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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한국인 레지스탕스
작가 : 아라누리
작품등록일 : 20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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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루드비히 폰 뮐러
작성일 : 21-05-08     조회 : 286     추천 : 0     분량 : 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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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장교 하나가 백스테이지에 들어섰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화장품 파우치에 권총을 슬며시 넣었다. 오른손을 감싼 러그 덕분에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다행히 장교는 내겐 관심도 없다는 듯, 밀레나 쪽으로 향했다.

 그녀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장교를 향해 상업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루드비히 폰 뮐러 대위님, 백스테이지 출입은 원래...”

 

 “알아, 하지만 워낙 급한 일이어서. 그 분이 곧 프라하로 오실 거고, 클럽도 들릴 예정이야. 그래서, 이곳에서 몇 명을 차출했으면 하는데.”

 

 “그 분이라 하면...”

 

 “하이드리히 총독을 몰라서 묻는 말인가?”

 

 게슈타포 및 SS보안방첩부의 수장으로서, 보헤미아-모라바(오늘날의 체코)의 총독.

 금발의 사형집행인으로 불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아돌프 히틀러의 오른팔이자, 나치의 실질적인 2인자.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7인을 비롯한 프라하 곳곳의 레지스탕스들은 그를 암살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희미해져가는 지식을 떠올리자면, 1942년 5월 27일이 바로 그 거사일이다.

 하루속히 뭔가를 돕고 싶은 내 입장에선, 클럽에서 가수 노릇이나 하고 있는 시간이 아깝기만 했다.

 

 뮐러 대위라고 불린 자는 나를 슬쩍 보다가, 다시 밀레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저 여자는...”

 

 “믿으셔도 됩니다. 제 심복이니까요.”

 

 최대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 꼬리를 양 귀에 걸고 웃었다.

 치아는 보이지 않도록 애썼고, 반달눈을 만든 뒤, 고개를 까딱 숙였다.

 

 뮐러는 바짝 다가오더니 내 턱을 손으로 잡고 치켜 든 뒤, 좌우로 살펴본다.

 도축해서 먹어도 되는 건강한 소인지 점검하는 것 같은 그의 행동은 동등한 사람끼리의 몸짓이라곤 볼 수 없었다.

 

 마음 속 분노를 잠재우고 최대한 무심하게, 투명한 유리처럼, 그의 푸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동자는 그 사람의 영혼을 거울처럼 비춘다.

 

 영혼이 혼탁한 사람은 눈동자가 썩은 고등어의 눈처럼 생기가 없다.

 반대로 영혼이 맑으면 눈동자는 강한 생명력으로 반짝인다.

 

 뮐러의 푸른 눈이 잠시, 내 갈색 눈에 머물렀다. 10여 초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혐오나 증오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신기한 동물이나 식물을 관찰하는 호기심과 유사했다.

 

 유태인을 학살하고 인종청소를 하는 집단에 소속된 군인의 눈 치곤 꽤 맑은 기운이 있었다.

 

 “밀레나, 이 여자 밤 근무 나간 적 있었나?”

 

 “없었습니다.”

 

 “오늘 내 방으로 보내. 그리고 아까 말한 대로 몇 명 뽑아놓도록.”

 

 

 그 말만 남기고 뮐러는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떴다.

 내 의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나 보다.

 ‘오늘 내 방으로 보내.’라는 그의 말이 귓가에서 메아리처럼 울린다.

 

 무대를 마치고 다른 여급들이 들어 와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바람에, 밀레나와 나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화장을 고치고 의상을 갈아입는 다른 여급들 사이로 밀레나가 내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뮐러 대위가 이렇게 나온 적은 처음이야. 이나, 갔다 올 수 있겠어?”

 

 “안 갈 방법은 없나요?”

 

 “가야 해. 가지 않으면 의심 받아.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말인데, 그를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면 안 돼. 그러면 우리의 작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하니까, 웬만하면 맞춰 줘.”

 

 “.......................”

 

 “섣불리 정보를 캐려고도 하지 마. 넌 아직 어설퍼.”

 

 내가 긴 한숨을 토해내자 그녀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미안하구나.”

 

 “알았어요. 그 대신 밀레나, 가수로 일하는 건 오늘까지예요.”

