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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잎에 능금
작가 : 목탄
작품등록일 : 20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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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봄볕에 마르는 저고리
작성일 : 20-09-05     조회 : 369     추천 : 1     분량 : 6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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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투성이 능금이 비현각에 마당에 던져진다. 소란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능금을 끌어안는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하루아침에 어찌 이런 꼴이 되었어!”

 능금이 가까스로 고개를 든다.

 “궁녀와 내통을 하였으니 죽어도 싸다.”

 “지금 농이 나와?”

 소란이 능금을 부축하고는 서고에 들어선다.

 “소란아, 물을 좀 다오.”

 “금세 떠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능금을 서고에 기대어놓고 소란이 바람처럼 달려간다. 소란이 사라지자 등에 꽂힌 부채를 꺼내 펴든다. 그렁거리는 눈으로 홍옥이 나타나 능금을 끌어안는다.

 “네가 풀려 좋구나.”

 “이리 빨리 풀어준 게 수상해.”

 “다른 건 생각지 말아라. 네 몸이나 추슬러.”

 능금이 고개를 주억인다. 이 작은 머리로 생각을 한들, 저들의 뜻을 알 수 있을까. 발소리를 들은 홍옥이 부채로 숨어들고, 능금이 소란이 떠온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 애기만 불쌍하게 되었어.”

 “그래.”

 소란이 갈아입을 옷을 두고 씻을 물을 받아온다. 몰골이 말이 아닌데다, 지친 기색이니 혼자 두어야겠다.

 “얼릉 쉬어라. 내일 일찍 올 테니.”

 “고마워. 소란.”

 “살아 돌아와서, 고맙구먼,”

 소란이 눈물을 훔치며 서고를 나선다.

 꾸벅꾸벅 조는 능금을 홍옥이 잡아끈다. 홍옥의 팔베개를 한 채 능금이 꿈결로 흘러간다.

 “네가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는 것이냐. 네 목숨을 앗아갈 뻔한 그 여자의 아이를 걱정하는 것이냐. 어찌 이리 선하고 착하단 말인가. 그리하여 저 굶는 것도 모르고 나를 주워 이리 키운 것이냐. 그리하여 결국 너를 이리 사랑하게 만든 것이냐. 홍옥이 능금의 붉은 입술을 훔친다. 그 선함에 반해 용궁도 잊고, 오랜 세월 이 곳에 머물렀구나. 이제는 함께 가자. 이 궁을 떠나 나의 세상으로.

 

 옥좌에 앉은 임금의 표정이 어둡다. 대소신료가 고개를 숙인 채 임금의 명을 기다린다.

 “모든 게 짐의 부덕함이다. 그로 인해 이리 가문 것이 아니겠느냐,”

 “전하, 기우제를 드리심이 어떠신지요.”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 땐 어찌 할 것이냐. 백성들의 원망이 더 커질 것이 아니냐.”

 “그렇긴 하오나, 당장은 그 원망을 잠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 깊은 원망을 잠재울 수 있으리.”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말해 보거라.”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는, 용이 없어 그런다 합니다.”

 “용이라?”

 “본디 큰 강마다 용이 산다하였습니다. 큰 강을 끼고 흐르는 물길들은 모두 용의 길이라 하여 길목마다 사당을 짓고 제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헌데, 그 길을 막고, 숨통을 끊었으니 용이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어정 얘기인가.”

 “송구합니다.”

 “그 일로 자주 가무는 것은 알고 있네.”

 “어정은, 폐하께 올리는 물이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용궁으로 통하는 길이라 하여 성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성수청에서 제를 올려 가물지 않길 기원하였지.”

 “그러니 저하께서 기우제를 올리시면 어떨까 합니다.”

 “동궁이?”

 “비만 내린다면, 저하로 인해 죽었던 용이 살아나고, 민심 또한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네.”

 결자해지라 하였으니, 동궁이 이 매듭을 풀어야겠구나. 임금이 어정 쪽으로 눈을 둔다. 때가 이른 것인가.

 

 어린 능금이 개울에 앉아 빨래를 한다. 방망이로 야무지게 두드리는 것이 제법이다. 미루나무가지에서 꽃가루가 흩날린다. 코끝이 간지러운 능금이 연거푸 재채기를 한다. 그 모습을 선비 둘이 너럭바위 위에서 굽어본다.

