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지옥에서 온 영화감독
작가 : 신해강정조준
작품등록일 : 2020.9.2
  첫회보기
 
멜로를 부탁해 (2)
작성일 : 20-09-02     조회 : 267     추천 : 0     분량 : 4812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그랜드 호텔 커피숍.

 “처음 뵙겠습니다, 감독님. 김주호입니다.”

 전시연의 소속사 대표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조요한입니다.”

 난 자리에 앉으며 힐끗 전시연을 쳐다봤다.

 전시연은 커다란 선글라스와 머플러로 얼굴을 꽁꽁 가린 채 앉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특유의 미모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김주호 대표가 활짝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시나리오 너무 잘 봤습니다. 저 완전 감동 먹었어요. 하하하!”

 “그쵸? 저도 완전 깜놀했어요. 이 시나리오 읽으니까 중학교 때 헤어졌던 첫사랑이 생각나지 뭐예요? 호호호!”

 오유미 대표가 간지럽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겸손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전시연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전시연은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거린다. 김주호 대표가 그런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전시연에게 슬쩍 물었다.

 “시연아, 넌 어땠어?”

 전시연이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머플러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으음... 시나리오가 어땠나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며 입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무조건 그녀의 마음에 들어야 이 영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연은 무표정한 눈으로 날 한참 바라봤다.

 “완전 대박! 겁나 재밌어! 감독님 완전 천재!”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나도 모르게 바보같은 웃음이 쏟아지고 말았다.

 “아휴, 천재는 무슨! 천재까지는 아니구요. 그냥 노력을 좀 한다...”

 “아뇨! 감독님 천재 맞아요.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로맨스를 쓸 수 있겠어요? 연애도 한번 안 해본 사람이?”

 “네? 그게 무슨...?”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연애 한 번도 안 해보셨죠?”

 ‘잉? 이건 또 뭔 소리냐?’

 “연애를 안 해보다뇨? 저 문란한 남자에요. 하하하!”

 난 일부러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전시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요? 근데 시나리오가 왜 이래요?”

 “뭐, 문제라도 있나요?”

 “뭐랄까? 이야기는 재밌는데, 감정의 디테일이 안 보여요. 이건 아무리 봐도 연애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상상으로 쓴 글이야.”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것 마냥 목이 움츠러들었다.

 “감정은 나중에 정리하려고...”

 “아니죠! 멜로는 감정이 핵심인데, 그걸 가장 먼저 정리했어야죠.”

 맞는 말이다.

 멜로는 감정의 플롯이다. 때문에, 두 남녀의 구체적인 감정의 변화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해야 했다. 그런데, 난 시나리오를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스토리 위주로 글을 썼고, 그러다보니 디테일한 감정까지는 담아내지 못한 것이다.

 ‘역시 멜로는 무리인가?’

 명치끝이 묵직해지며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전시연이 그런 나를 달래듯 싱긋 웃었다.

 “아휴, 지금부터 고치면 되죠. 자, 어디 한번 봅시다.”

 전시연이 핸드백에서 제본된 시나리오를 꺼내 내 앞에 펼쳤다. 문장 한 줄 한 줄마다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정리된 메모를 보니, 새삼 그녀의 프로정신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톱스타는 그냥 되는 게 아니다.

 그때, 김주호 대표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좀...”

 “저도 잠깐 실례를...”

 오유미 대표가 일어서며 내 손에 쪽지를 쥐어주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시연이 의견에 무조건 오케이 하세요. 배우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영화의 시작입니다. 아셨죠?’

 하긴, 전시연이 내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 해도 큰 행운이다. 이제 그녀의 아이디어를 빌려 한발 짝 더 나아가면 된다.

 ‘한번 해 보자!’

 난 전시연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시연씨, 어떤 아이디어라도 좋으니까 다 말씀해주세요. 소중한 의견 반영해서 다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 이렇게 마음이 열려있는 감독님은 처음이야. 멋지시다...”

 전시연이 반한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난 부끄러웠지만 애써 태연한 척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럼 시작해보시죠.”

 “네, 제가 다 정리해왔으니까 금방 끝날 거예요.”

 전시연이 시나리오를 펼쳤다.

