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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품절남이 아닌가요
작가 : 최극
작품등록일 : 202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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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나도 유부남은 노거든요.
작성일 : 20-08-24     조회 : 352     추천 : 0     분량 : 5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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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판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소란스러웠다.

 그들 틈에 대명과 은정, 달환도 보였다.

 은정은 게시판에 시선을 붙박은 채 중얼거렸다.

 

  "... 우리 막내 수남 씨가... 저렇게 생겼었네요.”

  "그러게. 극단적으로 사실적이어서 몹시 인상적이군."

  "네. 그렇긴 하네요. 누구든 한번에 알아보기는 하겠어요."

  "응. 일단 난 여기에 하트를 붙이고 싶군.”

 

 대명이 하트 스티커를 집어 꾹 붙였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임에게 엄지를 척 올렸다.

 쭈쭈바를 물고 있던 사임은 안경을 고쳐 쓴 채 꾸벅 인사했다.

 

 은정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명에게 물었다.

 

  “저 팀장님. 굳이 왜 거기에 스티커를...?”

  “이 부위가 가장 풍성하고 널찍해서.”

  “아 예. 많이 풍성하긴 하죠. 그럼 저도 가리는 의미에서.”

 

 은정도 하트를 꾹 눌러 붙였다.

 그때였다.

 뒤에 선 달환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아무래도 아니야. 당장 떼야겠어. 걍 뒀다간 일 나지 일나."

 

 달환이 게시판에 손을 댔다.

 그러자 대명이 제지했다.

 

  “뭐하는 거야, 성 실장?'

  "이거 떼어내려구요. 다시 생각해봐도 이건 몽타주가 아니예요."

  "그건 성 실장이 판단할 일이 아니야. 스티커 가장 많이 받는 인턴이 정식 채용 가산점 있다며? 그런데 이것만 미리 떼면 불공정 인사라구.”

  “형님. 우리 수남이가 이걸 보면 날 가만 두겠어요? 난 기냥 꺅-”

 

 - 뭔데요? 내가 뭘 봐요?

 

 달환이 사색이 되었다.

 어느 새 청사에 들어선 수남이 얼굴을 쏙 내민 것이다.

 

  “수, 수남아... 너 왜 벌써 왔어?"

  "환자가 진술을 잘 해줘서 일찍 끝났어요. 그나저나..."

 

 게시판을 보려는 수남의 얼굴을 달환이 휙 잡았다.

 

  "수남아! 절대 게시판 보면 안 돼. 나만 봐. 온니 나만 봐!”

 

 수남이 달환의 손을 부드럽게 제지했다.

 

  “왜들 그러시나 다들? 이렇게 모여서 대체 뭘 보길..? 후억!”

 

 그림을 본 수남이 돌처럼 굳었다.

 

  “뭐야 저게!!!"

 

 게시판에는 세 장의 몽타주가 붙어 있었다.

 두 장은 일반적인 몽타주로 수남의 얼굴과 흡사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장은...

 수남의 알몸 전신!

 다행히 포즈를 옆으로 취해 중요부위는 가렸다.

 하지만 업된 엉덩이와 그곳에 빼곡히 채워진 하트스티커!

 

 수남의 눈이 차갑게 일렁였다.

 호흡을 잠시 고르던 수남이 날선목소리로 말했다.

 

  “뭡니까! 다들 일 안합니까! 무슨 큰 일 났다고 이따위 허접한 그림을 보고 있는 거죠?"

 

 서슬퍼런 수남의 목소리에 모인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중 달환이 가장 빨리 달아났다.

 

 

 ***

 

 

 수남은 한 시간 내내 게시판 앞을 서성였다.

 누가 오면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그러다가 게시판을 힐끔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누가봐도 그는 미친놈처럼 보였다.

 

  “야유. 다 먹었다.”

 

 쭈쭈바를 탈탈 털어먹은 사임이 다가왔다.

 그리고 게시판에서 제가 그린 알몸그림을 떼며 능청스레 물었다.

 

  “이거, 가질래요?”

 

 수남이 휙 쏘아봤다.

 

  “그걸 몽따주라고 그린 거야, 당신?”

 

 사임이 수남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히쭉 웃었다.

 

  “네. 정말 본 것 같죠?”

