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지옥에서 온 영화감독
작가 : 신해강정조준
작품등록일 : 2020.9.2
  첫회보기
 
야구장 그녀 (1)
작성일 : 20-09-02     조회 : 266     추천 : 0     분량 : 4824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 TV를 켰다. TV 속에서는 프로야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야구 본지 백년은 된 것 같네...”

 멍한 눈으로 화면 너머 어딘가를 보며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시간을 더 달라고 할까? 아냐, 그냥 못한다고 말할까? 그럼 오유미 대표가 실망할 텐데... 전시연은 앞으로 절대 나랑 영화 안한다고 할 텐데... 그럼 영화판에 소문 다 날 텐데...’

 온갖 걱정과 잡념이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으아! 모르겠다!”

 TV를 끄려고 리모콘을 들었다.

 그 때, 화면 속의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긴 생머리에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야구장 외야 관중석에 혼자 앉아있다. 캐스터의 멘트가 이어졌다.

 “아! 혼자 오셨나보네요. 저런 미인도 야구를 혼자 보러 오는군요.”

 “그만큼 한국 야구가 인기 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썰렁한 외야석에 홀로 앉아있는 여인의 표정이 왠지 쓸쓸해보였다. 그리고,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수연 선배’

 대학교 2학년 때, 교양과목에서 만난 미대 3학년 퀸카. 조용한 성격에 수줍음이 많은 수연선배는 유독 야구를 좋아했다. 난 선배를 따라 주말마다 야구를 보러갔는데, 그건 비단 야구가 좋아서만은 아니다. 난 그녀를 짝사랑했다.

 ‘만약 수연선배가 저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거면 어쩌지?’

 생각이 이에 미치자, 머릿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야구장에서 만난 첫사랑 이야기.’

 앗! 드디어 내 이야기를 발견했다.

 재빨리 일어나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구장 그녀>

 ‘야구장에서 만나고, 야구장에서 헤어지고, 결국 야구장에서 다시 만난 두 남녀의 끈질긴 운명. 기습번트, 도루, 치고 달리기 등 온갖 작전이 난무하는 썸의 전쟁. 9회말 투아웃보다 긴장되고, 연장 12회 역전패보다 가슴 시린...’

 어라! 그러고 보니 시나리오를 주기로 약속한 날이 내일이네?

 벌써 이틀의 시간이 지나버리고 말았다.

 재빨리 휴대폰을 열어서 전시연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틀만 미루자고 하자. 아냐, 제대로 완성하려면 한 달은 필요해. 그럼 많이 실망할 텐데... 으아!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응? 맞네, 시간을 멈추면 되는 거였네.

 “크큭!”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휴대폰을 툭 던져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카이저의 카메라가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난 익숙한 동작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찰칵!

 플레쉬가 터지며 방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데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벽시계가 째깍째깍 움직이고 덜덜거리는 선풍기도 계속 돌아갔다. 게다가 카이저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거야? 야! 카이저, 어딨어?”

 “가고 있다. 쫌...”

 카이저가 카메라 렌즈 안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빨랑 말해. 나 팬 사인회 하러 가야 돼.”

 카이저는 괴수 모양의 힙합 모자를 고쳐 쓰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꼴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어리둥절 쳐다보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영화 <괴수>의 흥행으로 인해 지옥에서 ‘카이저’의 인기가 올라갔습니다.]

 [‘카이저’의 악마서열이 상승했습니다. 128위 → 97위]

 [서열 72위 안에 진입하면 ‘마왕’에 대한 도전 자격이 주어집니다.]

 ‘허얼... 내 덕에 서열이 올라갔단 말이지? 그럼 더 열심히 해야 될 거 아냐?’

 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가리켰다.

 “어떻게 된거야? 이거 눌러도 시간이 안 멈추잖아?”

 카이저가 카메라를 슬쩍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니가 저번에 조리개 잘못 만져서 그런 거잖아! 여기 봐.”

