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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한국인 레지스탕스
작가 : 아라누리
작품등록일 : 20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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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프라하에서 눈을 뜨다.
작성일 : 21-05-04     조회 : 501     추천 : 0     분량 : 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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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3월, 프라하의 밤.

 

 나치 장교들을 위한 클럽 무대 위, 20대 중반 가량의 동양 여인 하나가 서 있다.

 몸에는 곡선을 드러내는 빨간 드레스, 발에는 아찔한 검정색 힐을 신고, 어깨엔 가짜모피 숄을 걸친 채.

 

 그 여인은 터질 듯 둥, 둥, 울리는 심장고동을 제어하기 위해 긴 호흡을 내뱉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여인은.......

 

 바로 나였다.

 

 휘익 – 하는 휘파람 소리. 눈을 드니 뿌연 담배 연기 속, 둥근 탁자에 삼삼오오 앉은 나치 장교들이 보인다. 그들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웅성대는 독일어.

 

 몇 개의 단어가 들린다. [프라하 시내에 동양 여인?], [못 보던 얼굴인데?] [일본인? 중국인?] 독일어인데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 희한한 상황.

 

 웹툰이나 웹소설에 나오는 빙의, 회귀, 타임리프, 평행세계 이야기를 볼 때 마다,

 비현실적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었다.

 내가 그 벌을 받고 있나 보다.

 

 

 *************

 

 

 나는 모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는 40대 미혼여성 송인하.

 자취방에서 수면제 20알을 한꺼번에 털어 넣고 죽으려 했었지.

 

 중요하게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해서 5성급 호텔 커피숍에 교장이 날 불렀다.

 할 얘기라는 것도, 심각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교장은 내게 학교 운영 전반에 관한 향후 계획을 간단히 설명한 다음,

 교사로 일하면서 느꼈던 고충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렇게 차 한 잔 마시고 헤어진 게 전부였다.

 

 겨우 이런 얘기를 하려고, 길거리의 수많은 카페를 놔두고 호텔 커피숍으로 불러내다니 뭔가 쎄 – 했다. 그 느낌을 믿었어야 했다.

 

 둘이 같이 커피 마시고 있는 사진이 찍혀서, 일하고 있는 교장과 불륜설이 돌았다.

 인터넷과 SNS에 ‘~카더라’는 소문으로 번져서 일이 매우 복잡해졌다.

 

 아는 변호사를 만나 상담을 했고, 법적 절차를 밟아 고소 조치에 들어갔으나, 상황은 내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믿고 있던 CCTV는 그 날 분만 지워졌다. 마치 조작이라도 한 것처럼.

 

 나는 원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다.

 이번 일도, 조금만 더 참고 견디고 싸우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이제는 다 놓고만 싶어 졌다.

 못된 인간이라는 ‘산’을 매번 넘는 인생이 지겨워 졌다.

 .

 .

 .

 다음 생이 있다면 이렇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약을 삼키고 쓰러진 것 까진 기억이 난다.

 딱히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평소 먹는 양보다 많이 삼킨 이유는,

 운 좋으면 다음 날 눈을 뜨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운 나쁘면 잠 한 번 깊게 자고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쓰러질 때 방바닥에 책 하나가 나뒹굴었는데, 전날 밤까지 탐독했던 [새벽의 7인]이라는 실화 소설이었다.

 

 ‘프라하를 그렇게 가고 싶었는데.... 성 시릴과 메토디우스 성당도... 얀 쿠비쉬, 요젭 가브칙, 그들이 마지막까지 싸웠던...’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 마지막으로 올린 기도는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 다음 생이 있다면...불꽃처럼 살아보고 싶어요.’

 .

 .

 .

 

 “이 봐, 빨리 일어나!!”

 

 툭, 툭, 내 몸을 건드리는 금발 머리의 아주머니가 내 눈에 들어왔다. 요란한 화장을 한 그녀는 가슴골이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눈을 뜬 나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기차게 노래 잘하는 가수가 온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더니 웬 듣보잡 동양 여자야? 게다가 무대 뒤에서 팔자 좋게 잠이나 청하고 있다니...”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거울부터 보았다.

 대체 내 몰골이 어떻기에 가수니, 무대니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잔주름과 새치머리가 있던 40대의 고등학교 선생님 대신, 거울 속엔 27살 꽃다운 시절의 젊은 송인하가 서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빨간 드레스와 아찔한 높이의 검정색 힐은 평소의 나라면 절대 입거나 신지 않을 패션이었다.