 

 수남은 기함을 토했다.

 이렇게까지 뻔뻔하고 노골적인 여자일 줄이야.

 이제보니 폭탄머리와 뿔테안경은 속임수다.

 이 여자의 속에는 음흉한 너구리가 들어앉았다.

 

 사임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깨달은 바가 있으실라나?"

  "뭐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퀴벌레의 궁상상상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이제 알겠냐구요?”

 

 그런데 수남이 피식, 조소하는 게 아닌가!

 

  "그 따위 비루한 손기술로 날 엿먹였다고 생각해?"

 

 사임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뭐? 비루해? 이런 네가지 없는 인간!

 

  "비루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요! 내가 무슨 애로를 그린다고 말해요! 왜 근거도 없는 말을 함부로 해요!”

  "근거가 없어?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어. 6개월전 당신이 세미나실에 숨어들어와 음란그림을 그린 걸 잊었나?"

  "그건 일 때문이었다구요!"

 

 수남이 사임을 쏘아봤다.

 

  "무슨 일?"

  "그냥... 알바요."

 

 수남이 한발짝 불쑥 다가왔다.

 

  "무슨 알바?"

  "왜, 왜이래요. 그냥 알바예요, 그림 그려주는..."

  "당신 진짜 정체가 뭐지? 왜 자꾸 날 따라다니는 거지?"

  "내가 언제요? 착각도 진짜 가지가지셔!"

  "아니 착각이라고 호도하지 마."

 

 수남이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으르렁거렸다.

 

  "어제 그 교통사고 사기극도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사, 사기요? 이봐요 그건 진짜 교통사고였다구요! 당신이 운전을 잘못해서 우리랑 부딪친 ..."

  "그 남자와 한 패인가? 나한테 뭘 노리는 거야? 설마...?"

 

 설마? 설마 뭐?

 

 사임이 턱을 치켜들었다.

 어디 할 말 있으면 다 해보시던가!

 

  "해을일 알아?"

  "해을... 이요? 그게 누군데요?"

 

 수남이 다시 사임에게 다가왔다.

 놀란 사임이 뒤로 물러서다 굳었다.

 뒤는 벽.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사임은 침을 꼴깍 삼키며 수남을 응시했다.

 수남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조각처럼 날선 턱과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은 콧날.

 씩씩대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사임의 속눈썹을 흔들어댔다.

 

 사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이렇게 가깝게 다가온 거야!'

 

 그때였다.

 

  "그 여자를 모르면 됐어."

 

 별안간 뒤로 물러난 수남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6개월 전 말했지. 나에 대한 쓸데없는 사심은 접어두라고. 명심해."

 

 사임은 후, 안도했다.

 그나저나 사심은 무슨!

 나도 유부남은 노거든요!

 

 ***

 

 달환과 사임이 정좌세로 앉아 있었다.

 햇빛 가득한 창가에는 잘 손질된 동양난이 놓여 있었다.

 청장은 난잎을 닦아주고 뒤돌아섰다.

 

  “성달환 실장. 인사평가가 장난인가?”

  “죄...죄송합니다, 청장님! 제가 사람 관리를 잘못했습니다. 여기 천사임 인턴은 오늘 중으로 당장 자르겠습니다.”

 

 사임이 달환을 훅 봤다.

 갑자기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청장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성한 경찰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상사로써 책임을 져야겠지?”

 

 달환이 식겁한 얼굴로 청장을 봤다.

 

  "처, 청장님! 저는 그저 이 무지몽매한 인턴이 그린 그림을 게시한 죄밖에는..."

 

 청장이 사임에게 다가왔다.

 

  “천사임 인턴.”

  “네! 청장님!”

  “자네 때문에 나 오늘 모처럼 웃어봤네.”

  “네에?”

 

 달환과 사임이 놀라 서로를 봤다.

 대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천사임 인턴이 그린 몽타주는 딱 봐도 정수남 경위였어. 몽타주란 한 번 보면 누군지 확실함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하지.”

 

 달환이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청장님. 그건 몽타주가 아닙니다.”

  “몽타주가 아니면 뭔가?”

  “그... 그건... 그러니까 그런 야한 그림은...”