 “어린 것이 손끝이 맵군.”

 “곧잘 글도 쓴답니다.”

 “청룡이 벗 삼을 만하군.”

 “청룡의 벗이 궁금하여 오시었습니까.”

 “겸사겸사. 자라부인도 볼 겸.”

 바위 위에 넌 저고리가 희게 말라간다. 노곤해진 능금이 볕이 드는 바위에 누워 한 숨 자려는데,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연분홍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몸종과 함께 개울을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빨래나 안 밟았으면 좋겠네.”

 손가락에 물을 묻혀 바위에 글을 쓴다.

 ‘버들강아지를 들고 뛰는 아이야, 봄이 아무리 좋은 들, 깨끗한 저고리만 하겠느냐.’

 굽어보던 신선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봄볕에 마르는 저고리라. 풍취가 있습니다.”

 “저 둘이 만나는 것 또한 풍취이네.”

 천방지축으로 뛰던 소녀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작대기를 주워 꾹꾹 찌른다.

 “연화아씨, 그만 두세요. 불쌍한 짐승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이리 징그럽고, 못 생겼는데.”

 자라가 꼬리를 흔들며 도망쳐 보지만 소용없다. 결국 자라를 자빠뜨리고는 연화가 깔깔 웃는다.

 “아씨 그러면 벌 받습니다.”

 “벌은 무슨 벌, 이깟게 뭐라고,”

 연화가 작대기를 들어 자라의 뱃가죽을 마구 때린다. 손에 물을 찍어 잠잠히 시를 쓰던 능금이 물가 나뭇가지를 툭 꺾는다. 자라를 괴롭히는 소녀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능금, 소녀가 작대기를 놓고는 길길이 날뛴다.

 “왜 때려!”

 “징그럽고 못생겨서 때린다.”

 “뭐야!”

 “넌 저 자라 보다도 못생겼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까불어! 우리 아버지한테 다 일러 줄 테다.”

 “그래? 그럼 난 용왕님께 이르고, 산신령에게 이를 거다. 네가 자라를 때리고 괴롭혔다고.”

 “이 천한 것이 어디서!”

 “천한 것은 너야. 너처럼 마음이 나쁜 게 천한 거야!”

 능금이 다시금 가지를 들자 소녀가 움츠러든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좌의정대감의 여식을 때리시면 됩니까요?”

 몸종이 아씨를 등 뒤에 숨기고는 능금을 만류한다.

 “작은 개울이라 한들, 신령이 깃들어 있지 않겠어요. 신령을 노하게 하는 게 더 무서운 일입니다. 백년을 묵었을지, 오백년을 묵었을지 모르는 자라를 저리 뒤집어 놓다니요. 그러다 천벌을 받습니다.”

 속속들이 맞는 말이라 몸종도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다.

 “아씨, 그만 가는 게 좋겠습니다.”

 “자라, 자라를 가지고 갈 거야.”

 “자라는 가져가서 무얼 하시려구요.”

 “구워서 개를 줄 테다.”

 개라는 말에 능금의 눈에서 불똥이 튄다. 더는 참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드는 능금, 소녀가 비명을 질러대거나 말거나 사정없이 후려친다. 곁에 있던 몸종도 고스라니 매를 맞는다.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몸종도 뒤를 따른다. 소녀가 사라지자 능금이 뒤집힌 채 바둥대는 자라를 바로 놓아준다.

 “어쩜 저리 못됐는지. 많이 안 다쳤니? 좀 더 빨리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너럭바위 위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용왕이 그제야 웃는다.

 “자라부인이 은인을 만났군.”

 “제삿날이 될 뻔했습니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겠군. 또 언제 볼 수 있으려나.”

 “용궁에서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인간세상에서 보는 게 더 운치 있다네.”

 “폐하도 참,”

 “작은 개울이라도 신령이 있다? 참으로 영특한 아이가 아닌가.”

 “그러합니다.”

 “용들의 사랑을 받을 만하군.”

 “청룡 말고 흑룡까지도 말입니까?”