 녀석이 카메라를 내 앞에 들이대며 조리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조리개를 한 바퀴 돌리면 하루 동안 시간이 멈춰. 두 바퀴 돌리면 이틀, 그럼 세 바퀴 돌리면 뭐겠어?”

 “사흘?”

 “카메라 고장 나지. 이 멍충아!”

 “......”

 카이저가 조리개의 눈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눈금에 맞춰 시간을 조절하면 돼. 하지만, 멈추는 건 최대 이틀 동안이야. 앞으론 이런 걸로 나 부르지 마라.”

 “오케이, 고마워.”

 녀석이 카메라 렌즈 속으로 기어들어가다 힐끗 뒤돌아보았다.

 “다음 영화는 장르가 뭐야?”

 “멜로.”

 “멜로?”

 순간,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키스 씬도 있냐?”

 “당근이지.”

 “와우!”

 카이저가 갑자기 내 앞에 엎드려 넙죽 절을 했다.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언제든 불러만 주십쇼.”

 “그래, 나 시나리오 써야 되니까. 가서 일봐.”

 “넵! 충성!”

 녀석은 깍듯하게 경례를 붙이고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 속으로 사라졌다.

 ‘흥! 지가 주인공인줄 아나보지? 소품으로도 안 쓴다. 이놈아.“

 타다다닥! 타닥!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춤을 춘다.

 대학시절을 상상하자, 그때의 풋풋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난 어느새 영화 속 주인공이 되었고, 내 옆에는 ‘전시연’을 닮은 한 여인이 애틋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

 

 시나리오를 보낸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다.

 ‘시나리오가 맘에 안 들었나? 하긴, 자신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고 아예 딴 이야기를 해버렸으니...’

 아무래도 까인 것 같다.

 순간, 실연의 아픔이 묵직하게 가슴을 눌러왔다.

 화가 나고, 그녀가 원망스러워졌다.

 “쳇! 배우가 너밖에 없냐? 아님 마는 거지, 뭐!”

 천장에 대고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쾅! 쾅! 쾅!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난 대충 눈물을 닦고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문 앞에 우뚝 서 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헉! 또 지옥에서 온 건가?’

 덩치가 큰 사내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조요한 감독님 되시죠?”

 “네...”

 “같이 가시죠.”

 사내가 우악스럽게 내 팔을 잡아끌었다.

 “으악! 안 돼!”

 난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일단 방으로 가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한다.

 카이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때, 옆에 서있던 남자가 바짝 다가서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분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분... 누구요?”

 “전시연이요.”

 아...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시연씨가 날 버리지 않았구나.’

 전시연에 대한 고마움과 설렘이 동시에 북받쳐 올라왔다.

 남자들이 날 호위하듯 앞뒤로 막아섰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그러시죠.”

 난 기쁜 마음으로 사내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집 앞에 세워져있는 검정색 SUV 차량에 몸을 실었다.

 

 ***

 

 차량이 외곽도로를 빠져 외딴 숲길로 들어섰다.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숲속을 한참 가다보니,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다.

 청동조각상이 세워진 분수대, 울창한 나무와 예쁜 꽃들,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수영장까지... 와우! 헐리웃 영화에서나 봤던 그런 풍경이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기숙사 사감선생님같이 생긴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내게 허리를 굽혔다.

 “들어가실까요?”

 “네.”

 난 사감 선생님을 따라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백색의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앉으시죠.”

 “네.”

 응접실 창가에 놓인 흔들의자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우우웅-

 의자에 설치된 전동마사지가 가볍게 등을 어루만지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전면에 걸린 전시연의 대형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난 사진 속 여인의 청순한 매력에 이내 빠져들었다. 잠시 후, 사감 선생님이 손뼉을 치며 2층을 향해 나지막하게 외쳤다.

 “시연, 내려와.”

 대리석 계단 위로 날씬한 다리가 보였다.

 반바지를 입은 전시연이 사뿐사뿐 뛰어와 내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감독님, 배고프시죠?”

 “아뇨, 저녁을 늦게 먹어서...”

