡을 받아들고는 피식 웃는다.

 “별감나리는 참 다정하시네요.”

 “다정이 병이기는 하지.”

 그 다정에 많은 여인들이 끙끙 앓고 있으니, 병이 맞는 게다. 전염병.

 

 청색 연과 홍색 연이 바람 타고 먼 데까지 날아간다. 소싯적에 연 좀 날려보셨는가 저하의 솜씨가 견 줄 바 없이 좋다.

 “연줄을 더 풀어라.”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얼레를 푼다. 연이 날아오르는 것만큼 능금의 마음도 둥실 떠오른다. 내 몸이 나는 것도 아닌데, 이리 신나는 구나. 절로 웃음이 난다.

 능금의 웃음소리에 화홍의 입 꼬리도 올라간다. 꼭 어린아이 같구나.

 “저리 날고 싶습니다.”

 “나도 그렇다.”

 “산을 넘어, 바다까지 날아가고 싶습니다.”

 “나도 그러하다.”

 능금의 얼레가 계속 돌아간다. 결국 연줄이 얼레를 벗어나버린다.

 “그럼, 얼레를 버려야 합니다.”

 홍연이 연줄을 놓고 훨훨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홍연을 쫓던 청연만 하늘에 나부낀다.

 “용이 날기 위해선, 저도 버리고, 궁도 버리셔야 합니다.”

 화홍의 얼레가 툭 바닥으로 떨어진다.

 “대체 너는!”

 얼레를 벗어난 연이 홍연을 쫓아 먼 하늘로 사라진다. 화홍이 능금의 어깨를 붙든다. 먹감 빛 눈이 총명하게 빛난다. 그새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이냐.

 화홍의 애절한 눈빛에 능금의 볼이 물든다. 또 이 깨물고 싶은 뺨인 게냐. 화홍의 붉은 입술이 능금의 뺨에 닿는다.

 “연모한다.”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능금을 화홍이 끌어안는다.

 “너를, 연모한다.”

 

 아무리 부채를 펼쳐든들, 팔랑팔랑 부쳐본들 홍옥이 요지부동이다. 뭔가 토라진 모양인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가. 능금이 고개를 갸웃대며 툇마루에 앉아있다.

 “앵두화채나 같이 마시려 했건만, 고집불통이네.”

 손톱달이 하늘 언저리에 콕 박혀있다. 물벌레 소리만 그윽하게 들려온다.

 “능금아!”

 무명천을 든 소란이 종종대며 달려온다.

 “목욕물 받아 놨다. 어서 가서 씻어라.”

 “우물도 먼데, 물을 받아놨단 말이냐?”

 “이제 너를 모시는 것 말고는 할 것도 없는데, 그깟 목욕물이 대수겠어.”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런 게 있어. 물 식기 전에 어서 씻어.”

 고생을 해서 물을 받았을 게 분명한데,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구나. 능금이 행랑으로 향한다. 목욕통 그득 따뜻한 물이 넘실댄다. 이 얼마만인가. 긴 머리도 풀어 헹구고, 묵은 먼지도 씻어낸다. 물이 넘실넘실 넘쳐 옷가지가 젖어들고, 곁에 둔 부채가 젖어든다.

 “왜 이리 축축한 거냐.”

 참다못한 홍옥이 젖은 옷자락을 털며 나타난다.

 “야! 어서 안 나가!”

 그리 부를 땐 나타나지도 않더니, 하필 왜 지금 나타난단 말인가. 능금이 다급하게 몸을 가린다.

 “부채가 젖기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욕제가 날아든다.

 “알았다. 알았어. 나가면 될 것 아니냐.”

 홍옥이 나가려는 찰라,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는다.

 “누가 온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모순이 아닌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주변을 두리번대며 이편을 향해 다가온다. 앞뒤 안 가리고 훌렁훌렁 옷을 벗는 홍옥, 능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미쳤어?”

 “쉿! 여자인 걸 들킬 테냐?”

 상황을 눈치 챈 능금이 물밑으로 숨는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습니다.”

 모순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토록 능금의 등이 넓었던가. 우뚝 선 사내의 등을 훑던 모순이 상대가 다름을 알고는 당황한다.