 

 힘없이 툭툭 끊어져 기르기 힘들었던 내 모발은, 건강하고 탄력 있게 등까지 치렁치렁 내려왔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내 물음에 어이없다는 듯, 금발머리의 풍채 좋은 그녀는 나를 매서운 눈길로 훑었다.

 

 “하긴, 날 처음 보겠군. 프라하에서 가장 잘 나가는 클럽 로즈의 총지배인 밀레나 라고 해. 넌 이름이 뭐지?”

 

 “이나....이나 라고 합니다.”

 

 프라하? 지금 프라하라고 했나?

 

 내 이름을 말할 때는 ‘인하’ 라는 발음보다는 영어식 발음이 나을 것 같았다. 일부러 한국식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세계사 선생님으로서의 촉이 발동한 것이다.

 국적을 함부로 말했다간 위험할 거란 생각.

 

 “독일 장교들이 지루해 죽으려고 하는데 빨리 한 곡조 뽑아야지?”

 

 독일 장교가 이곳에 있다면, 프라하가 이미 점령당한 시점이었다.

 1942년.... 그 때쯤일 것이다.

 밀레나가 내 어깨에 숄 하나를 걸치며 등을 밀자 나는 다급히 말했다.

 

 “저는 체코어도 모르고, 독일어도 모릅니다.”

 

 빤히 나를 바라보는 밀레나. 뭐 이런 반푼이가 다 있나 하는 눈빛이다.

 

 “지금 이나, 당신이 말하고 있는 언어는 뭐지?”

 

 “....................”

 

 “체코인인 나와 자유자재로 말하고 있잖아. 나랑 장난해?”

 

 내가 한국어로 말할 때, 상대방은 체코어로 들리나 보다.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도 아프기만 했고, 서울 자취방으로 배경이 바뀌지도 않았다.

 

 밀레나는 더 못 참겠다는 듯, 내 등을 확 떠밀어 버렸다. 얼마나 세게 밀었는지 백스테이지 커튼 뒤에서 순식간에 무대 중앙으로 몸이 쏠렸다.

 .

 .

 .

 나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독일 장교들은 하나 같이 2대 8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모양이다.

 칼 주름이 잡힌 군복에 달린 하켄크로이츠(나치 심볼)가 조명을 받아 번쩍 거렸다.

 묘령의 동양 여인이 신기했는지 그들의 입가는 연신 귀에 걸렸다.

 

 시거를 피우는 그들 때문에 홀 안은 담배 연기로 매캐했다.

 담배 연기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로선 견디기 어려웠으나,

 그 자리에서 손을 휙 휙 내저었다간 바로 총살당할 것이 뻔하다. 참는 수밖에.

 

 무엇을 부를까...

 내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독일 장교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학창시절에 배운 제 2외국어가 불어가 아닌 독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프랑스에 떨어졌다면 알고 있는 샹송이라도 부를 수 있었을 터인데.

 

 내가 한국어를 말할 때 체코어로 들린다면, 한국어로 부르는 게 가장 나았다.

 적어도 그들의 귀에는 점령한 국가의 언어로 들릴 것이기 때문에.

 영어나 불어로 불렀다간 연합국의 언어로 노래한다고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 되겠지.

 

 “소나무여, 소나무여...언제나 푸른 네 잎.

 쓸쓸한 가을날이나, 눈보라 치는 날에도

 소나무여, 소나무여, 언제나 푸른 네 잎.”

 

 겨우 초등학교 음악책에 등장하는 ‘소나무야’ 라니....

 나의 임기응변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학예회 장기자랑 같은 그 노래에 의외로 그들은 [오, 타운넨바움, 오, 타운넨바움] 하며 같이 따라 불렀다.

 

 워낙 노래가 짧아서 민망한 나머지, 나는 고개를 45도 각도로 숙이며 마무리 인사를 했다.

 

 “노래는 그게 다인가?”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장교가 시가를 입에서 빼고 내게 물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독일어 까지 이해되었다.

 

 내가 꾸는 이 꿈은, 아니 두 번째 삶은, 서로가 각자 다른 언어를 해도 통하는 구글 번역기가 몸에 심어져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다.

 

 “더 원하시는 노래가 있습니까?”

 

 “위대한 제 3제국의 노래 중 하나 더 할 수 있겠어, *프로일라인?”

 

 *Fräulein – 독일어로 ‘아가씨’

 

 고등학교 때 독일어로 발음을 통째로 외워서 가곡 하나를 배웠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 8마디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솔직하게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가르쳐 주면 열심히 배우겠다고...