 “천명이야 그렇다 한들. 어찌 저런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 하다면, 저 소녀는 어찌 되는 겁니까?”

 신선이 다리 위로 달아나는 연화를 가리키며 묻는다.

 “글쎄, 자라부인이 어떤 벌을 내릴지 궁금하군.”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진상하였는데 세자빈이 수저를 뜨는 둥 마는 둥 앉아있다.

 “마마 용봉탕이옵니다. 귀한 약재를 넣고 끓였으니 좀 드시지요.”

 “아비와 아우가 곧 귀양을 간다는 구나.”

 “마마라도 몸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셔야 훗날 두 분을 불러올리실 게 아닙니까.”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원자아기씨만 생산하신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옵니다.”

 상궁의 말에 힘을 얻은 세자빈이 용봉탕을 뜬다. 그 옛날 개울가에서 까불이며 놀았던 자라를 닮았구나. 나를 때렸던 그 계집은 어찌 되었을까. 참으로 맹랑한 아이였더랬다. 감히 좌의정의 여식을 때릴 생각을 하다니.

 “아비가 간다는 곳이 온양이라 하였느냐?”

 “예.”

 세자의 장인이라고 온천으로 보낸 것이로구나. 간혹 들러 살펴드려야겠다.

 “능금이라 하였던가. 그 아이는 어찌 되었느냐?”

 “그것이,”

 “어찌 말을 못하고 머뭇대는 것이냐.”

 “마마, 저하께서 그 아이에게 후궁첩지를 내리신다 하십니다.”

 “후궁첩지라니! 사내에게 어찌 첩지를 내린단 말이냐.”

 중전이 수저를 내려놓는다. 나를 감쪽같이 속이셨구나! 그 아이를 은애하여 남장을 하여 궁에 들이신 것이다. 나에게서 그 애를 숨기고자 그러신 게다.

 “지금 그 애는 어디 있느냐?”

 “아직 비현각에 있다 들었습니다.”

 “채비를 하여라. 내 직접 만날 터이니.”

 까무룩 졸고 있는 능금을 소란이 흔들어 깨운다.

 “밖에 누가 왔다. 어서 나가보거라.”

 “누구?”

 “지체 높으신 분들은 내가 어찌 알까? 어서 나가봐라.”

 능금이 부스스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을 나선다.

 “능금은 저하의 첩지를 받으시오.”

 “첩지요?”

 “어서 예를 갖추시오.”

 첩지라니, 그렇다면 후궁이 되는 것이 아닌가. 곁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소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능금이 무릎을 꿇고 첩지를 받는다. 어안이 벙벙한 것인지. 신하들이 사라진 후에도 일어설 기미가 없다. 소란이 달려가 일으켜 세운다.

 “너 여자였어?, 아니, 아니, 여자셨습니까?”

 “미처 말하지 못했다.”

 “공연히 옥에서 풀어준 것이 아니었군요. 승은을 입어 풀어주었던 거에요.”

 “승은?”

 “제게도 비밀도 하시다니 서운합니다.”

 “그런 거 아닌데,”

 무슨 말을 한들, 네가 믿을까. 나조차도 이리 혼란스러운 것을.

 “몸을 정갈히 하시고,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무섭다.”

 “마마님, 그런 말씀 마세요. 후궁이 되는 게 모든 궁녀들의 소원인걸요.”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다. 필요 없다.”

 소란이 능금을 끌어안는다. 이 선한 사람이 그 곳에서 어찌 버텨낼지 걱정이구나. 힘닿는 데까지 내가 도와야겠다. 소란이 능금을 달래는데, 세자빈이 스란치마를 나부끼며 다가온다.

 “다 너 때문이다. 아비의 관직이 박탈된 것도, 아우가 귀양을 가는 것도. 다 너 때문이란 말이다.”

 세자빈이 손을 뻗어 능금의 턱을 치켜든다.

 “남장을 하고 모두를 우롱한 것이냐.”

 후궁첩지를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세자빈의 텃새가 시작된 것이냐. 능금이 서늘한 눈을 들어 세자빈을 바라본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보구나. 그리 입을 다문 걸 보면,”

 세자빈이 손을 들어 능금의 뺨을 때린다. 얼굴이 돌아갈 만큼 세게 맞았건만, 신음소리조차 없다. 약이 바짝 오른 세자빈이 다시 손을 치켜든다.