 “너는 대체 누구이기에 사내가 목욕하는 곳을 이리 함부로 드나든단 말이냐!”

 “송구합니다. 비현각 시동이 목욕 중이라 들어서.”

 “시동은 사내가 아니더냐. 궁중의 예가 이리도 문란해서야!”

 사내의 벼락같은 목소리에 모순의 정신이 혼미해진다.

 “송구합니다.”

 갈아입을 옷을 팽개치듯 놔둔 채 모순이 줄행랑친다. 그제야 참던 숨을 몰아쉬며 능금이 고개를 든다.

 “앞으론 궁에서 목욕을 해선 안 되겠다.”

 능금이 젖은 얼굴로 끄덕인다. 그나저나 어찌 나간담. 능금의 마음을 눈치 챈 홍옥이 도포를 펼쳐 젖은 몸을 가려준다.

 “어서 나와. 감기 걸려.”

 “응.”

 서둘러 나오던 능금이 젖은 옷자락을 밝고는 휘청 넘어진다. 능금을 받던 홍옥도 덩달아 쓰러진다. 찰랑찰랑 넘치던 물이 기어이 둘을 자빠뜨리는 구나. 희게 드러난 어깨가 어둠 속에서 빛난다. 홍옥이 떨리는 손으로 능금의 등을 보듬는다.

 “너 땜에 미치겠다.”

 홍옥의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뺨을 타고 전해진다. 사내의 가슴이 이리 넓고, 이리 따스한지 몰랐다. 당황한 능금이 일어나려는데, 홍옥이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싫으냐.”

 “그런 게 아니라,”

 “그럼, 가만 있거라.”

 “홍옥…”

 홍옥이 손을 들어, 능금의 젖은 옷을 벗긴다. 꽁꽁 감추어두었던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매끄러운 다리가 수줍게 나타난다.

 “너는 내 여인이다. 처음 나를 주워왔던 그 날부터, 넌 내 여인이다.”

 홍옥이 능금의 입술에 입 맞춘다. 세자 따위에게 빼앗긴 것이 분해서인가. 그 입술이 거칠다. 홍옥의 손가락이 능금의 가슴을 더듬는다. 이리 말랑하고 부드러운 것을 잘도 숨겼구나. 찰떡인가 구름인가 어찌 이리 탐스럽단 말인가, 애타는 입술이 목덜미에 닿고, 이내 부푼 가슴에 닿는다.

 능금의 호흡이 가빠진다. 이 뜨거운 불덩이는 무얼까. 능금이 손을 들어 비늘이 돋은 홍옥의 등을 쓰다듬는다. 비늘조차 사랑스럽구나. 네 숨결조차 사랑스럽구나. 홍옥의 눈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난다.

 “능금! 능금! 안에 있어?”

 화들짝 놀란 홍옥이 부채로 날아들고, 능금이 번개처럼 옷을 주워 입는다.

 “어, 어, 무슨 일인데.”

 막 저고리를 둘러 입는데, 소란이 벌컥 들어온다.

 “너 옷이 없어졌기에. 어, 갈아입었네?”

 “어, 이거 모순이 갖다 줬다.”

 “모순? 이 미친 것이. 사내가 목욕하는 델 함부로 들어왔단 말이야?”

 “그러는 넌,”

 “나야, 비자잖아?”

 “너도 안 된다.”

 비자는 사내가 목욕하는 데 들어와도 된다는 말인가. 어째 능금의 몸을 찬찬히 훑는 것이 시커먼 속셈이 있었던 것 같다. 욕망에 눈이 먼 건, 홍옥 뿐 만이 아니구나. 하긴 이 긴긴 달밤에 무슨 오락거리가 있으리오. 시무룩한 표정의 소란이 젖은 옷가지를 들고는 사라진다.

 “여러모로 위험했다.”

 능금이 젖은 부채를 팔랑팔랑 부친다.

 “특히 너!”

 부채 속 용이 억울한 듯 수염을 꿈틀댄다.

녹수 20-08-27 19:35
 
애절하게 몽글거리는 회차였습니다.
벌써부터 화홍을 지켜보는 것이 이리 아프네요. 화홍 어쩔까요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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