 

 .

 .

 .

 

 여급 중 하나가 아파서 내가 마지막 무대를 장식해야 했다. 이 무대를 마치고 나면, 나는 ‘뮐러’라는 사람을 따라 나서야 한다.

 

 약소국민이 겪는 슬픔은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매한가지다.

 나치 독일군에 대항한 체코인들과, 일본군에 맞서 싸운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리고 무대 아래에 앉아 있는 저 나치 군인들 중, 진심으로 이 전쟁을 원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불현 듯, 학창 시절에 배웠던 독일 민요 ‘로렐라이 언덕’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팔자에도 없는 나치 장교의 밤 상대를 하게 될 내 처지가 처량 맞아서, 나의 목소리는 내 귀에도 구슬프고 애달프게 들렸다.

 

 내 노래에 맞춘 피아노 반주마저 서글프고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 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

 

 구름 걷힌 하늘아래 고요한 라인 강

 

 저녁 빛이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저편 언덕 바위 위에 어여쁜 그 색시

 

 황금빛이 빛나는 옷 보기에도 황홀해

 

 고운 머리 빗으면서 부르는 그 노래

 

 마음 끄는 이상한 힘 노래에 흐른다.

 

 

 병사들 몇몇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 왔다. 전쟁터에서 단련된 남자들이라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나를 보는 그들의 눈빛이 뭔가 말을 하고 있는 듯 처연했다.

 

 한 장교가 조심스럽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그 박수는 곧 전체 객석으로 번졌다.

 나의 노래가 그들의 고향을 생각나게 만들었는지, 떠들썩하고 유쾌하던 무대 아래의 공기는 차분해졌다.

 .

 .

 .

 무대 의상을 벗고 편안한 원피스를 입은 나는, 밀레나의 손에 이끌려 뒷문으로 향했다. 소위 말하는 2차 업무를 한 적이 없어서 뒷문의 존재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 문 밖으로 나가자, 아까의 뮐러 대위가 나를 보고 약간 반색을 하다가 밀레나를 보고 표정을 관리했다.

 

 관록의 밀레나는 뮐러의 표정을 관찰하더니 괜히 내 허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내 귀에 가까이 대고 속삭이는 밀레나.

 

 ‘겁먹을 필요 없어. 적당히 구워삶아도 되겠어.’

 .

 .

 .

 다른 나라, 다른 시간대에서 제 2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나는 입고 있는 외투를 머리부터 푹 쓰고 가급적 얼굴을 땅바닥으로 향했다.

 

 나치 장교들이 머무는 호텔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젊은 여인 한 둘이 장교나 병사를 따라서 방에 들어갔다.

 

 복도에서 마주친 장교들은 내가 외투를 푹 눌러쓰고 바닥만 보며 지나가는 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픽, 픽, 실소를 터뜨렸다.

 

 “뮐러, 네가 웬일이냐?”

 

 뮐러는 대답도 않고 나를 방 안으로 들여보낸 뒤, 문을 잠갔다.

 

 깨끗한 침대 시트, 둥근 갈색 탁자, 은은한 빛을 뿜는 촛대. 벽난로. 찻주전자. 둥근 곡선과 아라베스크문양이 새겨진 중세풍의 의자 두 개.

 

 루드비히 폰 뮐러는 군복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모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목이 긴 군화를 실내화로 바꿔 신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나는 남자 나이를 짐작할 줄 모른다. 특히 서양인은 같은 나이의 동양인보다 더 성숙해 보이기 때문에 잘 맞추지 못한다.

 

 “나는 1915년생이야. 너는?”

 

 1940년대에도 오늘날의 우리처럼 나이를 묻는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물론 웃음보를 터뜨리진 않았다. 아무리 순박하고 착해 보여도 상대는 독일군인데다가, 웃을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27살...그러니까.....”

 

 “그럼 나와 같은 나이잖아.”

 

 그는 내게 다가와서 모포처럼 두르고 있는 내 외투를 잡아채고 옷걸이에 걸었다. 맹수 앞에 놓인 먹이처럼 조마조마하게 앉아 있는 내 모양새가 웃긴지 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일, 처음인가? 아, 밀레나가 이미 말했지.”

 

 “........................”