 

 하필이면 2차 대전의 전범들인 나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라니,

 신께선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고 빨리 레지스탕스 활동에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하루 속히 그들을 만나야 했다. 그 7명의 영웅들을....

 내 오랜 꿈은 그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 한 독일장교가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와서 내 손목을 잡고 아래로 이끌었다.

 

 “노래를 못하면, 다른 것이라도 해야지.”

 

 그는 의자에 앉더니 내 손목을 끌어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화들짝 놀라 일어서는 내 허리를 다시 끌어안고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려는 순간,

 

 밀레나가 서둘러 무대로 나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 그런다며 내일은 더 많이 공연하겠다는 말로 무마했다.

 

 다른 여급들을 무대로 서둘러 내보낸 뒤, 그녀는 매니큐어를 곱게 바른 긴 손톱으로 내게 삿대질을 했다.

 

 “남의 장사 망칠 일 있어? 오늘 첫 날이니 봐주는 줄 알아. 내일부턴 국물도 없어.”

 

 밀레나는 내 옷이라면서 긴 코트 하나를 던져 주었고, 손에 가방까지 쥐어준 뒤에 대문을 열고 나를 내보냈다. 여기서 재워주는 게 아닌가 보다.

 

 프라하는 나의 해외여행 버킷리스트 중 0순위였다.

 갈 운이 아닌지, 계획할 적마다 번번이 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 소원을 1942년의 프라하에 타임 리프하는 방식으로 풀게 될 줄이야.

 그것도 젊디젊은 27살의 나로.

 

 빨리 잘 곳을 구해야 했다. 유럽은 은근히 일교차가 심하고 춥다. 우리나라의 겨울은 건조하지만 유럽은 습한 추위라서 바람이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늘 하루만 더 재워달라고 할 걸 그랬나?’

 

 밀레나인지 당길레나인지 하는 그 지배인을 다시 찾아가서 통사정을 할까 했으나, 이미 게임은 끝났다.

 

 옷깃을 여미고 프라하 시내를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디가 여관이고 어디가 식당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내 눈을 잡아끄는 한 소녀.

 

 밝은 금발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리고, 빵모자를 예쁘게 쓴 소녀는 자전거를 끌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인드리슈카!!!”

 

 소녀는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예상이 맞았다.

 

 그 소녀는, [새벽의 7인]을 도운 프라하의 레지스탕스 가족, 마리 부인의 딸 인드리슈카였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향해 달려갔지만, 그녀는 날 보고 도리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인드리슈카! 난 너를 알아! 제발, 난 위험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그 소녀였어도 도망갔을 것이다. 동양인이라곤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체코의 프라하에서, 낯선 동양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상황은 공포였을 것이다.

 

 구글 맵이 있는 시대도 아니고, 컴퓨터와 인터넷도 없는 1942년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역사 속의 아는 인물을 뒤쫓을 수밖에.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미로 같은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골목으로 전력질주하며 들어서는 순간,

 

 탁!

 

 누가 뒷통수를 가격한 것 같은 느낌이 들자마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이렇게 달게 잔 것은 처음이다. 눈을 뜨니 강렬한 불빛과 다섯 명 가량의 그림자가 보였다. 다시 눈을 깜박거리자, 여자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데, 우리 딸 이름을 아는 거지?”

 

 몸을 일으키려는데, 양 팔과 양 다리가 침대에 단단히 묶였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갈색머리의 푸근한 외모를 한 중년 부인이, 잔뜩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노려보았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3명의 남자가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 내가 2021년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외교관이나 선교사를 제외하고, ‘코리아’ 라는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소리를 했다간 이 두 번째 인생마저 오늘로 종지부를 찍을 지도 모른다.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나는 대답했다.

 

 “저도, 나치에 저항해서 싸우는 레지스탕스입니다. 얀 쿠비쉬, 요젭 가브칙...”

 

 그들의 표정에선 핏기가 사라졌다.

 

 내가 말한 인물들은 새벽의 7인 중 가장 중심축이었던 체코인 출신의 영국 장교였다.

 

 아직 달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낙하산을 타고 프라하에 내려 왔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었다.

 

 기리릭, 탁....

 

 군대 한 번 안 다녀온 대한민국 여자라도 느낄 수 있는 이 불길한 소리.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였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야 할 거야.”

 

 한 남자가 내 이마에 총구를 겨눴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작가 아라누리입니다.

 제 소설을 읽으러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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