 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빨간 펜으로 죽죽 그어져 있었다.

 “일단 여자가 남자를 찾아온다는 설정부터가 말이 안돼요. 올 거면 남자가 와야지.”

 “왜 그렇죠?”

 전시연이 뚱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감독님은 첫사랑 언제 해봤어요?”

 “중학교 때 같은 반에 있었던...”

 “그쵸? 남자는 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근데 여자는 달라. 버스 떠나면 곧바로 빠이빠이거든. 난 첫사랑이 누군지 기억도 안나요.”

 “아... 그런가요? 그런데 남자가 왜 갑자기 첫사랑을 찾아왔을까요?”

 “암에 걸렸으니까.”

 암? 그건 너무 뻔한 신파잖아!

 “하하... 시연씨, 그래도 암은 좀...”

 “왜요? 내 아이디어가 별로예요?”

 전시연이 뾰로통한 눈으로 날 노려봤다.

 순간, 내 손에 쥐어진 오유미 팀장의 쪽지가 보였다.

 ‘시연이 의견에 무조건 오케이하세요.’

 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암은 아닌 것 같아요. 희귀암... 백혈병 어때요?”

 “어머! 나도 좀 전에 그 생각했는데. 찌찌뽕!”

 전시연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시나리오를 넘겼다.

 “그리고, 남자 직업이 정원사라는 게, 좀 약하지 않나요?”

 “그럼 뭘로...?”

 “동물원으로 가시죠? 사육사 어때요?”

 “호랑이 사육사겠죠. 강인하고 터프한 남자. 어흥!”

 “맞아요, 맞아요! 호호호!

 일단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으니 얘기가 술술 풀린다.

 이후로도 전시연의 깨알같은 조언은 계속됐고, 난 그녀의 아이디어를 빼곡하게 받아 적으며, 쉴 새 없이 토론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났을까?

 체력이 다 떨어졌는지 정신이 멍해졌다.

 “잠깐만 쉬었다 할까요?”

 “아뇨, 거의 다 끝났어요.”

 전시연은 콧잔등을 찡긋하며 시나리오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두 사람이 헤어지면 안 될 것 같아요. 첫사랑이랑 결혼을 해야 진정한 사랑이 완성되는 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면 싹 다 바뀌는 거다.

 인물, 사건, 배경, 주제... 모든 걸 새로 써야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결말 좀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래요, 첫사랑이랑 결혼하면 아름답겠네요. 허허...”

 전시연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시나리오를 덮었다.

 “아휴, 뿌듯해. 이제 감독님이 정리만 하면 되겠네요.”

 “그렇겠네요. 하하하...”

 “얼마나 걸릴까요? 감독님 실력이면, 하루?”

 “아뇨! 하루만엔 어렵고...”

 “좋아요. 사흘 뒤에 보죠, 뭐.”

 또 사흘?

 그녀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시나리오 완성되는 대로 저한테 보내주세요. 감독님 글... 제가 가장 먼저 읽고 싶어요.”

 전시연이 이메일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같이 와인이라도 한잔 하면서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눠보자구요.”

 헉! 단둘이... 와인을?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혹적인 눈동자 속으로 난 또 그렇게 빠져들고 말았다.

 “네... 사흘 뒤에 뵙겠습니다.”

 

 ***

 

 탁... 탁... 탁...

 손가락이 일하기 싫다고 몸부림을 치며 키보드 위를 꾸물꾸물 기어 다닌다.

 <동물학 개론>

 ‘첫눈에 반한 남녀가 동물원으로 데이트를 간다. 그때, 호랑이가 탈출해서 여주를 덮치고. 남주는 호랑이를 멋지게 때려눕히며 여주를 구한다. 그런데 남주는 느닷없이 백혈병에 걸려버리고... 여주는 호랑이 쓸개가 특효약이라는 소문을 듣고 호랑이 사냥을 떠나는데...’

 아!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스토리냐?

 난 키보드를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도록 고민해봤지만 시나리오는 산과 계곡을 헤매다 결국 죽음의 사막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도저히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전시연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화가 들어갈 수 없다.

 ‘진퇴양난!’