 

 “커피 한 잔 할래?”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 그는 능숙하게 차 주전자에 물을 받고 끓였다. 물이 끓자 찬장을 열어 커피 잔 두 개를 꺼내왔다. 장미 그림이 그려진 전형적인 유럽풍의 디자인을 보니, 내가 처한 현실과 장소를 실감했다.

 

 나는 1942년 3월, 프라하에 어느 작은 호텔, 나치 장교의 방 안에 앉아 있다.

 

 커피 그라인더를 직접 돌리며 분쇄한 원두를 거름종이에 받치고 뜨거운 물을 따르자 향긋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나는 전생에서도 커피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원두커피의 향을 맡으니 잔뜩 긴장해서 굳어진 온 몸 구석구석이 노곤하게 풀려 버렸다.

 

 무릎까지 오는 베이지색 원피스는 칼라와 소매 끝단만 진한 초콜릿색이다. 배색이 세련되고 단정한 이 원피스는 총지배인 밀레나의 선물이었다.

 

 달콤하고 구수한 커피 향에 취해 있던 중,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뮐러가 내 다리를 빤히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얼른 벌어진 두 다리를 붙여 앉았다.

 

 차를 마시는 동안, 그는 내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나 역시 침묵만 지키며 커피를 홀짝 거렸다.

 

 “검은 머리의 로렐라이.....”

 

 “뭐라고?”

 

 “검은 머리의 로렐라이 같다고... 지금 너.”

 

 마성의 목소리로 바다의 어부를 홀려서 익사시키는 로렐라이....

 아름답지만 위험한 바다의 정령.

 

 “잠깐 이 쪽으로 와서 앉아 봐.”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내게 손짓을 한다.

 옆으로 가면 내가 거부하지 못하는 그 어떤 일이 생기고 말 것이다.

 

 나는 찻잔에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홀딱 마셔 버렸다. 찻잔을 내 머리 위에 탈탈 털기까지 했다. 나의 그런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그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호탕하게 웃는다.

 

 아직 다가가지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는 나를 확 끌어 잡아 침대 위에 눕히곤, 내 몸 위에 엎드렸다.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나는 그의 얼굴만 말똥말똥 바라 봤다.

 그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내려다본다. 입가에 미소가 살짝 어린 표정으로.

 겁먹은 나의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뮐러 대위, 제발.”

 

 “루디라고 불러.”

 

 “루디, 나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 그래서 지키고 싶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전생에도 없었고, 이번 생에도 아직은 없다.

 

 사랑하는 남자...그런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단어는 송인하의 인생 사전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 순간을 모면하려면 그 방법이 제일 나았기 때문에 말했을 뿐.

 

 1940년대면 아무리 유럽이라도 여성의 정조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시대였으니 이 말은 먹혀들어갈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런데 그 계산은 루디에겐 통하지 않는 것만 같다. 내 몸 위에서 내려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내 얼굴에 닿아서, 온몸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네가 어딜 봐서 쥐새끼야?”

 

 “그게 무슨......?”

 

 “쥐새끼에, 진화가 덜 된 사람도 아닌 존재라고 배웠어.”

 

 “.....................”

 

 “아리안 혈통을 제외한 백인들, 예를 들어 슬라브 족이나 라틴 족은 2등 종족이라고 배웠고, 유태인, 동양인 흑인은 벌레만도 못한 열등한 존재라고 그렇게 배웠는데...”

 

 나는 아무 말이 없이 그를 맑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선택해야 했다. 그를 유혹한 뒤 원하는 정보를 얻든지, 아니면 잘 구슬려서 오늘 밤을 넘어가든지.

 

 나는 힘껏 그의 가슴을 밀어 빠져 나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것이 나의 선택이었다.

 

 체코인들을 위해서도 나는 이래선 안 된다.

 그가 착하든 말든, 선량하든 아니든, 나치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하고 몸을 섞을 순 없다.

 설령 그것이 고급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라도.

 

 그도 포기했다는 듯, 내 옆에 같이 앉았다.

 

 “넌, 이름이 뭐지?”

 

 “이나....”

 

 “이나, 내적 망명이라고 들어 본 적 있어?”

 

 처음 들어 본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지만, 넘겨짚기 보다는 그의 설명을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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