 “벌써부터 투기를 하는 것이오?”

 “저하,”

 걱정이 되어 들렀더니 그새 일이 벌어졌구나. 내 이런 것이 싫어 너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으려 했거늘, 다 내 잘못이다.

 “저 아이가 제 말을 무시하여.”

 “그대는 죄인의 딸이 아니오. 자중하고 있어야 할 때에 다시 물의를 일으켜서야 되겠소.”

 “송구합니다.”

 “물러가시오.”

 세자빈이 뒷걸음으로 물러선다. 어찌 저하와 나는 이리 엇갈린단 말인가. 내가 무슨 잘못을 하여서 저하에게 이미 미움을 산단 말인가. 저하를 은애한 죄, 그 죄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비와 동생이 귀양을 가는 데도 오직 내 마음에는 저하뿐이구나. 저 분께 웃음 한 자락 얻을 수 있다면, 금은보화를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으리.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화홍이 부어오른 능금의 볼을 보듬는다. 생각할수록 분하구나. 감히 때리다니, 이토록 아픈 아이를 감히 손을 대다니.

 “너무 쉽게 풀려났다 생각했습니다.”

 “미안하구나.”

 “이제 비현각 서책을 다 읽은들 소용이 없겠군요.”

 “능금아,”

 화홍이 능금을 끌어안는다.

 “나를 위해 이곳에 머물러 줄 수는 없겠느냐?”

 “제겐,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홍이 능금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네 가마를 막아서던 그 사내를 말하는 것이냐. 잊어라. 이제 너는 내 사람이니.”

 “그 마음만은…”

 입을 뻐끔대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능금이 화홍의 품으로 쓰러진다.

 “어의를 불러라!”

 이리 몸이 축났구나. 화홍이 능금을 안은 채 걷는다. 내 너를 지키리. 세자빈으로부터 중전으로부터 너를 지키리.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거라. 너는 지켜야 할 내 것이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어?”

 “뭘?”

 “능금이 여자라는 사실을.”

 말에 박차를 가하며 부사가 투덜댄다. 사슴이나 잡을까 했더니 토끼 두 마리가 전부로구나. 사냥실력이 준 것인가. 아니면 화홍이 보이는 족족 다 쏴 버리는 바람에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인가. 군사들이 끙끙대며 멧돼지를 끌고 오는 꼴을 보니 부아가 치민다. 이놈이랑 사냥을 오는 내가 미친놈이지.

 “그걸 말해야 아나?”

 “그럼, 어찌 알아.”

 “그리 고운 얼굴에, 가는 목선, 나긋한 허리가, 어찌 사내의 것인가.”

 “아직 어린 소년인줄만 알았지.”

 “소년이라 해도 그리 고울 수는 없지.”

 “내 눈이 썩었다.”

 “암,”

 “후궁첩지를 내린 것도 소문으로 들었네. 우리 사이가 좀 멀어야지.”

 “멀지. 세자와 별감인데.”

 “생각해보니, 그 고사리 같은 손에, 앙증맞은 발이 사내의 것은 아니었구먼. 발그레 물든 뺨이며, 그 앵두 같은 입술까지, 햐,”

 “그 입 닥치는 게 좋을 걸.”

 세자를 놀려대던 부사가 피식 웃는다. 벌써 끼고 도는 것이냐. 내 마음도 설렐 만큼 곱긴 하였다.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아이다. 사내가 아닌 줄 알았다면, 벌써 훔쳐 달아났을지도 모르겠다.

 “세자빈이 경계하겠네.”

 “세자빈 얘기는 꺼내지도 마.”

 “왜 본처에게 미안하냐?”

 “화살이 남았는데, 네 심장에 박아줄까?”

 “워워, 고정하시옵소서. 저하.”

 

녹수 20-09-08 11:16
 
갈등이 더 깊어지겠네요.
다른 일들이야 그렇다 쳐도 홍옥과 화홍 그리고 능금의 마음이 염려됩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수는 없겠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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