 순간, 전시연이 나를 째려보며 턱으로 사감 선생님을 가리켰다.

 무슨 뜻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런! 야식 먹을 시간이네요. 하하하...”

 그러자, 사감선생님이 전시연을 엄한 눈으로 노려봤다.

 “안 돼. 곧 작품 들어갈 건데, 체중관리 해야지.”

 “감독님이 드시고 싶대잖아요. 티라미슈 치즈 케익이랑 마카롱 두 세트... 감독님, 또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

 전시연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게 손가락으로 사인을 보냈다.

 “아이스크림이요. 패밀리 사이즈로.”

 전시연은 뻔뻔한 얼굴로 사감선생님을 쳐다보며 말했다.

 “들으셨죠? 감독님이 드실 거니까, 얼른 부탁드려요.”

 사감선생님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주방으로 떠났다. 전시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감독님, 그나저나 깜짝 놀랐어요. 시나리오 완전히 새로 쓰셨더라구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저번에 제 얘기가 별로였나 봐요?”

 전시연이 어느새 굳은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난 재빨리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시연씨 의견은 좋았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다보니까...”

 “그래서 또 사흘 만에 시나리오를 쓰셨다?”

 “네... 어떠셨는지?”

 무표정하던 전시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갔다.

 “완벽해요. 대사, 지문, 감정표현... 어떻게 이런 걸 사흘 만에 쓸 수 있지? 감독님은 진짜 천재예요, 천재.”

 하...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잠 한숨 못자고 일한 보람이 느껴졌다.

 그때, 전시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날 쳐다봤다.

 “그런데, 한 가지가 걸려요.”

 “어떤...?”

 “다른 게 아니라, 야구는 아닌 것 같아요.”

 전시연이 테이블 밑에서 시나리오를 꺼냈다. 이번엔 제목부터 빨간 펜으로 죽죽 그어져있었다.

 ‘영화 제목부터 바꿔? 이건 너무 하잖아!’

 순간 화가 치솟았다. 그런 내 맘을 모르는지, 전시연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구 말고, 오페라를 배경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난 스포츠보다는 음악 쪽이 더 멋있을 것 같은데.”

 아... 또 시작이다. 여기서 끌려가면 이 영화는 완전히 망가지는 거다.

 난 전시연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시연씨, 의견을 주는 건 감사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영화입니다. 영화의 중심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하지만 야구는...”

 그때, 사감선생님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시연, 그만!”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30 전시연이 내 방에 찾아왔다 9/23 268 0
29 난 무식한 신이다! 9/23 274 0
28 스타 탄생! 9/23 254 0
27 지상최대오디션(3) 9/23 259 0
26 지상최대오디션(2) 9/23 266 0
25 지상최대오디션(1) 9/23 251 0
24 그놈 찾기 프로젝트 9/9 288 0
23 지옥 혈전 9/8 264 0
22 괴수 vs 헐크 9/7 259 0
21 법과 원칙의 악마 9/3 262 0
20 야구장 그녀 (2) 9/2 278 0
19 야구장 그녀 (1) 9/2 267 0
18 멜로를 부탁해 (2) 9/2 268 0
17 멜로를 부탁해 (1) 9/2 267 1
16 폭소만발 시상식 9/2 268 0
15 괴수가 춤 춘다! 9/2 287 0
14 얼음귀신을 보았다 9/2 272 0
13 지옥의 오디션 9/2 263 1
12 비밀 병기 9/2 271 1
11 괴수의 위기 9/2 258 1
10 악마와의 계약 9/2 259 1
9 강동원을 만나다 9/2 270 1
8 광란의 파티 9/2 272 1
7 두 개의 지옥 9/2 257 1
6 의리의 승부사 9/2 263 1
5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9/2 277 2
4 관계자 외 출입금지 9/2 277 1
3 괴수의 탄생 9/2 278 1
2 악마의 눈동자 9/2 266 1
1 실패한 인생은 지옥간다 9/2 48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