 이를 어쩐단 말이냐?

 난 온몸에 힘이 빠지며 방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 스승한테 물어보자.’

 

 ***

 

 “배우를 바꿔.”

 봉감독의 대답은 아주 명쾌했다.

 “배우를 바꾸면 투자 받기가 힘든데요.”

 “그럼 투자사를 바꿔.”

 “오유미 대표가 제작하는 영화라...”

 “그럼 제작사를 바꿔. 여기 문어대가리 있잖아.”

 봉감독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서류만 뒤적거리고 있다.

 ‘에휴... 괜히 왔나보다.

 내 입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그러자, 봉감독이 근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요한아.”

 “네, 감독님.”

 “너, 그 이야기에 자신 있냐?”

 “처음엔 자신 있었는데, 자꾸 내용을 바꾸다 보니까 자신감이 점점 떨어져요.”

 “왜 그런 줄 알아? 그건 애초에 니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야.”

 헉! 그걸 어떻게?

 봉감독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니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 그걸로 배우를 설득해야 돼. 설득이 안 되면 버려. 아무리 유명한 배우나, 돈 많은 투자자라고 해도 설득 안 되면 못하는 거야. 영화는 원래 같은 꿈을 꾸는 사람끼리 모여서 만드는 거니까.”

 맞다. 영화는 끊임없는 설득의 연속이다.

 배우를 설득하고, 투자사를 설득하고, 스텝들을 설득하고, 결국엔 나 자신까지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애초에 남의 작품을 훔쳐오려고 했으니, 그 누굴 설득할 수 있겠는가?

 “감독님, 감사합니다. 진짜 내 이야기를 꺼내보도록 할게요.”

 

 난 집으로 돌아와 먼지가 두툼하게 쌓인 앨범들을 꺼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사진부터 하나하나 훑어보며 지나간 옛 사랑들을 떠올려보았다.

 ‘내 첫사랑 지숙이.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다가 한방에 까였고. 고2때, 단체미팅에서 만난... 그 애 이름이 뭐였더라? 대학생 신입생 때 만난 연주하고는 한 이틀쯤 사귀었나? 아니다, 바로 차였구나.’

 아! 지나고 생각해보니 온통 짝사랑만 했다. 어쩌다 용기내서 고백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넌 좋은 친구야. 난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나 유학가기로 했어. 국제통화료 많이 드니까 연락하지 마.”

 “너 땜에 나 결혼할려구.”

 난 허탈한 심정으로 앨범을 덮었다. 연애불구로 태어난 내가 무슨 멜로 영화를 만든단 말인가? 그건 과욕이고 망상이다.

 “이제 어떡하지?”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30 전시연이 내 방에 찾아왔다 9/23 268 0
29 난 무식한 신이다! 9/23 274 0
28 스타 탄생! 9/23 253 0
27 지상최대오디션(3) 9/23 259 0
26 지상최대오디션(2) 9/23 266 0
25 지상최대오디션(1) 9/23 251 0
24 그놈 찾기 프로젝트 9/9 288 0
23 지옥 혈전 9/8 264 0
22 괴수 vs 헐크 9/7 259 0
21 법과 원칙의 악마 9/3 262 0
20 야구장 그녀 (2) 9/2 278 0
19 야구장 그녀 (1) 9/2 266 0
18 멜로를 부탁해 (2) 9/2 268 0
17 멜로를 부탁해 (1) 9/2 267 1
16 폭소만발 시상식 9/2 268 0
15 괴수가 춤 춘다! 9/2 287 0
14 얼음귀신을 보았다 9/2 272 0
13 지옥의 오디션 9/2 263 1
12 비밀 병기 9/2 271 1
11 괴수의 위기 9/2 257 1
10 악마와의 계약 9/2 259 1
9 강동원을 만나다 9/2 270 1
8 광란의 파티 9/2 272 1
7 두 개의 지옥 9/2 257 1
6 의리의 승부사 9/2 263 1
5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9/2 277 2
4 관계자 외 출입금지 9/2 277 1
3 괴수의 탄생 9/2 278 1
2 악마의 눈동자 9/2 266 1
1 실패한 인생은 지옥간다 9/2 48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