  “기술적인 부분이야 앞으로 자네가 가르치면 되고. 누군가의 얼굴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확히 그려내는 것, 그게 몽타주 행정관의 자질이라고 보네. 오늘 게시판에 부착된 천사임 인턴의 몽타주는 삼십년 공직생활 중 가장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몽타주였어, 그러니까.”

 

 청장이 사임에게 다정히 말했다.

 

  “천사임 인턴을 정식 채용하지.”

 

 놀란 사임이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으헉! 지지진짜요, 청장님??"

 

 청장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임이 덥썩 청장의 손을 잡았다.

 감사했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갑자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정수남이 들어섰다.

 

  “오. 우리 청사의 보물 정수남 경위. 어서 와.”

  “청장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게시판에 부착된 몽타주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갑자기 사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중하게 가라앉은 수남의 목소리와 딱딱한 표정이 아무래도 불길했다.

 

  “그래? 뭔지 말해 보게.”

  “청장님께만 따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 경위 말이라면 뭐든 오케이야. 그럼 두 사람은 이만 나가보도록 하지?”

 

  ‘어어? 이대로는 안 되는데...?’

 

 사임은 자신도 모르게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달환이 사임을 쿡- 찌르며 끌어당겼다.

 

 

 * * *

 

 

  “엄마!”

 

 어두컴컴한 지하 원룸.

 사임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정수남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사임은 정식으로 채용이 확정됐다.

 그리고 ‘행정관 천사임’이라고 새겨진 네임텍까지 받은 것이다!

 

 사임이 가방에서 네임텍을 꺼내 봤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근사했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엄마'라는 소리도 절로 나왔다.

 

  “아참 딸기.”

 

 사임은 비닐봉지에 담긴 딸기를 꺼내 개수대에서 씻기 시작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엉덩이가 들썩였다.

 사임이 씻은 딸기를 들고 방문을 두드렸다.

 

  “엄마! 딸기 사왔어. 나와서 드세요!!"

 

 하지만 답이 없다.

 순간 서늘하고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사임은 후다닥 방문을 열었다.

 

  ‘안 돼!’

 

 방안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비상금을 숨겨놓은 양말 더미는 무참히 흩어져 있었다.

 

 사임은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엄마는 또 뒤통수를 치고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 * *

 

 

 비쩍 마른 교복차림의 소녀가 방구석에 쭈그려 있었다.

 그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방바닥에 널부러진 여자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제야 널부러진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피멍으로 뒤덮여 처참하게 부어있고 입술도 찢어져 있다.

 

  '엄마...'

 

 교복을 입은 소녀 사임이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엄마가 사임의 손을 마주잡았다.

 

 손위에 포개진 엄마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지면 어떡해.

 소녀 사임은 무섭다.

 

  ‘나 때문이야. 내가 엄마를 보호하지 못했어.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콰르르 쾅쾅쾅!

 창밖에는 세차게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번쩍였다.

 사임은 엄마를 끌어다 품에 안았다.

 

 '제발. 더는 안돼. 오늘 더는 안돼.'

 

 사임은 엄마를 꽉 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우르르 쾅 쾅 번쩍!

 사임이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검은 그림자가 우뚝 서있었다.

 그가 번뜩이는 뭔가를 높이 치켜들자 소녀사임은 비명을 질렀다.

 

 안돼!!!

 

 

 * * *

 

 

 사임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느 새 아침 햇살이 조금 스며든 지하 방안.

 불길한 악몽이었다.

 

  ‘왜 또 꿈이 시작된 걸까.’

 

 사임은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손으로 꽉 쥐었다.

 내 마음을 진정시켜줄 나의 루틴.

 하지만 오늘따라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이 꿈을 꾸는 날에는 반드시 일이 터졌다, 그것도 연속적으로.

 

  ‘사임씨. 머피의 법칙이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믿지 말아요.’

 

 구제성을 처음 만난 날.

 그가 사임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고 해준 말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불어요.’

 

 동시에 응급상황에 대비한 물건이기도 했다.

 

 RRRR RRRR

 사임은 불길하게 핸드폰을 쳐다봤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김순옥씨 보호자 되시죠?”

  “네... 그런데요?”

  “강남 경찰섭니다. 지금 이리로 와주시죠.”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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